구조를 보라 구조론은 언어를 바꾸고 관점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거대한 혁명이다. 구조론은 구조를 본다. 사람들이 구조를 보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구조를 보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를 보는가? 원인과 결과를 본다. 그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사건이 있다. 대개 사건을 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원인과 사건이 종결된 후의 결과만 보는 것이다. 이상하다.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을 봐야 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볼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은 볼 수 없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의 임산부를 볼 수 있다. 원인을 본 것이다. 태어난 후의 아기도 볼 수 있다. 결과를 본 것이다. 출산장면은 볼 수 없다. 그런데 과연 볼 수 없는가? 아니다. 볼 수 있다. 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의사는 출산과정을 본다. 중요한 것은 봐서 알아낸 지식이 아니라 보는 방법이다. 구조론이 내리는 결론이 중요한게 아니다. 나는 공자가 옳고 노자가 틀렸다고 말한다. 과연 공자가 옳고 노자는 틀렸는가? 천만의 말씀. 누구 말이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공자는 사건을 보고 노자는 사물을 본다는 차이가 중요하다. 서로 다른 지점을 보고 있다. 공자는 사건을 이끌어가는 권력에 주목하고 노자는 사건이 종결된 후의 이득을 계산한다. 노자의 결론은 '별 이득이 없다'는 거다. 어차피 이득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거다. 공자는 권력을 본다. 사건을 일으키면 주도권을 얻어서 다음 단계를 지배한다. 작가는 독자를 지배하는 권력을 얻고 독자는 읽는 즐거움을 얻는다. 작가의 권력과 독자의 재미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노자는 독자들에게 책 읽어봤자 별수 없다고 말한다. 반면 공자는 작가가 얻는 명성에 점수를 준다. 실익은 없을지라도 영향력이 있잖아. 어디를 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사건을 볼 수 있느냐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있다. 때린 사람이 원인이면 맞은 사람은 결과다. 때린 사람을 보든 맞은 사람을 보든 둘 다 사물을 본다. 구조론은 때린 사람과 맞은 사람이 어쩌다 한 공간에 있었느냐다. 때린 사람은 서울에 살고 맞은 사람은 부산에 산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서 충돌하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보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공자와 노자의 바라보는 지점이 다른 거다. 구조론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자는 제안이다. 사건은 의사결정과정을 거쳐 일어난다. 그 진행과정을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정답을 찍으려고 한다. 결과만 맞추려 한다. 썩은 사과와 익은 사과 중에 어느 것을 고를까? 익은 사과를 고른 사람은 그 사과를 먹는다. 썩은 사과를 고른 사람은 사과에 대해 알게 된다. 그 사람은 사과장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당장 필요한 것만 찾으므로 실패한다. 불필요한 것에 진실이 있다. 그것은 통제권이다.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어떤 달콤한 대상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통제권이기 때문이다. 통제권은 그 사건의 진행중에 존재한다. 문제는 사건의 진행과정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사건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맞물림의 원리 그 자체를 안다면 사건을 파악할 수 있다. 보통은 원인과 결과의 둘을 떼어놔야만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긴다. 틀렸다.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움직임과 나란히 움직이면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관측자의 포지션에 서서 관측대상을 바라본다. 거기에 대칭이 있다. 관측은 대칭을 사용한다. 그 대칭을 배척해야 한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의 대칭을 버리고 내부에서 돌아가는 자체의 대칭을 추적하면 된다. 자동차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밖에서 알 수 없다. 차에 직접 타보면 된다. 변화와 나란히 움직이면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 사건 내부에 대칭이 존재한다. 대칭된 둘의 한쪽에 서서 다른 쪽을 관측해야 한다. 사건 내부에 존재하는 자체대칭을 추적하라. 사건에는 안과 밖의 대칭이 있다. 중심과 주변의 대칭이 있다. 좌우의 대칭이 있다. 앞뒤의 대칭이 있다. 그다음 관측자와의 대칭이다. 사건은 먼저 계를 만들고, 다음 코어를 만들고, 대칭을 만들고, 방향을 만들고, 위치를 만든다. 관측자는 마지막 위치를 본다. 위치가 성립하기 전의 계와 코어와 대칭과 방향은 밖에서 살피는 관측자가 볼 수 없다. 질은 밖이 안을 본다. 입자는 중심이 주변을 본다. 힘은 대칭이 마주 본다. 운동은 앞이 뒤를 본다. 량은 관측자가 위치를 본다. 우리는 사건의 다섯 단계 중에서 마지막 량을 본다. 그 이전에 봐야 할 것들은? 보지 않는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 보지 않는 것이다. 구조론은 보지 않는 것을 보자는 제안이다. 왜 보지 않을까? 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별을 보려면 망원경을 써야 하고 균을 보려면 현미경을 써야 한다. 도구를 써야 볼 수 있다. 그 도구는 구조다. 곧 얽힘이다. 사건은 얽힘에 의해 일어난다. 얽힘을 보면 된다. 무엇이 얽히는가? 안과 밖이 얽히고, 중심과 주변이 얽히고, 대칭이 서로 얽히고, 방향이 얽히고 위치가 얽힌다. 얽힘은 둘의 얽힘이다. 그 둘 중에 하나가 되어 다른 쪽을 보면 된다. 사건 내부로 뛰어들어 사건과 나란히 흘러가면 사건의 전모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부단히 선택해야 한다. 대부분은 권력과 이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아기가 찌찌를 먹는 것은 이득의 선택이다. 엄마가 찌지를 먹이는 것은 권력을 선택한 거다. 주는 자는 권력을 얻고 받는 자는 이득을 얻는다. 노자는 그 이득 때문에 도리어 권력자에게 뒷덜미를 잡히므로 이득을 추구하지 말라고 한다. 그 말이 틀린게 아니다. 은행에 돈을 빌리면 이득이지만 이자부담을 진다. 뒷덜미를 잡히는 것이다. 노자 말이 맞았다. 공자는 돈을 빌려주는 방법으로 권력을 쥐라고 말한다. 주는 자가 권력을 가진다. 주는 자는 받는 자가 그것을 어디에 사용할지 용처를 결정할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찌찌를 먹고 힘을 내서 엄마를 때리면 안 된다. 직원이 월급 받고 회사를 공격하면 안 된다. 문제는 받는 사람의 이득은 눈에 보이지만 주는 사람의 권력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식을 잘못 키워서 자식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가 다반사다. 권력을 놓쳐버린 것이다. 공자는 그 보이지 않는 권력을 보는 사람이다. 그 권력에 의리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권력을 배신하는 자는 의리 없는 자다. 보이지 않는 권력을 볼 수 있다. 사건은 다섯 가지 대칭의 연결로 존재한다. 안과 밖의 대립이 중심과 주변의 대립으로 변화된다. 북한과 남한의 안팎 대결이 중심을 차지한 여당과 주변을 차지한 야당의 대결로 전환되는 거다. 의사결정 지점에서 여야의 맞대결로 전환된다. 결정이 실행되면 명령하는 자와 따르는 자의 앞뒤대결로 전환된다. 사건은 부단히 대결형태를 전환시킨다. 우리는 그 전환과정을 낱낱이 추적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