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도무지 언어의 출발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냉동제품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요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 전에 채소부터 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 전에 밭에 가서 수확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자연인들은 다들 그렇게 하던데 말이다. 아니 그 전에 씨앗부터 파종해야 하는거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종묘상에서 씨앗을 구해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밭은 어디에 있지? 기후는 농사에 적합하니? 이런 식으로 추궁하자면 끝이 없다. 논쟁을 한다고 치자. 이쪽은 사과가 빨갛게 익었다고 한다. 저쪽은 아직 덜 익어서 퍼렇다로 받는다. 보통은 팩트경쟁으로 들어가서 과연 사과가 얼마나 익었는지 시시콜콜 따진다. 한쪽은 잘 익었는데 반대쪽은 설익은 풋사과다. 애매해진다. 논쟁은 점차 수렁에 빠져든다. 보통은 팩트를 잘 준비해 온 쪽이 이긴다. 숫자만 나열하면 된다. 그 분야의 현학적인 전문용어를 던져주면 이긴다.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이런거 먹힌다. 랑그에 빠롤도 나쁘지 않다. 시뮬라시옹에 시뮬라크르는 몰렸을 때 써먹는 최종병기가 된다. 소쉬르에 들뢰즈라면 어디 가도 꿀리지 않는다. 단어 한두 개로 밥 먹는 철학자 아저씨들 말이다. 관념의 향연. 이쯤 되면 누구도 승복하지 않게 된다. 토론이 숫자를 암기하는 기억력 대결이 되고, 전문용어를 전시하는 학벌대결로 변질되면 찾고자 하는 진실은 사라지고 없다. 공허한 말장난뿐이다. 에토스 팔다가 에토스가 사라지는 사태가 연출되는 것이다. 에토스는 관계를 다지는 공감능력에 있다. 이기려고 할수록 신뢰를 잃는다. 에토스를 잃는다. 인간은 균일한 계에서 에너지를 획득한다. ‘나는 너랑 달라.’ 하고 선언하면 유리창은 깨진 것이다. 파국이다. 관계는 파투났다. 이제는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나는 너와 같다.’가 대화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관계의 성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먼저 밭을 구한 다음 씨앗을 뿌리듯이 관계를 다지고 대화를 해야 한다.
이기려는 의도를 들키면 진다. 사람을 설득하겠다면서 사람을 이겨먹으려고 하는게 보통이다. 사회자가 출연자를 이겨먹으려고 한다. 조중동 기자가 무려 대통령을 이겨먹으려 든다. 이는 국민을 굴복시키려는 행동이다. 설득하려는 의도를 들키면 진 거다. 목적이 앞서면 진다. 분노가 앞서야 이긴다. 생기와 활력이 앞서야 이긴다.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손발이 맞는 것을 보여야 이긴다. 구색이 맞고 조합이 맞고 앙상블을 이루고 합이 맞아야 한다. 내편 네편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합을 맞출 수 있어야 진짜다. 합을 이루는 상호작용이 먼저고, 구심점을 이루는 대의명분이 앞서고, 거기서 신뢰의 에토스가 나오는 것이며, 감정이입의 파토스는 다음이고, 말솜씨의 로고스는 잔기술에 불과하다. 상호작용이 불이고, 대의명분이 요리재료라면, 에토스가 요리도구다. 파토스는 양념이고, 로고스는 떠먹는 숟가락 정도나 된다. 잡스는 스마트폰을 만들어 천하에 커다란 상호작용을 일으켰고 구글은 공짜 OS로 대의를 선점했다. 카리스마를 연출하는 에토스는 거기에 있다. 먼저 밭을 마련한 다음에 씨앗을 뿌려야 한다. 먼저 수확한 다음 요리해야 한다. 밭은 당연히 있다고 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숨은 전제다. 상대를 이기먹으려들지 말고 너와 내가 왜 이 자리에 함께 앉아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우리가 운명적으로 한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거기가 제 1 명제다. 말하라! 당신은 왜 이곳에 있는가? 당신이 잘 났으면 미국이나 독일에 가 있지 왜 이곳에서 껍죽대고 있는가? 말하기 앞서 그것을 나타낼 언어를 획득하는게 먼저다. 자기 언어를 획득하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 우리는 의견이 있어 말한다고 믿지만 가짜다. 의견은 그냥 상대방 입을 보면서 마구 쏟아내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뱉은 언어를 주워들고 동사만 살짝 틀어주면 된다. 동사 말고 주어를 보라. 주어 말고 전제를 보라. 전제 말고 담론을 보라. 담론은 내게 의견으로 담겨 있는게 아니라 천하에 깔려져 있다. 표적을 보지 말고 출발점을 보라. 화살은 과녁을 위해서가 아니라 활의 내면에 들어찬 분노에 의해 날아간다. 분노를 끌어내는 상호작용을 보라. 거기에 무언가 있다. 잡스 아저씨가 조용한 세계에 PC를 던지고 스마트폰을 던져서 이 사태를 연출한 것이다. 이 세계에 툭 던져진 것이 있다. 당신의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무엇이 내던져졌는가? 툭 내던져진 그것을 본 사람이면 말할 자격이 있다. 고대에 그것은 철기였다. 중세에 그것은 말이었다. 근대에 그것은 총이었다. 지금에서 그것은 미디어다. 미디어 담론의 공유로 너와 내가 같아진 것이 대 언론전쟁의 발발원인이다. 미디어에 의해 평등해진 것이 국민이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기레기를 타도하고, 검찰개혁에 나서는 본질이다. 태극기 할배가 나대는 것도 마찬가지. 우리는 전보다 같아져 있다. |
"‘나는 너와 같다.’가 대화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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