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존재의 본래 모습이고 사물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이다. 우리는 단지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많은 경우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정지해 있거나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작용에 반작용하는가 하면 일정한 크기를 갖춘 것이다. 어떤 것은 작아서 못 보고, 어떤 것은 빨라서 못 보고, 어떤 것은 내부에 감추어져 있어서 못 보고, 어떤 것은 자극에 반응하지 않아서 못 본다. 에너지는 형태가 없으므로 볼 수 없다. 세포는 투명하지만 염색약을 사용하면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염색체가 특히 염색이 잘 된다고 해서 이름이 염색체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형태로 바꿔서 볼 수 있다. 에너지energy는 안en에서 일ergy한다는 뜻이다. 내부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닫힌계에 가두면 볼 수 있다. 에너지는 움직이지만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멈춘다. 멈추면 에너지가 보인다. 사물은 정지해 있으므로 눈에 보이지만 사건은 기승전결로 진행하므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건도 특별한 수단을 사용하면 볼 수 있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수학은 대칭을 따라간다. 대칭이라는 수단을 써서 보는 것이다. 관측자와의 대칭을 추적하면 대수학이고 대상 내부의 자체적인 대칭을 추적하면 기하학이다. 1 야드는 왕의 코에서 손끝까지다. 1 피트는 발 크기다. 왕은 키가 182센티에 왕발이었다. 팔길이와 키는 비슷하다. 아마 신발을 신고 1피트를 쟀을 것이다. 셈한다는 것은 관측자 기준이다. 1은 관측자인 인간과 관측대상을 연결하는 라인이 1이다. 숫자는 인간이 기준이므로 자연의 내적 질서와 맞지 않다. 기하도 자연의 질서와 어긋난다. 대수학이든 기하학이든 대칭을 추적한다. 앞이 있으면 뒤가 있고, 왼쪽이 있으면 오른쪽이 있고,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공간의 대칭성이 존재하므로 이것을 통해서 저것을 안다. 관측을 통해서 값을 안다. 기하학의 성립이다. 만약 공간에 위아래도 없고, 좌우도 없고, 상하도 없다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대상을 추적할 방법이 없다. 이런 대칭이 사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에도 당연히 대칭이 있다. 원인에는 결과가 있고, 시작에는 종결이 있고, 머리에는 꼬리가 있다. 질이 있으면 량이 있고, 전체가 있으면 부분이 있고, 중심이 있으면 주변이 있다. 그런데 사건의 대칭은 파악하기 어렵다. 사물은 공간에 가만히 머물러 있으므로 자로 재면 된다. 일단 눈에 보이는 길이를 잰 다음 뒤에 가려진 부분을 추론할 수 있다. 가로세로높이의 대칭성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사건은 시간을 타고 가므로 재기가 어렵다. 양자역학과 같다. 계측하려고 줄자를 대면 숨는다.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관측할 수 없다. 그런데 딱 멈추는 지점이 있다.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그럴 때 에너지는 운동을 멈추고 대칭을 도출한다. 그 장소에 그 타이밍을 정확히 맞추면 에너지의 방향성을 추적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은 기승전결의 전개 과정에 다섯 번 에너지의 진행방향을 바꾼다. 그럴 때마다 대칭을 만든다. 딱 걸리는 것이다. 풍선은 기압을 잴 수 있고 물은 수압을 잴 수 있다. 닫힌계에 가두면 잴 수 있다. 위치에너지를 잴 수 있고 운동에너지를 잴 수 있다. 마력과 토크를 잴 수 있다. 사건을 재는 수학이 구조론이다. 왜 인간은 사건을 재지 못하는가? 재려고 하면 끝났다. 사건의 종결점에 자를 가져다 대기 때문이다. 출발점에 서서 사건과 함께 진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이 사건을 일으켜야 사건을 잴 수 있다. 이전에 일어난 사건은 잴 수는 없다. 이미 끝난 일이니까. 단지 새로 일으킨 사건을 근거로 추론할 뿐이다. |
"출발점에 서서 사건과 함께 진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이 사건을 일으켜야 사건을 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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