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에 답은 있다. 구조론이 일반의 편견과 부딪히는 지점은 답이 있느냐다. 사람들은 막연히 답이 없다고 여긴다. 인생에 정답이 없어. 철학에 분명한 답은 없어. 세상은 원래 답이 없는 거야. 참으로 편리한 발상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허튼 유행을 만들었지? 한심한 일이다. 첨단과학이 지배하는 21세기 이 개명한 시대에 봉건시대에나 먹힐 법한 아둔한 소리를 하다니. 그런 멍청한 소리나 할 양이면 도대체 학교에는 왜 다녔지? 도대체 초중고대 16년 동안 무얼 배운 거야?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문제가 있는데 왜 답이 없어? 문제와 답은 대칭이다. 원인과 결과는 대칭이다. 시작과 종결은 대칭이다. 머리와 꼬리는 대칭이다. 앞과 뒤는 대칭이다. 앞은 있는데 뒤가 없거나 원인은 있는데 결과가 없거나 머리는 있는데 꼬리가 없다거나 시작은 있는데 종결은 없거나 하는 일은 없다. 문제가 있는데 답이 없을 수는 없다. 이는 1+1=2처럼 명확하다. 문제를 뒤집으면 답이다. 1+1을 뒤집으면 2다. 2를 뒤집으면 1+1이다. 앞을 뒤집으면 뒤고 머리를 뒤집으면 꼬리고 원인을 뒤집으면 결과이고 시작을 뒤집으면 종결이다. 왜 뒤집지를 못하지? 그런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조론이 똑부러지는 정답을 제시한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고. 조선시대와 비슷하다. 서양 수학자가 맞는 답을 제시하면 화를 낸다. 그렇게 에누리 없이 똑 부러지면 쓰냐고. 미친 거다. 그러니까 서세동점에 당하는 것이다. 등신같이 앉아서 처맞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에누리없이 똑 부러져야 수학이다. 그래야 과학이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등신같은 소리는 하지를 말자. 종교를 믿을까 말까? 답은 없고 각자 알아서 하는 거다. 이런 등신같은 소리가 배웠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된다. 봉건시대는 몰라서 그랬던 거다. 그 시대는 점집을 찾든 교회를 찾든 상관이 없었다. 다만 공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못배워먹은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에 정보가 널려 있다. 비단 구조론이 아니라도 기본적인 상식의 문제다. 제 손으로 등신 확인서를 쓰면 안 된다. 무당 찾고 귀신 찾고 음모론 찾고 외계인과 채널링 하고 라즈니쉬 추종하고 공산당 따르고 주사파짓 하고 그런 뻘짓은 곤란하다. 바둑에는 정답이 있다. 물론 정답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디에 두든 상관없다. 두고 싶은데 두는 것이다. 그런데 진다. 알파고는 정답을 알고 있다. 여기서 혼선은 당장 한 수로는 정답이 없지만 확률로는 분명히 정답이 있다. 로또의 정답이 분명히 있다. 번호가 다른 800만장을 구입하면 그 중에 하나는 1등에 당첨된다. 실제로 이 수법을 써서 크게 성공한 사람도 있다. 한국은 세금이 많아서 안 된다. 다만 한 가지. 정답은 있지만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정답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답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라고 해서 화를 내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정답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이런 부분을 명확히 하지 않고 잘못된 판단을 반복하는게 문제다. 전략을 세워서 체계적으로 접근하면 소기의 성과를 올릴 수 있다. 그런데 해내지 못한다. 변덕 때문이다. 거의 98퍼센트 성공해놓고 포기하면 그 확률은 누구에게 가겠는가? 뒤에온 사람이 부족한 2퍼센트를 채우고 다 먹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인생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인생에 정답은 있고 그러므로 체계적인 전략을 세워 장기전을 하면 된다. 인생에는 정답이 있다. 미학에는 정답이 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을 뿐이다. 언어의 문제를 사실의 문제로 호도하는게 문제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에게 정석을 설명하기는 불능이다. 구조론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이를 설명하기는 불능이다. 확률을 모르는 사람에게 확률로 말해주면 시큰둥해한다. 당장 프로야구 감독 중에 확률을 써먹는 감독이 몇이나 될까? 그들은 확률은 야구의 답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건 그냥 무식한 것이다. 그들은 확률을 알려줘도 써먹는 방법을 모른다. 못 배웠으니까. 그렇다. 무식은 자랑이 아니다. 그들은 구조론을 모른다. 그러므로 당연한 반응이다. 사실이지 확률은 훌륭한 답이다. 주사위를 한 번 던져서 특정 눈금이 나올 확률은 적지만 백만번 던지면 명확하다. 한 번 던지면 상대적이고 백만번 던지면 절대적이다. 구조론의 정답을 부정하는 사람은 확률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들은 사실 주사위를 한 번 던진 것이다. 성의가 없는 것이다. 반복하면 구조론이 옳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왜 이 점이 중요한가? 대부분 확률을 만드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문제다. 닫힌계에 잡아가두면 확률이 등장한다. 즉 세상이 상대적인 것은 밖에서 바라보기 때문이고 안에 가두면 절대성으로 바뀐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듯이 모든 상대적인 것은 닫힌계에 가두어 절대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컴퓨터 알고리즘에 비유하기다. 사실 컴퓨터는 원래 덧셈 밖에 못한다. 뺄셈은? 2-1은 2+(-1)이다. 마이너스를 더하면 그게 뺄셈이다. 곱셈은? 덧셈을 반복하면 그게 곱셈이다. 나눗셈은? 분수를 곱하면 그게 나눗셈이다. 같은 방식으로 방정식이든 함수든 미적분이든 모두 해결되는 것이다.
즉 세상에는 원래 덧셈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마이너스다. 뺄셈이다. 뺄셈을 뒤집으면 덧셈인데 컴퓨터 언어를 만든 사람이 덧셈을 기준으로 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즉 세상은 이것저것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전부 1인데 이를 뒤집고 쌓고 펼치고 지지고 볶고 데치고 삶고 굽고 절이고 삭히고 기타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하여 칼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주는 지극히 단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복잡하지 않다. 그럼 복잡한 것은 뭐지? 둘이 섞인 것이다. 예컨대 이런 거다. 물질을 쪼개보니까 소립자의 성질이 참으로 다양하더라. 별게 다 있어. 스핀이라는 것도 있고 양자얽힘이라는 것도 있고. 초끈이론은 26차원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당구공의 형태가 다양한게 아니고 쿠션이 다양한게 아닐까? 당구대는 직사각형이다. 오각형 당구대가 있다면? 육각형 당구대라면? 우리가 빛의 성질이라고 알고 있는 여러가지가 사실은 공간의 성질일 수도 있다. 즉 우리가 복잡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수학이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방정식으로 복잡하다는 것과 같다. 사실은 덧셈 밖에 없는데? 나머지는 프로그램이 연출한 건데? 구조론으로 보면 우주는 마이너스 밖에 없다. 그것을 반대편에서 보면 플러스다. 빛의 성질이 얄궂은 것이 아니고 공간의 성질을 빛의 성질로 착각한 것일 수 있다. 이렇게 풀면 죄다 풀린다. 일본인들은 참 이상해. 아냐. 섬이라서 그래. 제주도 사람도 만만치 않아. 영국사람은 참 이상해. 아냐. 섬이라서 그래. 니들도 영국에서 살아보면 그렇게 될 걸. 사람을 쳐다보면 복잡하다. 일본인 얄궂고 영국인 해괴하다. 그러나 환경을 보면 간단한 것이다. 세상이 복잡하고 다양하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상대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상대성을 뒤집으면 절대성이다. 간단하다. 절대성으로 보면 단순하다. 구조론은 닫힌계를 쓴다. 잡아가두고 문을 닫아걸고 보면 환경에 지배되는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걔는 왜 저러지? 이해 안 되네. 이상한 일이야. 세상에 별 넘이 다 있구만. 희한한 일일세. 괴짜구만. 천만에. 환경을 보라. 당신도 그 환경에 처하면 그렇게 된다. 절대성으로 보면 절대성이 보이는 것이다. 상대적인 이유는 당신이 상대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누가 상대성으로 보랬냐고? 누가 밖에서 보랬냐고? 왜 닫힌계에 가두지 않지? 왜 주사위를 한 번 던지지? 왜 바둑 한 수를 두어놓고 답이 없다고 우기지? 끝까지 가보라고. 반복해 보라고. 개인을 보지말고 집단을 보라고. 인류 전체를 보라고. 답이 보인다. 보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에 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당구대를 보면 되는데 당구공만 보니까 상대성으로 보이는 것이다. 당구대의 형태가 당구공의 진로를 결정한다. 인간은 다 똑같다. 환경이 다를 뿐이다. 당신이 내가 겪은 것을 겪었다면 나처럼 말한다. 중국인은 왜 저절까? 땅이 넓으니까 그렇지. 러시아인은 왜 불곰처럼 행동하지? 시베리아에 살아보라고. 11월부터 눈이 쌓이기 시작해서 5월이 되어야 외출이 가능하다. 그 긴 겨울동안 뭣하지? 토스토예프스키의 긴 소설을 읽어준다. 그래서 문호가 많다. 모든 상대적인 것은 간단한 변환을 거쳐 닫힌계에 가두는 방법으로 절대성으로 변환하고 확률을 도출하여 정확한 값을 찾아낼 수 있다. 밖에서 보니까 상대적이고 안에서 보면 절대적이다. 안을 만들려면 울타리를 쳐야 한다. 개인보다 씨족이 울타리다. 씨족보다 부족이 울타리고 부족보다 국가가 울타리고 국가보다 인류가 울타리다. 인류보다 문명이 더 긴 호흡이다. 더 큰 단위로 보면 닫힌계가 작동하고 확률이 도출되고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다. 단 장기전을 벌여야만 이 원리를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당장 내일 주가 오를 종목을 찍어달라는 식으로 조급하게 독촉하면 안 된다. 바둑에 정석이 있다는 사실은 끝까지 두어봐야 아는 것이다. 알파고가 정확한 답을 안다는 사실은 바둑이 끝나봐야 안다. 큰 단위로 보면 항상 정확한 답은 있고 지름길은 있다. 답이 없다고? 그걸 뒤집으면 답이 있다가 된다. 왜 뒤집지 않지? 바보냐? 상대적이라고? 그걸 뒤집으면 절대적이잖아. 나는 항상 꼬리라고? 그걸 뒤집으면 항상 머리가 되잖아. 왜 뒤집지 않느냐고. 단 더 큰 단위로 올라서야만 뒤집을 수 있는게 함정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이 그 단위에서는 절대 뒤집을 수 없다는게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엔트로피는 마이너스다. 100을 뒤집으려면 최소 101로 출발해야 한다. 밖에서는 뒤집을 수 있지만 안에서는 뒤집을 수 없다. 외부에 대칭을 만들게 되면 뒤집을 수 있다. 구조론은 그냥 단순히 정답을 찍어주는게 아니고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걸쳐 단계적으로 최선의 대응을 제안한다. 그런데 그게 답이다. 박항서 감독에게는 베트남 팀의 답이 보이고 히딩크 감독에게는 한국팀의 답이 보인다. 답은 있는데 설명할 언어가 없다. 구조론이 그 언어를 제시한다. 일의 우선순위가 있다. 그것이 답이다. 답이 여러개면 가중치가 있다. 그것이 답이다. 중요한 답을 먼저 말해야 한다. 답을 알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사실 실력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답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비겁하니까. 아무데나 두어도 바둑은 되지만 아무데나 두면 바둑을 진다. 한 수로 끝나는 답은 없지만 여러 수가 수순대로 모이면 훌륭한 답이 된다. 바둑의 답은 가장 효율적인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다. 상대의 전략이나 기력에 따라 달라지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상대성은 닫힌계에 가두면 절대성으로 변한다. 단 한 단계 위로 올라가야 닫힌계에 가둘 수 있다. 개인은 가족에 가두고, 가족은 부족에 가두고, 부족은 국가에 가두고, 국가는 인류에 가두고, 인류는 문명의 진보에 가두면 분명한 답이 도출되고 만다. 답이 없다고? 그걸 뒤집으면 답이 있잖아. 상대적이라고? 그걸 뒤집으면 절대적이잖아. 문제를 뒤집으면 답이잖아. 답을 뒤집으면 문제잖아. 원인을 뒤집으면 결과잖아. 결과를 뒤집으면 원인이잖아. 간단하잖아. 단 밖으로 나가서 한 차원 올라가야 풀린다. 개인을 뒤집으려면 밖으로 나가서 친구를 사귀어야 하고 가족을 뒤집으려면 회사에 출근해서 돈을 벌어와야 하고 부족을 뒤집으려면 국가로 나아가서 정권을 잡아야 하고 국가를 뒤집으려면 이웃나라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 용감하게 밖으로 나가야 한다. 모든 문제에 답은 있다. 그러나 그 답이 당신이 원하는 답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변해야 한다. 답은 나왔고 당신이 답에 맞추어야 한다. 진리를 당신의 기준에 맞출 수는 없다. 그 답은 당신이 원하는 답은 아니지만 당신 가족이 원하는 답이다. 당신의 가족이 원하는 답은 아니지만 당신의 부족이 원하는 답이다. 당신의 부족이 원하는 답은 아니지만 당신의 국가가 원하는 답이다. 당신은 검찰이거나 기레기거나 엘리트다. 검찰의 답도 기레기의 답도 엘리트의 답도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정답이다. |
"모든 상대성은 닫힌계에 가두면 절대성으로 변한다. 단 한 단계 위로 올라가야 닫힌계에 가둘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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