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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400 vote 1 2019.12.30 (17:48:52)

    주체의 관점을 획득하라


    나의 목적은 용감하게 진실을 말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일체의 종교를 반대하지만 인간의 종교적 본성,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사회적 본성 중에서 부족주의적 속성, 곧 가족보다 큰 단위의 대안가족 혹은 이와 유사한 패거리를 만들려는 경향을 인정한다. 인간은 무리 지어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동물이다. 


     그 무리는 시민의 촛불이 될 수도 있고, 부족민의 축제가 될 수도 있고, 기성종교가 될 수도 있고, 학교가 될 수도 있다. 종교나 대안가족 혹은 패거리의 궁극적인 구심점이 신이다. 모든 의사결정을 유의미하게 하는 궁극적인 근거 말이다. 주먹을 믿는다는 사람도 있다. 주먹이 사회에 통한다는 사실을 믿는 즉 사회를 믿는 것이다.


    주먹은 사회와 연결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믿음이 있으면 믿는 대상이 있는게 아니라 그 믿음의 주체가 있는 것이다. 믿는 대상은 적당히 갖다 붙인 말일 뿐이다. 사격술이 있으면 표적이 있는게 아니라 총이 있는 것이다. 표적은 아무거나 세워 놓으면 된다. 표적이 있기 때문에 쏘는 것이 아니라 총이 있기 때문에 사격하는 것이다. 


    주체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 따른 행동의 일관성이 있고 그 일관성에 의한 사회적 연결과 그 연결에 따른 의미가 있다. 그 연결의 구심점이 신이다. 신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다. 그 주체는 입자가 아니라 질로 존재한다는 점이 각별하다. 믿음은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집단의 상호작용이다.


    인생의 허무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개인의 행동은 당연히 구심점이 없어 연결이 끊어진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 차원에서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사회적 행위는 유의미하다. 사회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행위는 상호작용으로 연결된다. 신의 존재는 의미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상호작용에 따른 믿음과 그에 따른 삶의 일관성과 그에 따른 사회적 연결이 의미다. 범신론 혹은 이신론과 일부 견해가 겹치지만 둘 다 대상화의 오류를 극복하지 못한다. 주체의 관점이 아니다. 범신론이든 이신론이든 뭐 그렇다 치고 그것이 어떻게 내게서 믿음과 일관성과 연결을 끌어내어 유의미한가다. 그래봤자 허무하다.


    상호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상관없으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주체의 관점이다. 중력이 존재하는 것은 나와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범신론이든 이신론이든 지구의 중력처럼 나와 부단히 상호작용하는가? 나의 바깥 멀리 어딘가에서 깔짝거리는건 의미가 없다. 매 순간 나와 호흡을 일치시켜 함께 연주하지 않으면 의미없다.  


    범신론은 일원론을 부정하고 다원주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이신론은 신과의 대화를 부정하는 즉 신을 대상화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의 바깥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다면 그게 외계인이지 어찌 신이냐다. 바깥에 뭔가 있는데 그것이 우주를 창조했든 뭘 했든 죽여야 한다. 만약 외계인이 실제로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외계인의 노예가 되거나 절멸될 확률이 100퍼센트다. 우주는 무한히 넓으므로 하나가 있다면 무한히 많다. 무한히 많은 외계인이 일제히 지구에 오면 당연히 지구가 짜부라져서 망한다. 그런데 왜 아직 지구는 망하지 않았지? 외계인이 없거나 혹은 지구로 올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연결돼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거다.


    인간 바깥의 어떤 존재든 보는 즉시 때려죽이지 않으면 인류가 먼저 죽는다. 왜 그런지는 통제가능성의 원리로 진작에 설명한 바 있다. 주체의 관점이냐 대상의 관점이냐다. 주체화되어야 한다. 내 자식이 명문대 입학하면 자랑하고 싶다. 자신의 성공처럼 기뻐한다. 자식도 남인데 왜 좋아하지? 남의 일을 왜 내 일로 착각하지? 


    왜 배 아파하지 않지? 자신은 서울대 근처도 못가 본 주제에 남이 서울대 갔다면 약오르잖아. 자식이 명문대 붙었다고 약올라 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천만에! 옛날에는 대개 무학이므로 자녀가 글 배워서 잘난 척하는게 배가 아파서 자녀를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계집애가 글 배우면 되바라져서 못 쓴다는 말도 있었다.


    혹은 학교에 보내도 장남만 보내고 차남은 보내지 않았다. 자녀를 지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고 싶어한 역사는 길지 않다. 왜 그랬을까? 왜 무지렁이들은 자녀가 출세하는 것을 시기하고 싫어했을까? 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식은 당연히 남이다. 통제할 수 없으면 곧 남이 된다.


    가족도 때로는 남이고 부부도 당연히 남이다. 남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통제가능하냐 불가능하냐다. 이는 상대적이다. 통제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부모와 자식이 같은 지역구 공천을 노려 싸우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한국인이 자녀를 명문대 보내고 싶어 하게 되었다. 왜? 자식은 남이잖아? 


    자녀를 명문대 보내면 주위로부터 칭찬받는다는 사실을 경험하여 알았기 때문이다. 50년 전만 해도 자녀를 공부시켜 놓으면 보나마나 서울로 도망칠 건데 하고 발목을 잡는 일이 흔했다. 소는 누가 키우고? 그러나 주위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자 태도를 바꾼 것이다. 남이냐 아니냐는 주변의 공기가 만들고 환경이 만드는 것이다. 


    흔히 개인주의라고 하고 이기주의라고 하지만 이기적 행동 역시 사회를 의식한 것이다. 관종들이 튀는 행동을 하는 것도 남의 주의를 끌려는 것이다. 진정 자기만 아는 사람은 산속에 사는 자연인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원하는 것이다. 남을 돕거나 혹은 남을 해쳐서 집단과의 관계가 긴밀해질 수 있다.


    자녀가 명문대 가면 뭐가 좋지? 집단과의 관계가 긴밀해진다. 인간은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우주는 일원적으로 존재하며 둘이 마주치는 접점이 있다. 그것은 만물에 흩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우주를 창조한 어떤 괴물도 아니고 인간에게 대상화될 수 없는 즉 인간과 뗄 수 없는 존재다. 사회는 인간과 뗄 수 없다.


    개미가 홀로 고립되면 며칠 안에 죽는다. 여왕개미의 페로몬을 맡아야 살 수 있다. 인간은 의사결정의 중심과 뗄 수 없다. 행위가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즉 허무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사결정도 할 수 없게 된다. 지상의 어떤 것도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인간의 어떤 생각도 집단과의 부단한 상호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의사결정은 항상 중심에서 일어난다. 개별적인 결정은 착각에 불과하다. 나만 잘되면 돼 하는 것도 남을 의식한 것이다. 개인으로 보면 인생은 허무하다. 의미는 집단과의 연결에 있다. 상호작용구조 안에서의 호흡에 있다. 개미가 페로몬 안에서 살아가듯이 원래 상호작용구조 안에서 호흡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믿음이다.


    아기가 엄마를 믿는 것은 내가 귀엽게 옹알이를 하면 엄마가 나를 돌봐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 아니다. 아기는 왜 엄마를 믿을까? 중력이 동시에 영향을 미치듯 상호작용은 동시에 일어난다. 내가 이렇게 귀여움 공격을 발사하면 엄마가 저렇게 찌찌로 보상한다는 타산이 아니다. 엄마의 마음과 아기의 마음은 동시에 움직인다.


    아기든 엄마든 호르몬 속에서 호흡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내가 믿으면 나중 보상받는다는 생각은 믿음이 아니다. 엄마가 아기를 믿는 것은 나중에 커서 효도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 아니다. 자석의 N극과 S극이 동시에 움직인다. 그것이 상호작용이다. 그 상호작용의 끝에 믿음이 있고 믿음의 끝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의미를 계속 연결하여 가면 의사결정의 중심을 만나게 된다. 신이 인간에 의해 대상화되는 순간 신이 아니다. 그저 퇴치되어야 할 우주괴물에 불과하다. 여왕개미는 개미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페로몬에 의해 언제나 상호작용으로 통일되어 있다. 신은 나의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방송국은 라디오 바깥 어딘가에 성립할 수 없다. 


    둘은 항상 연결되어 일체인 것이 상호작용이다. 오로지 의미로만 따져야 한다. 인간에 의해 지목되는 물리적 대상이 되면 안 된다. 철저하게 주체화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결론은 내가 어떻게 할 것이냐다. 의사결정이 유의미한 길은 하나뿐이다. 우주의 중심, 문명의 중심과 연결된 상호작용상태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국소성을 극복하고 있다.

    - 의미있는 의사결정은 연결의 중심에서만 일어난다.

    - 개인의 행동이 사건의 형태로 사회와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다.

    - 대상화되는 즉시 연결은 끊어지고 의미는 사라져서 인간은 허무해진다.

    - 내가 어떻게 의사결정의 중심과 연결시켜 행동할 것이냐에 신의 의미가 있다.

    - 나의 맞은편에서 물리적으로 대상화되는 즉 그것은 우주괴물이지 신이 아니다.

    - 인간 바깥에 어떤 강한 것이 있다면 온 힘을 다하여 죽여야 한다.

    - 주체의 관점은 내가 어떻게 할 것이냐다.

    - 주체의 관점은 집단과의 상호작용에 기초하여 그에 따른 믿음과 일관성과 연결과 의미를 도출하는 의사결정이다.


    상호작용은 지구의 중력처럼 혹은 방송의 안테나처럼 24시간 연결되어 있다. 상호작용이 끊어지거나 희미하므로 믿음이 없어진다. 믿음이 없어 불안하고, 불안하므로 환경에 휘둘리고, 외력의 작용에 휘둘리므로 일관성 없이 허둥대고, 연결이 끊어져 고립되고, 의미가 없어 죽어가는 것이다. 고립된 개인의 삶은 본래 허무하다. 


    반대로 부단한 상호작용에 의해 엄마 품의 아기처럼 태산 같은 믿음을 얻고 그에 따라 환경을 극복해 가는 데서 삶의 일관성을 얻고 그리하여 세상과의 연결을 얻어내고, 사건을 연결시켜 의미를 얻는 것은 의사결정 중심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북극은 어떤 대상이 아니다. 북극은 분명 있지만 거기에 찾아낼 무언가는 없다. 


    지구가 자전하므로 북극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우주의 의사결정 중심과 상호작용하므로 신이 있는 것이다. 나의 행위에 의해 있는 것이 주체의 관점이다. 라디오의 수신에 의해 방송국의 송신이 있는 것이다. 수신자가 사라지면 송신도 소멸한다. 뭔가 방송국의 기계가 돌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송신기 없는 그것은 고장 난 기계다.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공전하므로 북극성이 있다. 천하와의 부단한 상호작용과 그에 따른 믿음과 환경을 극복하는 일관성과 사건의 사회적 연결과 의미에 따라 인간은 행위하고 우주 역시 그러한 일원론의 원리로 존재하므로 둘의 접점이 되는 신은 있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부단히 상호작용하고 의사결정하는 것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19.12.31 (05:48:00)

"의사결정이 유의미한 길은 하나 뿐이다. 우주의 중심, 문명의 중심과 연결된 상호작용상태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http://gujoron.com/xe/115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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