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어제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맞는 말인가? 액면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적어도 지식인의 언어는 아니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바램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글자 배운 사람이 이런 똥같은 언어를 지껄이면 안 된다. ‘바램’이라는 말과 ‘원한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동어반복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이런걸 헛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넌 뭐 먹을래?’ ‘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겠어.’ ‘넌 나중에 뭐가 될래?’ ‘난 훌륭한 사람이 될거야.’ 이런 바보같은 말을 하면 지능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가질문이 있다. ‘넌 뭐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가 먹고 싶은 것은 뭔데?’ ‘네가 생각하는 행복은 어떤 건데?’ 이런 식의 추가질문을 요구하는 답변을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런 답변을 하는 멍청한 녀석은 굴밤을 때려줄 밖에. 동사로 쉽게 답하면 안 된다. 명사로 올라서고 주어로 올라서고 전제로 올라서야 한다. 국어시간에 뭐 배웠냐? 상대어를 쓰면 곤란하고 절대어를 써야 한다. 절대어에는 메커니즘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행복은 상대적이다. 사람에 따라 느끼는 행복감이 다르다. 의미가 없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느니,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느니 이런 하나마나한 소리라면 500방을 피할 수 없다. 원인과 결과가 있다. 원인을 말해야 한다. 결과를 말하면 안 된다. 행복은 결과다. 인간은 결국 죽는다. 죽기 위해서 산다. 죽기 위해서 산다는둥 이런 개소리하면 안 된다. 그런데 액면으로는 맞는 말이다. 말은 맞는데 쳐맞을 헛소리다. 의미가 없다. 원인측에 서서 사건을 말해야 한다. 사건을 조직해야 한다. 인간이 행복을 원한다면 불행하게 살다가 죽어간 우리의 독립지사들은 인생을 헛살았다는 말인가? 쳐죽여야 한다. 개념이 없는 자라 하겠다. 진실을 말하자. 진지한 표정으로 어른들의 언어를 이야기하자. 인간은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원하기는 개뿔! 그런거 없다. 인간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솔직하자. ‘넌 뭘 원하니?’ 하고 남들이 귀찮게 자꾸 물어보니까 대답이 궁해서 내뱉은 말이 행복타령이다. 개는 무엇을 원할까? 개는 행복을 원할까? 천만에. 행복이 뭔지 개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개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데 인간은 무언가를 원한다고? 인간이 개랑 뭐가 달라? 인간이나 개나 소나 똑같은 존재다. 인간은 원하는게 없다. 인간은 에너지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외력에 흔들리는 존재다. 지하철이 흔들리면 손잡이를 잡는다. ‘너 왜그래?’ 하고 누가 물으면 ‘아! 이 손잡이 한 번 잡아보고 싶었어.’ 하고 대답한다. 거짓말이다. 마치 자신이 원해서 의사결정을 한 것처럼 사기친다. 지하철이 흔들려서 반응한 거다. 인간이 무얼 원한다고? 천만에. 그저 반응할 뿐이다. ‘너 왜 먹어?’ 배가 고파서 먹는 거다. 배고픔이라는 외부자극에 반응한 것뿐이다. 뇌의 기준으로는 배고픔도 통증이며 외부자극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한 것처럼 ‘나는 이게 먹어보고 싶었어.’ 하고 사기친다. 외부자극에 흔들려서 반응했다고 말하면 창피하니까 ‘행복을 원해.’ 하고 주워섬기지만 사실은 그저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다. 미인을 보면 심장이 뛰는 것은 선천적인 호르몬의 반응이다. ‘난 저 사람을 원해. 사귀고 싶어.’ 이건 억지해석에 불과하다. 공을 던지면 달려가는 개처럼 인간은 그저 반응한다. 개는 공과 사귀고 싶은 것인가? 아니다. 공의 움직임에 동체시력이 반응한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누구나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부탄사람들은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다. 월 30만 원이면 당신도 왕처럼 행복할 수 있다. 산 속에 사는 자연인들은 죄다 행복하다. 불행하다는 자연인은 한 명도 없더라. 거짓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행복을 원한다면 왜 행복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불행한 것은 이미 미혹당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 돈 30만 원만 있어도 한달간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친구가 1억짜리 다이아몬드를 자랑하면 불행해지고 만다. 흔들리는 것이다. 강한 충격이다. 행복과 멀어졌다. 옆에서 누가 흔들어대므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은 자청하여 불행의 수렁 속으로 뛰어든다. 인간은 에너지를 탐하는 존재다. 에너지에 반응하는 거다. 끌려드는 거다. 도박꾼은 도박장으로 끌려가고, 술꾼은 술집으로 끌려가고, 글쟁이는 자판에 손가락이 찰싹 달라붙어서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미 행복과 불행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곳에는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으며 그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뿐이다. 내가 만화가 조석이라면 그간 벌어놓은 돈으로 외국여행이나 다니며 띵가띵가 잘 살겠지만 조석은 이미 만화라는 강렬한 에너지에 잡혀버렸으니 네모칸의 굴레를 평생 벗지 못한다. 인간은 끈끈이에 붙은 파리처럼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인간이 원하는건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일관성과 연속성이다. 흔들리면 짜증난다. 일관성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받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흔들기 전에 내가 먼저 판을 흔들어야 한다. 그네는 흔들리지만 자기가 흔든다. 자신이 흔들었기 때문에 그네 타는 소녀는 즐거이 리듬을 탄다. 시끄러운 음악이라도 연주자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 무대에서는 자신이 권력을 쥐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권력을 추구한다. 권리와 권한의 메커니즘을 추구한다. 일의 기승전결에서 기에 서기를 원한다. 이어지는 승과 전과 결을 지배한다. 그 흐름에서 일관되기를 원한다. 그 일이 모두 연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이루기를 원한다. 그 그림의 소실점에 신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은 신과 만나기를 원한다. 신과 소통하기 원한다. 신으로부터 독립하기 원한다. 행복은 쉽다. 코 속으로 철사를 찔러넣어 전두엽을 휘저어놓으면 누구나 행복해진다. 이걸로 노벨상 받은 의사도 있다. 인간은 흔들리는 존재이며 흔들리지 않고 그 흔들림을 지배하여 아름답게 리듬을 타기를 원한다. 인간은 과정의 흐름이 긴밀하고 조화롭기 원하지만 무엇보다 에너지를 원한다. 자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설레이는 마음으로 달려가게 하는 그것을 원한다. 그것은 열정이다. 행복타령은 열정이 죽은 빈껍데기 사람이나 하는 소리다. 결과를 주워섬기면 안 된다. 자본이 이윤을 추구한다고 하면 안 된다. 재벌은 권력을 추구한다. 재벌이 계열사를 늘리는 것은 이윤추구가 아니라 권력추구다. 40개의 계열사 중에 이윤을 내는 것은 한두 개고 나머지는 빈대 붙어 뜯어먹는 거머리다.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대기업이 자신을 착취하는 거머리를 수백 마리씩 몸에 잔뜩 붙이고 다니는 등신짓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권력을 탐하기 때문이다. 잡스는 70억 인류 위에서 뽐내며 으스대지만 건희나 몽구는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70억 인류 중에 몽구나 건희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잡스는 계열사를 늘릴 이유가 없다. 70억이 알아주니까. 권력이 있는 것이다. 몽구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계열사를 자꾸만 늘리는 것이다. 왜? 계열사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몽구를 알아주잖아. 결국 몽구는 권력을 탐하는 것이다. 단 그 권력이 정치권력은 아니다. 심리적 지배와 긴밀한 상호작용이다. 재벌이 이윤을 탐하지 않고 권력을 탐하기 때문에 날로 망하고 있다. 박정희 시절에 잘 나가던 30대 재벌 중에 지금 몇이나 살아남아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자본은 누구나 이윤을 원한다. 언뜻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개소리다. 인간은 흔들리는 존재다. 행복하려고 하므로 흔들린다. 행복하려고 할수록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행복을 원한다는 말은 불행을 원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인간은 흔들리지 않기를 원한다. 에너지와 권력이다. 존엄이다. 인간은 존엄과 자유와 사랑과 성취와 행복의 메커니즘이 순조롭게 연결되기를 원한다. 일을 이어가기 원한다. 강한 에너지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강한 에너지는 운명적인 만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며 그 만남은 정상에서 또다른 정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단어는 인류에게 없다. 그것을 나타내는 개념을 만들고 보급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이지만 철학이 죽은 지는 오래되었다. 과거에는 영혼이니 열반이니 구원이니 하는 개념이 있었지만 봉건시대의 낡은 언어다. 과학의 시대에 인간이 추구하는 진짜를 설명하는 언어를 인류는 획득하지 못한 것이며, 인류의 수준은 그만치 뒤떨어져 있으니 아는 넘도 없고 말귀를 알아듣는 넘도 없다. 더 치명적인 것은 담아낼 문법도 없다는 거다. ### 김유식의 '개드립 파라다이스'에 '장오'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화법이 독특하다. 상대방이 몇 번 씩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한다. 애를 먹이는 것이다. 그런 녀석은 패버려야 한다. 매커니즘이 반영되지 않은 언어, 동사를 명사로 바꿔치기 하는 언어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만든다. 사람 열받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어법은 지능이 떨어지는 자의 것이다. 3초 안에 수준을 들킨다. '행복'이라는 말에 '원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행복을 원한다'는 식의 동어반복 언어표현에는 당연히 거부감을 느껴야 한다. 이게 안 되는 사람과는 점잖은 사람간의 대화를 할 수 없다. 일상적 대화는 가능하다. ###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완전성'이며 그것을 성聖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성saint은 원래 '제사에 바치는 동물의 몸에 상처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에게 바쳐지는 것이며, 신과 소통하는 것이며, 신을 복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전체, 우주전체가 모두 연결되어 계系를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무의식의 명령이며 깨달은 사람이나 아는 경지다. 대부분은 아무런 생각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다. 그저 반응할 뿐이다. 호르몬에 지배될 뿐이다. 완전성에 이른 사람이 행복할 수 있지만 행복한 사람이 완전성에 이른 것은 아니다. 행복한 돼지가 완전한 돼지는 아니다. 잘 구워져야 완전하다. ### 원한다는 것은 바란다는 것이고 바란다는 것은 목을 길게 뻗어 담장 밖을 바라보며 손님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뻗다>바라다가 되었다. 보디랭귀지로 소통하던 원시인 시절에 인류는 목을 길게 뻗어 원하는 것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방법으로 의사표시를 했던 것이다. 그리스어 접두어 philo~다. philosophy의 형태로 쓰인다. 지혜를 바란다는 말이다. philo는 바라는 것을 집으려고 손을 뻗는 동작을 의미한다. emperor의 ~peror도 같은 말이다. 사방으로 뻗어가서 망라한다는 말이다. 손을 뻗어서 물건을 잡는다는 것은? 일의 다음 단계로 연결시켜 간다는 말이다. 즉 인간은 연결을 원하는 것이다. 무엇과 연결하는가? TV는 전원과 연결되어야 하고 네티즌은 인터넷과 연결되어야 한다. 에너지를 주는 원천과 연결되어야 한다. 에너지를 주는 원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완전성이다. 화가든 음악가든 완전하려고 한다. 완전하게 그리거나 완전하게 연주하려고 하는 것이며 완전할 때 다음 단계로 연결된다. 완전하면 행복할 수 있지만 행복하다고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이므로 안 쳐주는 것이다. 일베충 돼지들의 행복은 안쳐주는 것이다. 완전이라는 원인측을 말해야지 행복이라는 결과측을 말하면 안 된다. 기독교인은 구원으로 완전하고 불교인은 열반으로 완전하다. 상부구조와 연결로 완전하다.
행복을 원한다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의미가 없을 뿐이죠. 아는 사람이라면 메커니즘을 담은 말을 해야 합니다. 동사를 주워섬기면 안 되고 담론의 형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종교의 구원이나 열반을 대체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미션을 말해야 합니다. 개인의 사적인 동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로부터 주어지는 에너지의 원천을 말해야 합니다. 깨달은 사람의 언어는 다른 것입니다. 언어를바꾸지 않으면 맹목의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
인간의 청개구리 심리에 대한 답이 이거였군요. 권력을 쥐고 판을 주도하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