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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058 vote 0 2013.05.13 (21:24:21)

    (최근 글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엮임으로 사유하라


    사람이 머리를 쓰는 데는 연역과 귀납이 있다. 연역은 사유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의하고, 귀납은 만들어진 지식을 학습하거나 전달한다. 바른 생각의 방법은 연역이다. 지식은 오직 연역에 의해서만 획득되며 귀납적 지식은 작은 연역들의 짜깁기거나 논리적 오류다. 귀납은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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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큐브의 다섯 면이 맞으면 나머지 한 면도 맞다. 이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져도 좋은 것이다. 의심의 여지는 없다. 이것이 연역의 지식창출이다. 반대로 어쩌다 큐브의 한 면이 맞았는데 아마 나머지 면들도 맞을거라고 짐작하는 것이 귀납에 따른 일반화의 오류다.


    ◎ 연역 – 큐브의 다섯 면이 맞다. ≫ 나머지 한 면도 맞다. ( O )
    ◎ 귀납 – 큐브의 한 면이 맞다. ≫ 나머지 다섯 면도 맞다. ( X )


    연역과 귀납의 차이는 엮임에 있다. 존재의 근본은 엮임이다. 이는 만유에 공통되는 속성이며 어디에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리다. 바른 사유의 방법은 존재의 엮임을 추적하는 것이다. 큐브의 면들은 축과 대칭으로 엮여 있으며, 이에 한 면의 위치가 다른 면의 위치를 결정한다. 귀납은 그러한 추적과정이 없다.


    축을 중심으로 대칭된 두 날개의 위치는 한 번의 조작에 의해 두 포지션이 동시에 결정된다. 이를 일의성이라고 한다. 자석의 N극과 S극이 동시에 결정되고, 낮과 밤이 동시에 결정되는 것과 같다. 앞과 뒤, 좌와 우, 위와 아래처럼 모든 대칭된 것에는 일의성의 원리가 적용된다. 일의성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에 이르게 하는 확실한 기반이라 하겠다.


    ◎ 진리탐구의 방법 – 일의성의 원리≫엮임에 의한 동시결정 원리

 

    일의성은 그물코와 같다. 세상은 만유의 엮임에 의해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매듭 하나에 끝단은 둘이다. 하나의 매듭이 두 끝단의 위치를 동시에 결정한다. 무슨 일이든 문제의 해결은 매듭부분부터 착수해야 한다. 매듭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일을 해결하는 근원의 실마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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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역은 먼저 매듭을 풀어 엮임을 해결한다. 귀납은 매듭부분이 감추어져 있을 때, 대칭된 두 끝단을 잡아당기며 서로 다투는 것이다. 낮과 밤은 지구라는 매듭에 의해 성립하고, 좌와 우는 몸통이라는 매듭에 의해 성립한다. 어떤 대칭된 것이 있다면 반드시 가운데 매듭이 있다. 매듭부터 풀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매듭은 은폐되어 있다. 그러므로 귀납의 실패를 저지른다.


    남녀는 사랑이라는 매듭에 의해 엮여있다. 문제는 그 사랑의 존재를 모른다는 데 있다. 자본은 시장원리라는 매듭에 의해 엮여있지만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명명하여 그 존재를 알리기까지는 누구도 시장원리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뉴턴이 만유인력이라고 명명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지구상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의해 엮여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만유의 엮임에 따른 매듭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므로 매듭을 풀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실패하는 이치다.


    매듭은 감추어져 있고 끝단은 드러나 있다. 귀납은 드러난 사실을 적시하며 그 사실로부터 지식을 추구한다. 그 사실은 논리적 인과관계로 엮여있지 않으므로 지식의 창출에 실패한다. 바른 지식의 창출은 반드시 축과 대칭의 구조로 세팅된 엮임의 모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모형 – 축과 대칭의 구조(엮임의 매듭을 이루는 1 단위)


    연역적 사유는 모형적 사유다. 수학공식에 대입하여 산수문제를 풀 듯이 연역은 엮임의 매듭을 나타내는 구조의 모형에 사실을 대입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이때 모형은 어떤 둘 사이에서 관계를 복제한다. 관계는 둘 이상에서 성립한다. 연역은 관계를 제시하므로 반드시 전제가 깔려있다. 말하자면 보증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다. 반면 귀납은 드러난 사실을 적시할 뿐 깔려있는 전제가 없다. 보증인이 없다. 검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다.


    경마장에서 7번마에 베팅했더니 과연 7번마가 우승했다. 이건 드러난 사실이다. 사실을 근거로 삼아 이후 모든 7번마는 우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귀납의 오류다. 7번마의 우승은 사실이나 다음 경주와 엮여있지 않으므로 그것으로는 새로운 지식을 찾을 수 없다. 반면 가장 뛰어난 말에 베팅했더니 과연 우승했다면 어떨까? 모든 뛰어난 말은 경주에서 우승한다고 믿으면 바른 연역이다.


    7번마가 7번마인 것은 다른 말의 사정과 상관없다. 8번마나 9번마가 어쨌든 그 말은 7번마다. 엮여있지 않다. 그러나 ‘뛰어난 말’은 다르다. 다른 말들 중에서 그 말보다 더 잘 달리는 말이 없어야 한다. 전제조건이 걸려있다. 엮인 것이다. 이 조건이 보증인 역할을 하므로 연역은 정답을 제시한다.


    ◎ 전제와 진술 - 모형은 전제되고 사실은 진술된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의 구조로 엮여서 명제를 이룬다. 모형은 전제를 나타내고 사실은 진술을 나타낸다. 전제는 은폐된 부분이고 진술은 드러난 부분이다. 모형이냐 사실이냐다. 은폐된 모형에 주의를 두면 연역이고 드러난 진술에 주의를 두면 귀납이다. 그런데 인간은 저도 모르게 진술에 주의가 쏠린다. 은폐된 부분보다 드러난 부분에 집중하므로 마술사의 손놀림에 속는 것이다. 실패한다.


    ◎ 전제와 진술 – A면(엮임의 모형) B다.(관측된 사실)


    명제를 ‘A면 B다’로 나타낼 수 있다. ‘A면’이 전제, ‘B다’가 진술이다. 연역의 사유는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다. 반면 전제 없이 곧바로 진술을 들이대는 것이 귀납이다. 전제가 생략되므로 귀납은 뜬금없고 생뚱맞다. 엄밀히 따지면 귀납은 문법적 오류이므로 비문(非文)이다. 말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헛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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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모형은 6면을 가진 큐브처럼 서로 엮여서. ‘A면 B다’를 이룬다. 큐브의 노란색 면이 왼쪽으로 돌면 하얀색 면은 오른쪽으로 도는 식이다. 반면 귀납은 큐브가 없다. 모형이 없다. 엮임이 없다. 귀납은 레고블럭과 같다. 사실들이 낱낱이 해체되어 있다. 그러므로 귀납으로는 진리를 추적할 수 없다. 각각의 사실들을 연결하는 링크가 깨졌기 때문이다.


    ◎ 연역은 사유하고 귀납은 학습한다.


    우리는 연역으로 사유하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할 때는 귀납을 쓴다. 연역은 여섯면을 가진 큐브를 통째로 건네주고, 귀납은 그 중에 한 면만 건네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지식은 레고블럭과 같아서 통째로 주입할 수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 오늘은 코끼리 다리를 배우고 내일은 코끼리 코를 배우는 식으로 된다. 그러므로 지식의 학습은 귀납의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자동차 운전을 배운다면 하루에 한가지씩 배울 수 밖에 없다. 오늘은 핸들의 조작을 배우고 내일은 브레이크페달의 조작을 배워야 한다. 단번에 운전을 능숙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핸들과 브레이크는 엮여있다. 그 엮임을 드러내려면 자동차를 운행해야 한다. 그런데 초보자에게 곧바로 자동차 운전을 맡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식의 전달은 어차피 귀납할 수 밖에 없으며 반드시 시행착오에 따른 오류시정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 지식의 전달 – 귀납의 오류≫시행착오≫오류시정의 반복.


    연역을 위해서는 큐브의 꼭지점에 모여있는 세 면이 필요하지만 자연에 그것은 없다. 만유의 엮임을 결정하는 매듭부분은 은폐되기 때문이다. 매듭은 실을 꼬아서 만든다. 실을 꼬면 일부분이 감추어진다. 넥타이의 매듭부분이 감추어지는 것과 같다. 큐브의 엮임을 결정하는 안쪽부분은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관찰로는 참다운 지식에 이를 수 없고 머리를 써서 추론하는 수 밖에 없다.


    겨울에는 씨앗만 있고 잎이 없다. 봄에는 잎만 있고 꽃이 없다. 여름에는 꽃만 있고 열매가 없다. 가을에는 열매가 있지만 줄기는 시들어 버린다. 씨앗과 잎새와 꽃과 열매는 서로 엮여있지만 매듭부분은 감추어진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귀납적 학습에 따른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검증절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 귀납의 혼선 – 모순, 역설, 아이러니, 반전, 부조리, 딜레마


    귀납에 의해 엮임의 고리가 은폐될 때 온갖 역설과 모순과 반전, 아이러니와 딜레마와 부조리가 일어나서 우리를 헷갈리게 만든다. 그런데 지식의 학습과 전달은 귀납을 쓰므로 반드시 모순과 역설이 있어야 한다. 영화에 반전이 없고 개그에 위트와 아이러니가 없으면 그것은 가짜다. 모순과 역설은 분명히 잘못이지만 지식의 전달에는 그 잘못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잘못을 제시하고 그 잘못을 해소하는 절차를 가져야 한다. 그런 뒤집기 절차가 없이 술술 잘 넘어가면 공짜점심과 같아서 월말에 청구서라는 뒤통수를 맞는다.


    자석의 N극을 알면 S극도 안다. 엮임에 의해 대칭되기 때문이다. 머리를 알면 꼬리도 알고, 투수의 위치를 알면 포수의 위치도 안다. 그런데 연역하려면 어쨌든 최초의 하나는 확실히 알고 들어가야 한다. 그 최초의 하나는 무엇인가?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 그것이다. 데카르트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세련되지 못한 어법이다. 답은 엮임이다. 엮임은 구조다. 구조는 축과 대칭으로 엮여서 모형을 이룬다. 매듭이 져 있다.


    데카르트는 진리의 보편모형을 찾아 연역하려고 했다. 세상 모든 것은 엮여서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으므로 하나의 매듭만 풀면 모두 풀린다. 그것이 실마리가 된다. 데카르트는 사유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진리의 실마리는 일의성이다. 봄이 결정될 때 가을도 결정된다. 여름이 더우면 겨울은 추우며 낮이 밝으면 밤은 어둡다. 둘은 동시에 결정된다. 그것이 엮임이다. ‘나는 생각한다’와 ‘고로 존재한다’는 엮여있다. 이는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달린다’와 ‘자동차가 존재한다’는 하나의 사건이다. 하나의 매듭으로 엮여 있다. 그것이 일의성이다.


    일의성은 인터넷의 하이퍼링크와 같다. 하이퍼 링크를 계속 추적해 들어가면 모든 웹페이지가 검색된다. 구글은 이 방법으로 성공했다. 바로 연역의 방법이다. 바른 사유의 방법으로는 오직 연역이 있을 뿐이다.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역설이나 모순이나 반전과 아이러니는 극복해야 할 귀납의 실패다.


    역설과 모순과 아이러니와 반어는 귀납의 오류이지만 한편으로 다음 단계의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단서가 된다. 어떤 오류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곳에 감추어진 매듭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식의 전달은 귀납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일단 시행해 보고 시행착오에 따른 오류를 검증하여 은폐된 매듭을 찾아내고 연역하여 그 매듭을 풀면 된다.


    그런데 거기에 주저앉아 점방을 차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에 아주 눌러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설을 즐기고, 반어를 희롱하며, 모순과 딜레마와 부조리와 자가당착의 수렁에 빠져서 도리어 안도하며 그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침략전쟁의 명백한 잘못을 어쩔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 때문이라며 물타기하는 일본 지식인과 같다. 그들은 결코 참다운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 무지한 자 – 은폐된 매듭의 추적없이 드러난 사실을 맹신한다.
    ◎ 실패한 자 – 귀납의 수렁에 빠져 진리를 회의하며 불가지론을 편다.
    ◎ 참다운 자 –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통해 은폐된 매듭을 풀어낸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전제는 매듭을 은폐하고 진술은 사실을 드러낸다. 지식의 획득은 부단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거치며 은폐된 매듭을 풀어내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참다운 지식인은 역설과 모순과 반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거기서 참다운 진리에 이르는 단서를 찾아낸다.


    세 가지 태도를 말할 수 있다. 모순과 역설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다면 무지한 자다. 종교를 맹신하거나 귀신, UFO, 음모론 따위에 빠지는 사람이 그러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없다. 마술사를 의심하지 않고 장사꾼을 경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는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둘째, 조금 아는 자는 모순과 역설을 알지만 거기에 빠져서 희희낙락 하는 자다. 그들은 의심과 회의와 불가지론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그들은 애매하고 모호하고 불명확해야 진리와 가깝다고 여긴다. 그들은 처세술을 익히고 자기계발서를 탐독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며 환경에 적응하려 한다. 거짓의 바다 속에서 만족해 한다. 셋째, 바르게 아는 사람은 그 역설과 모순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연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용기있게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잘못된 환경을 뜯어고친다. 그들은 지도와 나침반만으로 대양을 건너고 사막을 가로지른다. 그들에게는 선비의 굳센 태도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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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만 알면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에 있어서 기본적인 윤곽은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세한 부분을 다 알지 못해도 대강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팀플레이를 할 수 있습니다. 어깨동무하고 먼 길을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 사막을 가로지를 수 있습니다.  

 




[레벨:5]yhy

2013.05.13 (23:38:11)

.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5.13 (23:48:02)

상관없습니다.

거짓말을 안 하면 되는 거죠. 

정치인이나 종교인, 언론인, 소설가처럼 직업이 거짓말업이라도 

조금 더 좋은 언어를 만들어서 거짓말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한 거죠. 

어떻든 좋은 언어를 가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가 지적하는 것은

거짓말을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가 좋은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어차피 세상이 다 그런거지. 세상은 요지경'.. 하며 도피하는 태도입니다.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획득할때까지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5.14 (03:22:44)

 

지식을 획득은 부단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거치며 은폐된 매듭을 풀어내는 것으로 가능하다.

 

.............................................

지식을 -> 지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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