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 1 아무개 2 ### 페이스북에서 펌이다. 위 대화에 개입하자거나 대화를 평하자는건 아니고, ‘눈앞의 황금은 챙겨라’는 지난번 글을 보강할 목적으로 인용하는 거다. 그다지 적절한 인용은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맥락은 접수하기 바라고.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맘에 들었다’는 표현이다. 이건 졸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사건이다. 그렇다.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구조론은 사건을 논한다. 존재는 사건이다. 사물은 주사위가 그냥 놓여져 있는 것이고, 사건은 주사위를 1회 던진 것이다.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사물이 그냥 놓여져 있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공간은 팽창하고 있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시공간의 변화에 대응하려면 부단히 새로 던져져야 한다. 소립자 단위로 보면 그렇다. 이 순간에도 던져지고 있다. 인용한 위 두 분의 대화는 ‘가격이 비싸다’ 혹은 ‘젊은이들이 돈도 없는 주제에 명품을 산다.’는 거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대목은 ‘맘에 들었다’가 아닐까? 가격 비싼 것은 세상에 많다. 필자가 왕년에 남대문에 있는 건희빌딩을 돈 주고 사버릴까 하다가 가격이 무려 500원도 넘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한 적이 있다. 그때 수중에 500원 밖에 없었다. 젠장할! 근데 그게 중요한 일인가? 필자는 금방 잊어버렸다. 왜? 세상에 비싼 것은 너무나 많다. 가격이 비싸다는 것은 대화거리가 안 된다. 애들이 비싼 물건을 산다는 것도 논할 거리가 안 된다. 오히려 물건을 사지 않는 노인층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암적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물건을 샀다는건 적어도 경제활동을 한다는 거다. 생산도 소비도 하지 않는 ‘인간증발’ 현상이 더 큰 문제다. 빚을 내서라도 물건을 사야 어떻게든 자본주의 안으로 들어오는 거다. 자본주의 밖으로의 자발적인 퇴장현상이 더 큰 문제다. 노인대국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노인들이 통 소비를 안 한다는걸 문제삼아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위 두 분의 대화는 필자에게 흥미없는 주제다. 다만 어떤 옷이 누군가의 맘에 들었다면 그것은 일대사건이다. 천만가지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위대한 낳음의 자궁이 된다. 눈을 동그랗게 뜰 일이고 귀가 솔깃해지는 일이다. 내 맘에 들었다면 남의 맘에도 들 것이다. 누군가의 맘에 든다면 누군가는 그 옷을 산다. 그럼 된 거다. 뭐가 문제인가? 슬픈건 누구의 맘에도 들지 않는 거다. 맘에 들지도 않는 옷을 싼 가격 때문에 산다는게 진정한 비극이다. 사실 나는 옷가게에 걸려있는 대부분의 옷들이 맘에 들지 않는다. 내가 디자인을 했어도 저것 보다는 낫게 하겠다 하는 마음이 있다. 저걸 옷이라고 만든 새뀌들은 때려죽여야 해.. 이런 생각 든다. 진짜 혐오하는 것은.. 맘에 들지도 않는 옷을 단지 가격 때문에 사는 일.. 맘에 들지 않는 옷들을 옷가게에 잔뜩 걸어놓는 일(후진국 표내려고).. 명품이라고 하니까 그냥 지갑을 열어젖히는 무개념 군중(역시 누가 후진국 아니라고 할까봐).. 사실 나는 명품이라고 불리는 가방들의 99퍼센트가 맘에 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백퍼센트일지도. 다만 남자인 내가 그 가방을 살 일이라곤 없으니 구태여 참견하지 않을 뿐이다. 가격이야 살 사람이 있으니까 파는 사람이 매기는 거고.. 우리가 논할 일이 못된다. 다만 누군가의 맘에 드는 옷이 무려 지구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은 우리 모두 축배를 들어야 할 일이다. 일단 등산복은 99퍼센트가 맘에 들지 않는다. 내가 국회의원이라면 등산복 입고 지하철 탑승하는 일은 금지시키는 법안을 발의할 것이다. 이건 확실히 오버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고. 나는 좋은 옷을 사지 않는다. 그게 백화점에 걸려있다는 사실, 누군가가 그 옷을 산다는 사실, 그 자체에 충분히 만족한다. 좋은 것은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감을 주는 것이다. 고흐의 그림이 내 서재에 걸려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흐가 지구를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에 행복감을 느낀다. 다만 때려죽일 노스페이스를 입고다니는 한국의 중고생이 길거리에 널려있다는 사실을 슬퍼할 뿐이다. 그게 옷이냐? 돌대가리들아. 그렇게 후진국을 꼭 광고하고 다녀야겠냐? 눈앞의 황금은 챙겨야 한다. 이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누군가의 맘에 드는 옷이 서울 시내 어딘가에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게 챙겨야 할 황금임을 알아보아야 한다. (옷이 아니라 그 사건이) 거기서 진리를 엿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뻐해야 한다. 그 장면을 찰칵 찍으면 그대로 영화가 되고 작품이 된다. 황금은 사물이 아니고 사건이다. 주사위는 사물이고 그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사건이다. 주사위가 던져졌다. 놀랍게도. 어떤 옷이 맘에 든다면.. 그런 정도의 안목과 취향이 있다면.. 쇼핑몰을 해도 충분히 성공한다. 기술을 연마하여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다. 21세기는 디자인의 시대이다. 후진국은 옷을 만들고 선진국은 기준을 세우고 평판을 한다.
전국민이 평판업에 종사해야 하는 시대가 온다. 집단지능으로 밥먹는 시대이다. 개인의 노력이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아이큐가 부를 창출한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국민은 단지 그 나라에 태어나기만 하면 넉넉한 대접을 받는다. 어떻게든 그 나라의 평판생산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헐리우드 영화는 개떡이다 하고 한 마디씩 해주기만 해도 된다. 프랑스가 지금 그걸로 밥먹고 있다. 그 한 마디 말을 해주기 때문에 프랑스 사람은 공짜로 대학을 다닐 수 있다. 한국인들은 그 말을 안 하고 입을 꽉 다물고 있으므로, 평판을 생산하지 않으므로 돈 내고 대학다니는 벌을 받는다.
영어가 국제사회의 기준언어이므로 영국인들은 토익을 안 봐도 되는 특전을 누린다. '헐리우드 영화는 개떡이다'라는 미학적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인은 공짜로 대학을 다닌다. 그렇다면 한국인도 뭐라도 해봐야 한다. 남이 사니까 사는 자들. 명품이라는 이름만 보고 사는 자들.. 등산복 입고 산에 가는 자들. 노스페이스 입고 다니는 자들. 맘에 안 들지만 억지로 사는 자들이 나라를 망치는 암적 존재이다. 그들은 기준을 파괴하고 평판을 파괴하여 한국인들이 이중삼중의 벌을 받게 만든다. 반대로 우리가 그 눈앞의 황금을 줍는다면 어떨까? 세계인이 한국에 보이지 않게 로열티를 바친다. 한국인은 그걸로 밥먹는다. 대학까지 공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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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황금이 사물일 때 잘 알아보지만, 황금이 사건일 때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들은 모두 사건의 형태로 존재하여 있습니다. 큰손들은 사건을 보고 주식을 사므로 돈을 벌고 개미들은 사물을 보고 주식을 사므로 쪽박을 찹니다. 사건을 알아보는 눈을 획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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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긴 막대기가 축을 중심으로 상호대칭성을 이루면서 빠르게 돌아간다면 그것은 프로펠러일 것입니다.
그것이 빠르게 회전하면 마치 원판처럼 보일 것인데, 사실 그것은 원판이 아니고 원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사물thing 또는 대상object로 간주하여 인식하는 버릇이 있는가 봅니다.
의심없이 사물이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사실 규정될 수 없는 많은 인간적-비인간적 요소들의 ‘엮임collective’과 일관된 역동성에 의해 그 존재를 구속하고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실은 두 막대기의 역동적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정적인 ‘상태’로 착각하는 것이죠.
흔히 ‘인간’, ‘존재’, ‘인식’, ‘성질’, ‘특성’, ‘원인’, ‘사회’, ‘지향’, ‘구속’, ‘권력’... 등 등.... 많은 개념으로 우리를 둘러싼 현상들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때 “나와 이야기하기 전에 당신의 용어에 정의를 내려주시오.”라는 스펜서의 정의를 떠올려 봅니다.
사실 이러한 용어로 무엇을 설명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것들을 가지고 무엇을 설명하기 전에, 거꾸로 과연 이러한 개념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진보와 보수’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프랑스 혁명기의 국민의회에서 왕당파와 공화파의 기준이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적용이 될까요?
어떠한 준거로 단호하게 이념지형도를 그려 두부를 가르듯 오차없이 나눌 수 있을까요?
천안함을 좌초라고 주장하고 이명박근혜를 성토하는 사람이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하고 자녀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면 그가 과연 진보적 가치를 담지하는 사람일까요?
세상을 고정된 ‘사물’로 인식하지 말고 끊임없이 역동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이 의미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쉼없이 생성하는 것生生之謂易’이 우주의 그러함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사유를 돌아보고 의심없이 받아들인 ‘명사’를 다시한번 ‘정의definition’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자신이 원판으로 확신한 것이 사실은 수많은 인적, 물적 요소들의 동적인 그물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FLOCKING.... 동영상을 보았는데 그것의 경이로움은 ‘전체’에 있다기 보다는 ‘부분’들의 조화와 역동 그리고 엮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물’로가 아닌 ‘사건’으로 세상을 볼 때 황금은 비로소 시야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 탁견입니다.
“나와 이야기하기 전에 당신의 용어에 정의를 내려주시오.”라는 스펜서의 정의!
A면 B니까?^
북한에서 김정은이 잡고, 남한에 박근혜가 잡고, 이건 흐름이 있어요.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했다는걸, 반도가 반응한거라고 봅니다.
실제로, 정치후방인 나라들에선, 아직도 사회주의의 망령이 돌아다니죠.
망령 그러면, 자칭진보들이 싫어할겁니다.
여튼, 이장석 -염경엽. 다저스 스카우터-류현진, 호주수영코치-박태환, 김성근-서울대 비권 학생회장
이걸 보면서, 흐름을 꽤야합니다.
월급받아 살던 시대들이 지고 있는건, 사실입니다. 그 흐름의 '속도'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방향성'을 잡고 가는게 중요합니다.
그 방향성과 흐름의 간극은 '생활'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곤궁에 처하고 부요에 처하는걸 '비결'이라고 말했을겁니다.
'기다리'라는 거죠. 거기에, 21세기에는 한마디 더해서
'방향'을 안다면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