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
무서움은 무서움이 무서워하지 내가 왜 거기에 신경쓴다는 말인가?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허무를 무서워한다. 허무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실패를 무서워한다. 실패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결정을 무서워한다. 결정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연동을 무서워한다. 어떤 것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불러올 다른 일을 무서워한다. 치과에서 잠시 당하는 고통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그 이후에 길게 이어질 기억을 무서워한다. 연결된다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왜? 인간은 호흡하기 때문이다. 숨을 쉬지 않으면 된다. 로봇은 숨을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인간은 숨을 쉰다. 그런데 그 숨을 막는다. 나쁜 기억이 숨을 콱 막아버린다. 중대한 결정을 할 때 문득 호흡을 멈추게 된다. 결정하기가 무섭다. 실패는 호흡을 멈추게 한다. 실패가 두렵다. 허무는 호흡을 멈추게 한다. 허무가 두렵다. 죽음은 허무를 떠올리게 한다. 죽음이 두렵다. 그래서? 전부 연결돼 있다. 죽음=허무=실패=결정=연동=고통=기억=호흡이다. 죽음이 허무를 부르고 허무가 실패를 부르고 실패가 결정을 요구한다. 하나를 결정하면 다른 결정에 연동된다. 고통과 연결시키는 것은 기억이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당신은 숨을 멈추게 된다. 숨이 막힌다. 이것이 전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거대한 에너지가 있다. 하나가 바뀌면 전부 바뀌게 되는 것이 에너지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 복제본이 죽지 원본이 죽지 않는다. 복사된 파일 하나가 지워지는 것이다. 당신은 부분에서 전체로 돌아간다. 지부에 파견되어 있다가 본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근원에서 말단으로 파견되어 있다가 본래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건에서 사물로 파견되어 있다가 사건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물은 죽지만 사건은 죽지 않는다. 사건은 전부 연결되어 있으므로 죽을 수 없다. 어떤 컴퓨터가 꺼져도 서버는 살아있다. 네트워크는 살아있다. 호흡은 살아있다. 생명은 연결되어 살아있다. 천상병의 귀천을 떠올려도 좋다.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근본으로 돌아가리라. 사건으로 돌아가리라. 본부로 돌아가리라. 전체로 돌아가리라. 생명으로 돌아가리라. 호흡으로 돌아가리라. 끊어진 건 호흡이고 연결시키는 것도 호흡이다. 연결이 끊어지므로 호흡이 차단되고 나쁜 기억이 떠올라 무섭다면 반대로 연결을 일으키고 호흡을 재개하고 좋은 기억을 떠올려 아름다울 수 있다. 부분은 죽지만 전체는 죽지 않는다. 부분은 실패를 해도 전체는 성공한다. 부분은 결정할 권한조차 없다. 전체는 결정할 수 있다. 아름다울 수 있다. 부분은 언제나 죽고 전체는 언제나 산다. 초는 초단위로 죽고, 분은 분단위로 죽고, 시간은 매시간 죽고 인생은 죽지 않는다. 인생은 죽어도 인류는 죽지 않고 우주는 죽지 않는다. 낙엽은 죽어도 나무는 살아있다. 죽음의 두려움은 생존본능이다. 인간의 근본은 집단이다. 집단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다. 집단과 함께 호흡할 때 죽음의 두려움은 극복된다. 음은 악보 속으로 돌아가서 함께 호흡해야 한다. 그러나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집단의 경계에서 긴장을 일으킨다. 집단의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경계선을 넘나들며 인간은 집단을 살찌운다. 집단에 안주하면 집단은 말라 죽는다. 인간은 집단에 파묻혀도 안 되고 떨어져도 안 되며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지속적으로 넓혀가는 존재다. 삶은 그 아슬아슬함 안에 있다. 중국은 너무 커서 파묻히기 쉽고 일본은 고립되어 격리되기 좋다. 인류와의 협연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리사이틀만 반복하면 안 되고 오케스트라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고유한 자기 목소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모험이다. |
"인간은 집단에 파묻혀도 안 되고 떨어져도 안 되며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지속적으로 넓혀가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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