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와 오서 '전형적인 한국인들의 난맥상'
김연아, 박미희, 오서의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기사가 포털사이트 탑으로 뜨고, 여불때기로는 태진아, 이루, 최희진의 웃기고 자빠진 스토리가 붙는다. 나란히 경쟁하듯이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다. 길은 막다른 골목이라도 적당하다고. 13인의 아해처럼 불길한 질주라고.
실상 이는 한국에서 늘 벌어지는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꽉 막힌, 출구가 없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김수현 드라마같은, 이문열 뻘소리 같은, 김태호 청문회 같은, 조현오 처신같은, 도무지 경우를 모르는, 당최 공사구분이 안 되는.. 전형적인 한국인들의 문제.. 실상 이 사건들은 많은 한국 가정의 부엌에서, 혹은 거실에서, 혹은 아파트 현관에서 늘 일어나는 실랑이와 멱살잡이의 비싼 버전이다. 오서와 연아가 탑기사에서 10억짜리 멱살을 잡고, 혹은 눈을 흘기고, 혹은 트위터에다가 미니홈피에다가 선전포고, 반격개시 글을 남기면.. 그 밑으로 태진아와 최희진이 수 억짜리 드잡이를 하고, 그 뒤로는 강병규와 이병헌의 샅바싸움과.. 또 오은선과 산악연맹의 2라운드에다가 타블로와 안티들의 멜로드라마처럼 몇 개월째 이어지는 지루한 멱살잡이, 시시했던 시즌 3도 지나고 재미대가리라곤 없는 시즌 4.. 그리고 송일국과 김순희 기자의 지금은 잊혀진 흘러간 멱살잡이.. 끝나지 않는 가을장마와도 같은 지루한 드라마, 그리고 더 많은 슬픔들과 어리석음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주마등처럼 돌아간다. 요지경처럼 뱅글뱅글 돌아간다. 그들은 줄기차게 달려간다. 불길한 질주. 오고가는 고소장으로, 달고 달리는 리플로, 주고 받는 악담으로.. 쌍심지에 콧방귀, 막장을 넘어 개막장을 넘어 어디론가로.. 자고로 개싸움은 뜨거운 물을 확 끼얹어 떼놓으랬는대.. 답이 없는 사람 싸움은? 해는 저물고 날은 어두웠는데 그들은 분주하게 달려간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김연아가 오서 코치를 다루는 방법은, 당연히 우리가 다 아는 ‘말을 길들이는 방법’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모든 문제의 본질은 의사결정의 난맥상이다. 의사결정에는 의사결정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은 가장 적은 횟수의 판단과 결정으로 가장 큰 효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되도록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딱 한 방으로 끝내고자 하는 것이다. 화끈한 결정타 한 방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개 한 방으로 끝내지 못하고 마치 아Q와 소Don처럼 서로의 변발을 잡고 엉켜서 씩씩거리며 30분 동안 그 자세로 꼼짝없이 멈추어 있는 것이다. 타블로와 안티들의 몇 년째 이어지는 지루한 공방이 그렇다. 서로 ‘이거 한방이면 끝이야’ 하면서 뭔가를 계속 터뜨리는데.. 좀처럼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 이번엔 진짜 뭔가 나왔나 보다 하고 클릭질을 하지만 식은 방구처럼 피식하기가 수십차례.. 지루한 대치와 교착상태. 그렇다. 한 방으로 끝내려 하므로 도리어 끝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아는 ‘말을 길들이는 방법’을 써야 한다.
(뭐 꼭 그런 것은 아니더라. 김태호는 이 글 쓰던 중에 한 방에 훅 갔나보다.)
냄새 낯선 인간이 와서 고삐를 잡아챈다. 말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낯선 인간을 어색하게 쭈뼛쭈뼛 따라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도리질을 하며 그 반대로 가야 할 것인가? 일단 힘은 말이 세다. 말의 판단은 정해져 있다. 청개구리처럼.. 무조건 인간이 원하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역시 의사결정의 법칙을 따른다. 인간이 원하는대로 하자면 계속 판단을 해야 한다. 인간은 또 뭔가를 요구할 것이고 그리고 또 뭔가를 요구할 것이다. 끝없는 판단의 스트레스 지옥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단 한 번의 판단으로 모든 것을 한 방에 끝내버릴 것인가? 답은 명확하다. 말은 되도록 의사결정을 안 해도 되는 방향으로 결정한다. 그것은 인간이 당기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인간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면 바로 자유다.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속시원하게 해결한다.
말을 길들이는 방법은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이다. 마부는 처음 고삐를 잡아본 말과 어색한 대치 후 녀석이 마부를 안티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짐짓 져준다. 말이 원하는대로 반대방향으로 짐짓 끌려가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이 가는 방향의 한쪽 시야를 교묘하게 차단한다. 말의 오른쪽을 막아서서 가상의 벽을 만든다. 말은 툭 트인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걸음을 내딛는다. 말은 원을 그리며 돌게 된다. 말은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말은 자신의 판단과 마부의 판단이 우연히 일치했다고 믿게 된다. ‘어? 난 이 길로 갈건데 마부 너도 이 길로 가냐?’ 말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갈 길을 판단했다고 믿으며, 마부와 말이 우연히 같은 길을 가는 길동무가 되었다고 여긴다. 길들여져 버리는 것이다. 우연히 판단이 계속 맞아져서 환상의 짝꿍이 되었다고 여긴다. 죽이 잘 맞는 한 팀이라고 여기게 된다. 말은 점점 마부에게 귀찮은 판단을 떠넘기고 귀찮은 의사결정을 마부에게 미루고, 의사결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추구하게 된다. 당연히 이것이 김연아가 오서를 길들이는 방법이어야 했다. 물론 현실은 녹록치 않아서 전혀 그러하지 못했지만. 유시민이 정동영을 길들이고 박근혜를 말아먹는 방법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상대방을 함정으로 유인하고, 상대방이 실수하기를 기다려서 그 실수를 추궁하고 이를 까발겨서 언론플레이를 하는건 김수현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이문열 수준에서나 나올법한 하수들의 방법이다. 상대가 실수할 기회를 원천봉쇄해 버리는 것이 고수의 방법이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김연아 위에 누가 있었느냐다. 아무도 없다. 박미희는 프로가 아니다. 한국 안에는 김연아를 관리할 윗선이 없는 것이다. 물론 오서 뒤에는 IMG가 있다. IMG는 큰 세력이다. 당연히 세력과 세력의 싸움이어야 하며 변호사와 변호사간의, 에이전트와 에이전트간의 등치고 배만지며 점잖게 엿먹이는 음흉하면서도 신사적인 싸움이어야 한다. 엄마가 나서고 선수가 직접 현장에서 발언을 뛰면 이건 프로답지 못한 것이다. 그런거 챙겨주는 윗선이 있어야지. 그런데 없다. 왜? 한국 안에 프로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안에 감히 김연아나 오서를 중재할, 혹은 관리할, 세력이나 팀이 존재하지 않는다. 빙상연맹인지 뭔지 있겠지만 그들은 무능력한 집단이다. 옛날에도 그랬다. '이로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하고 하인을 불러 말을 넣고 간접 화법으로 통하는 거지 주인과 직접 댓거리 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다. 지금 김연아는 정상에 있고 그러므로 그 위에 아무도 없으며, 이것이 한국의 총체적 아마추어 수준이다. 피겨 뿐 아니라 다른 분야라도 마찬가지다. 어느 분야든 좀 윗선으로 올라가보면 대개 주먹구구로 하고 있다. 프로는 보이지 않는다. 거대세력화 된 외국의 프로들에게 잡아먹히기 딱좋게 말이다. 하여간 김연아가 미셸콴과 손잡고 어찌 타개해보려는 입장은 방향성이 맞는 전개다.
하수들은 상대방의 판단을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자기 행동을 결정하려 한다. 그것은 길들여지는 말의 방식이다. 말은 마부의 행동을 보고 항상 그 반대의 포지션에 자기를 두는 것이다. 김연아는 오서를 길들이지 못했으며, 우연으로 위장된 이익의 일치를 끌어내지 못했으며, 등치고 배만자기식 예상되는 위험의 경고를 사전에 통보하지 못했으며, 언론에 문제를 터뜨린 사실 자체로 타인의 개입을 요청한 것이며 이는 실패다. 이는 IMG 같은 거대세력을 등에 업지 못한 김연아측의 세력 한계다. 유시민이 정동영을 다스리더라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잘못한 다음에 그것을 트집잡아 공격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잘못된 시도가 실패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말을 제자리서 뱅뱅 돌게 하면 된다. 고삐를 당길 것이 아니라 말에게 맡겨놓고, 말이 저가 원하는 코스로 갔다가 ‘앗 이 산이 아닌게벼’ 하고 되돌아오게 해야 한다. 하긴 정동영은 작년부터 민주당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하며 제 자리서 뱅뱅 돌고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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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보통 일어난다는 그 일들.. 막판에는 대개 법정으로 달려간다. 실패다. 이병헌, 권미연, 강병규들의 실패이고 송일국과 김순희들의 실패이고, 태진아, 이루, 최희진의 실패이고, 오은선과 KBS, 산악연맹의 실패(아 이들은 아직 법정으로 안갔나? 하여간에.), 타블로와 안티들의 실패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재판정의 판결이 정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판결은 그냥 판결일 뿐이고, 그것은 도로 가에 서 있는 전봇대와 같아서 거기다가 지나가는 강아지가 쉬를 하든, 그걸 깎아서 이수시개로 쓰든, 거기에 머리를 박고 죽든, 그것은 각자 그것을 이용할 나름일 뿐이다. 법정은 진이 다 빠져서 어떻게든 사건을 종결해야 할 상황에 내몰려서 ‘그래도 마지막 리플은 내가 달고 말테다’는 식으로 뻗대다가 궁여지책으로 선택하는 거다.
어쨌든 주변 사람들이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서면서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왜냐하면 자기네의 분노를 거기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차별받고 있다고 믿는 여성이라면 ‘남자들은 그동안 나쁜 짓을 많이 했으므로 좀 맞아도 싸! 그러므로 송일국 너 좀 맞고 보자.’라든가 혹은 ‘태진아. 너는 예전부터 구렸어. 그러니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하고 의원 최종원이 완장 인촌이 나무라듯 하는 것이다.
그렇다. 지성이란 무엇인가? (아! 결국 ‘지성’ 나오고 말았다. 실패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보자.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드레퓌스가 실제로 스파이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말하자면 타블로는 ‘이중국적 귀족에다 병역회피에다 여러 가지로 특혜를 많이 받았으므로, 거의 ’신의 아들‘에 해당되므로, 아니 신을 뺨치고 아조 신의 형님 노릇을 하려들 기세이므로.. 좀 맞아도 돼. 암만!’ 하는 식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이것은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는 경우다. 결론은 ‘시민사회의 규범’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거다. 시민사회의 규범으로 보면 다른 감정들을 끌어들여 밸런스를 맞추는 식으로 하지 않는 거다. 말하자면 ‘유태인들은 수백년간 못된 짓을 했으므로 드레퓌스는 유태인 대표격으로 좀 맞아도 돼’ 하는 식으로 밸런스 원리, 유권자의 균형감각을 적용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거다. 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함께 발견해야 할, 함께 건설해야 할 더 높은 윗선의 시스템이 있으니까.
에밀 졸라는 마치 대단한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것처럼 억울한 드레퓌스를 구조했지만 유태인은 세력화 되어 있고 당시 프랑스는 유태인세력을 통제할 수 없었으므로 민중의 분노는 여전한 것이다. 이러한 본질을 봐야 한다.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 예수가 돌을 맞는 창녀를 구했을 때 그 의미는? 그것은 새로운 약속의 제안이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원죄가 있으니 누구도 창녀를 때릴 자격이 없다는 부정적 추궁에 방점을 찍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뢰라는 방법으로 더 쉽게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긍정적 대안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의 무죄를 입증했기 때문에 지성인의 타이틀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규범이라는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지성의 전범이 된 것이다. 이건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
말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은 고삐를 잡아채는 것이 아니라 말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따라가면서 한쪽 시야를 지속적으로 차단하여(에밀 졸라의 집요한 대응처럼) 말이 스스로 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본질은 드레퓌스가 아니라 유태인 문제라는 프랑스 대중의 분노를, 진정한 본질은 유태인 문제가 아니라 프랑스 시민사회의 규범문제라는 새로운 목표제시로 군중이 나아가는 방향을 수정한 것이다. 그렇다. 군중은 리더가 어떤 목표를 제시하면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보지 않고, 그것이 가능한 목표인가 불가능한 목표인가만 판단하며, 일단 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하면 무턱대고 그 길을 간다. 그들은 억울한 드레퓌스를 밟아서 유태인에 대한 분노를 전하려고 한 것이며, 에밀 졸라는 프랑스인들에게 시민사회의 규범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여 그 방향으로 인도한 것이다. 유태인 세력 응징이라는 부정적 추궁을 택할 것인가 프랑스 시민사회의 명예라는 긍정적 대안을 택할 것인가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에 대중은 에밀 졸라가 인도한 그리로 신나게 달려간 것이다. 이는 판결의 문제도 정의의 문제도 아니고 더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할 세력의 문제, 상부구조 건설의 문제다. 분노에 찬 민중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분출하기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하부구조에서 일어나고 그 해결은 시민사회라는 상부구조의 건설로 달성된다. 하부구조 안에서 문제의 원인측을 제거하는 마이너스적 관점이 아니라 상부구조를 건설하여 외부에서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플러스적 관점이 필요한 거다. 마른 논에 물꼬를 다투는 농부가 종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지리하게 대치하다가, 마침내 큰 비가 와서 서로 사과하고 웃으며 돌아가듯이.
이번 청문회에서 드러났듯이 이 나라의 잘 나가는 귀족들은 전부 구리다. 열놈이 단상에 서면 보지도 않고 ‘열놈이 전부 구리다’고 판정하면 그 판결은 대체로 맞다. 적중률이 대략 8할이다. 그냥 눈감고 쳐도 8할타자다. 이러한 본질을 간파해야 한다. 뭐 어쨌든 에밀 졸라는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죽을 뻔 했다. 지성인이 대중을 인도하는 방법도 고삐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가는 길을 일단 따라가면서, 한쪽에 가상의 방벽을세워 대중이 특히 곤란해 하는 의사결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드러내면서 대중과의 이해관계의 일치를 발굴하여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에밀 졸라는 대중의 감정적 판단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그런 방법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옳고 그르고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성공하고 실패하는 목표의 문제다. 지식인의 역할은 옳고 그르고 판정을 내리는데 있는게 아니라 대중과 보조를 함께 하며 목표를 제시하고 달성시키는 성취에 있다.
하여간 시민사회의 규범으로 말하면 먼저 말을 꺼낸 자가 입증해야 한다. 그게 원칙이다. 태진아든, 송일국이든, 오은선이든, 타블로든, 오서든, 김연아든.. 칸첸중가에 갔든 안갔든,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옳고 그르고에 집착하여 증거를 대고 입증을 시도하며 내가 옳으니까 이겼다는 식의 소아병적인 태도라면 유치한 거다. 옳건 그르건 그 주고받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민사회의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대한민국은 한 걸음 더 진도를 나갔느냐는 건설적 관점, 문제해결의 관점이 필요하다.).. '평소에 쟤가 행실이 나빴으니까'.. '유태인들은 다 그러니까'.. 하는 식은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은.. 아는 사람끼리 모인 소규모 집단에서 통하는 논리에 불과한 거고, 일종의 어리광이고, 사건 자체를 냉철하게 판결함이 아니라 그 전후사정을 헤아려서 강자와 약자간에 힘의 밸런스를 맞춰주기 바라는 정치행동이고.. 그건 봉건시대의 방법이고.. 온갖 다양한 인종과, 직업과, 성적 정체성과, 민족과 관습이 모인 세계무대에서 통하는 논리로 가려면 말이다. 김구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가 세계의 리더가 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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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의 이혼부터 요즘의 짬뽕 진흙탕까지 하나로 아우르고.
에밀졸라-드레퓌스의 본질까지 상부구조와 에너지로 꿰뚫는 통찰적 안목에 할 말을 잃소.
집대성! 이말은 아무대서나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구려.
저도 최근에 사소한 입시름에 휘말려 정신적 피해과 금전적인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어떤 아주머니들와 사소한 입시름이였는데 그만 그치고 싶어도 명분이 없더군요.
그래서 오기가 발동하여 버티다가 과실치상을 입히고 손해막급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애초에 시작을 말아야 합니까? 아니면 시작을 했더라도 아니다 싶으면 그냥 멈춰야 할까요?
타이르고(?) 보내야 할까요? 그냥 모른척 외면해야 할까요?
어떤 사건이 벌어질때는 순간적이더군요.
이렇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거라는 예상을 할수가 없이 순간적인 동작이라 어쩔수가 없었지요.
물론 후회 많이 했습니다.
사소한 시비의 내용은
다세대 주택에 사는데 찌라시나 포교아줌마들이 자주 들락거리고 도둑도 맞은뒤라서
문에다가 "무단 침입자는 도둑으로 간주한다"는 경고문구를 써 붙여놓앗습니다.
그랬더니 짜라시는 뚝 끊어졌는데 유독 포교아줌마들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더군요.
그런 아줌마들과 시비였어요.
그런데 꼭 그런 비시가 아니라도 인터넷 토론방에서나 아는 지인들과 정치논쟁을 벌리는것등등..
이런거 어찌해야 합니까?
눈싸움으로 제압해야지
입을 열어서 말로 상대했다면 실패입니다.
몸동작 액션까지 나왔다면 끔찍한 거죠.
하수들은 본능적으로 고수를 알아보기 때문에
마음을 닦으면 고수의 눈빛을 얻어서 현실에서 구태여 인상을 쓸 일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제가 밑바닥생활을 하며 별의별 일을 다해봤지만 그 사람들과 마찰한 일이 없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고급 어휘를 구사하면 저질논쟁을 피할 수 있습니다.
너무 고상한 척 하면 말 거는 사람이 없어서 심심해지긴 하죠.
문앞에 '종교인사절'이라고 분명히 적시하여 써붙여 두면 벨을 안누릅니다.
... 이건 제 경험칙. 다세대주택은 다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