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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417 vote 0 2019.10.21 (18:31:50)

    배신과 의리


    배신은 물리학이다. 배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있으므로 배신한다.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 배신하는 게 아니다. 나쁜 사람이 배신하는 게 아니라 무능한 주제에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자가 배신한다. 당시 조정 대신 중에 이완용이 가장 유능했다.


    한때 탈중 독립운동을 주도해서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말도 있다. 처음 친미를 하다가 친러로 갈아탔다가 친일에 정착했다. 만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뭔가 보여주려고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친일을 한 것이다. 


    둘이서 동업을 한다면 배신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모든 의사결정은 하나의 좁은 관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으므로 일을 진행시키다보면 결국 한 사람이 의사결정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게 효율적이므로 그렇게 한다. 어어 하는 사이에 이미 배신되어 있다. 


    동업하는 이유는 본인에게 약점이 있기 때문인데 약점을 보완하려고 하다 보면 이미 배신되어 있다. 모든 것을 동료와 상의해서 처리할 정도로 인품이 된 사람이라면 혼자 경영을 해도 잘한다. 그 경우는 동업할 이유가 없다. 물론 구멍가게라면 상관없다.


    규모가 커지면 결국 사태가 꼬여버린다. 셋이면 배신하지 않는다. 중간에 중재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착되어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넷이면 2 대 2로 갈리고 다섯이면 숫자가 많아 내부에 서열이 생겨나서 평등한 구조가 깨진다.


    배신의 반대는 의리다. 인류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배신을 극복해온 의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배신을 거듭한 나라와 왕조들은 죄다 망했고 의리를 지킨 나라와 왕조가 흥했다. 다만 그 의리가 막연한 외침이나 호소가 아니어야 한다.


    의리는 계의 통제가능성에 따라 정밀하게 디자인되어야 한다. 일본의 무사도니 영국의 신사도니 서구의 기사도니 하는 것은 막연한 믿음과 안이한 대응으로 망가지지 않고 고도의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의리를 강제하는 장치다.


    로마군이 공병에 의지하는 이유는 공병은 적과 마주치지 않으므로 배신할 찬스가 없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의리를 강조하는 이유도 같다. 공론에 의해 검증하는 절차를 밟는 방법으로 배신의 여지를 제거한다. 투명한 시스템이 배신을 막아낸다.


    언론을 비롯하여 견제와 균형의 장치가 작동해야 한다. 선비의 의리는 평판공격을 통해 견제하는 것인데 언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평판이 언론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물리적으로 의리를 강제하는 시스템을 만든 나라들만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징기스칸의 부하 중에는 배신자가 한 명도 없다. 발주나 호수의 흙탕물을 함께 마시며 맹세한 열아홉 명 부하 중에 배신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징기스칸 만큼 배신을 많이 당한 사람이 없다. 친구 자무카에게 배신당했고 양아버지 옹칸에게 배신당했다.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자마자 타이치우트 족장 타르쿠타이 쿠릴투크에게 배신당했다. 그 이후로도 쭉 배신당했다. 아버지 예수게이 역시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게 되어 있는 초원의 불문율을 깬 타타르족에게 배신을 당해 죽었다. 유목민은 원래 배신한다.


    목축을 위해 이리저리 떠돌다 보면 사태가 꼬인다. 약속하고 맹세하지만 그게 배신의 단초가 된다.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으면 배신할 일이 없는데 서로가 약속을 믿고 판돈을 올리므로 배신할 수밖에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다. 믿으면 일을 벌인다.


    전쟁의 달인 자무카와 맹세를 해서 징기스칸의 위상이 올라가자 부족 안에서 평판이 높아져서 구르칸으로 선출되었다. 그게 배신의 단초가 되었다. 갑자기 친구의 명성이 높아지자 자무카는 매우 불편해진 것이다. 아버지 노릇을 해주던 옹칸도 같다.


    징기스칸의 세력이 커지자 그 세력을 흡수하지 않으면 케레이트족 안에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농경민이라면 누가 돈을 벌든 출세하든 상관없지만 유목민은 한 사람이 크면 다른 사람은 불안해진다. 흡수하지 않으면 바로 흡수당한다.


    징기스칸은 배신당하고 또 배신당했지만 징기스칸의 부하 중에는 단 한 명의 배신자도 없었다. 흉노 선우 묵특은 아버지에게 배신을 당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배신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 전통이 징기스칸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에너지를 통제하는 기술을 가진 자는 배신당하지 않는다. 배신과 극복을 통해 에너지를 통제하는 기술을 진보시키는 것이 문명이다. 자체 동력을 가진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창의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하지 않아도 되므로 배신하지 않는다.


    세계에 나라가 많지만 자본주의를 제대로 하는 나라는 적다.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이탈리아는 패트런과 클라이언트의 관계로 의리를 강제하여 강해졌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의 관계다. 마피아의 대부는 그 전통이 나쁘게 남아있는 것이다. 


    영국과 일본은 고립된 섬이라서 복잡하게 견제와 균형을 강제하는 시스템을 발달시키고 있다. 공간이 좁을수록 정밀한 디자인이 소용된다. 대륙은 문제가 있어도 에너지가 외부의 배후지로 유출된다. 섬은 도망갈 곳이 없으므로 다들 필사적으로 된다.


    유태인은 종교를 통해서 그것을 유지한다. 유태인에 의하면 종교가 아니고 관습이라고 한다. 그들은 사생활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의리를 얻어내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에 의해 곳곳을 떠돌면서 이교도들 사이에서 고립된 것이 결속을 유지하는 방편이다.


    독일은 게르만의 종사제도 전통이 있고 프랑스도 대혁명의 정신에 따라 의리를 강제하는 문화가 있다. 노동자가 파업하면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며 의리를 지키는 것을 똘레랑스라고 한다. 의리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가 그것을 가르쳤다. 공자는 적극적으로 사회로 나아가 세상을 바꾸라고 했다. 천하로 나아가 거세게 흐르는 에너지의 격류에 풍덩 빠져버릴 때 의리는 강제된다. 섬이나 좁은 시골이나 강단에 있으면 일이 꼬인다. 에너지의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좁은 바닥일수록 의리를 강제하는 문화가 발달해 있다. 부조도 하고 품앗이도 하고 관혼상제며 마을축제며 단체여행이며 뭔가 참여해야 하는 행사가 많다. 외지인이 행사에 불참하면 텃세공격을 당한다. 제주도의 벌초행사와 결혼식이 유명하다.


    일단 결혼식을 3일에서 최대 7일까지 한다. 부신랑 부신부라는 것이 있어서 일종의 매니저 역할을 한다. 하여간 요란하다. 벌초행사 때는 육지에 나가 있는 사람까지 모두 참여해야 한다. 가지별초니 모둠별초니 하는 것도 있다. 의리를 강제하는 문화다.


    검찰과 기레기의 반역도 마찬가지다. 검찰바닥이 좁고 언론바닥이 좁다. 문인들만 모이거나 혹은 만화가들만 모여도 그런게 있다. 반드시 트러블이 일어난다. 헐리우드처럼 시장이 크면 괜찮은데 한국의 출판만화 시장은 바닥이 좁아서 문제가 생긴다.


    세계 200여 개국 중에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나라는 몇 없다. 왜? 반드시 배신할 것이므로 그것을 감시하고 견제하다가 사업을 확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직원에게 금고를 맡기지 못한다. 직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하다가 망하는 것이 보통이다.


    유럽회사도 대개 가족회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유럽회사가 초반에 잘 나가다가 곧 몰락하는 이유는 가족회사의 오붓함이 경쟁력이 되지만 그게 한계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가족 안에 능력자가 있어서 사업을 키우지만 그 사람이 빠지면 성장을 멈춘다.


    노동자는 파업할 연구만 하고, 관리직은 회사의 약점을 잡을 연구만 한다. 약점을 잡고 있으면 해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점원은 점주가 위반한 법을 찾아 밀고해서 뜯어낼 연구만 한다. 그들에 비하면 공자의 가르침을 한쪽 귀로 흘려들은 한국이 낫다.


    부족민들이 좁은 시골에서는 의리를 강제하는 관습의 지배를 받아 통제되지만 그 바닥을 벗어나기만 하면 바로 배신한다. 한국인이 다른 나라로 이민하면 그 나라의 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식이다. 자동차 속도가 높으면 운전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핸들을 꽉 쥐고 있기 때문에 배신할 수 없다. 징기스칸은 알았다. 더 넓은 세계로 쳐들어가서 거듭 승리하는 방법으로만 반복되는 배신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많은 배신을 당한 사람이 절대 배신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문재인은 두 번 배신당했다. 김종인에게 속고 윤석열에게 속았다. 박근혜의 최태민 건을 알고도 봐줬다. 용서해 줬더니 칼날이 돌아왔다. 손석희의 배신은 익숙한 풍경의 재탕이다. 이제는 구조를 만들 차례다. 국민이 나서야 한다. 관습을 만들어야 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19.10.22 (07:20:17)

"천하로 나아가 거세게 흐르는 에너지의 격류에 풍덩 빠져버릴 때 의리는 강제된다."

http://gujoron.com/xe/113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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