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정기 토론모임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질은 무엇인가? 구조론은 질의 이해가 핵심이다. 많은 분들이 이를 포지션 개념, 추상적인 수학적 개념, 일의 순서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고유한 속성 개념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추상적 사고에 강해야 한다. 볼펜 길이는 손가락 길이의 두배다. 몽당연필로는 글을 쓸 수 없다. 연필을 쥐려면 연필의 촉이 아니라, 중심을 제압해야 한다. 그런데 글을 쓸 때 축이 아니라 날개를 쥔다. 이건 잘못된 것이다. 축을 고정시키려면 볼펜 길이가, 촉에서 손아귀까지의 두 배여야 한다. 볼펜을 손아귀에 걸쳐서 그 부분을 축으로 삼는다. 작은 천칭저울이 만들어진다. 모든 사물에 작은 저울이 숨어 있다. 가구나 의상은 한가지 천이나 목재 혹은 금속으로 만들어야 한다. 공중화장실 문은 나무로 되어 있는데 잠금고리만 쇠로 되어 있으면 떨어져 나간다. 밀도가 다른 부분에서 힘이 굴절되기 때문이다. 공진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모든 물질은 밀도에 따라 고유한 주파수를 가지고 있으며 같은 주파수끼리는 통하고 다르면 힘이 꺾여서 지렛대가 생긴다. 그 부분에서 구조적으로 취약해진다. 표준모형으로 말하면 자발적인 대칭의 붕괴가 일어난다. 금속으로 된 손잡이가 나무로 된 문짝에서 떨어져 나간다. 옷을 지을 때는 비단과 면과 가죽을 섞을 수 없다. 함부로 섞으면 누더기가 된다. 청바지면 전체가 청바지여야 하고 나이롱이면 전체가 나이롱이어야 한다. 만약 불균일하면 모양이 안 잡힌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볼펜의 문제와 지금 말하는 밀도의 문제는 모두 질에 대한 설명이다. 이걸 다르다고 인식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왜 이걸 말하다가 저걸 말하느냐는 식이다. 그런데 그게 다른가?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문제라는 점에서 같다. 대상을 일의적으로 통제하는 문제다. 컵의 주동이는 입술의 곡선을 닮아야 한다. 피부가 부드러우므로 옷도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야 한다. 밀도가 균일해야 힘이 전달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풍백화점이 붕괴하고 성수대교가 떨어진다. 이는 모두 질에 대한 설명이다. 외부에서 에너지를 받아들여 대상을 일의적으로 통제하는 문제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은 위상이 균일해야 한다. 결혼을 한다해도 남녀 간의 계급이 같아야 한다. 명바기처럼 푸틴한테 부채질하고 일본 왕앞에서 굽신대면 안 된다. 그네처럼 우간다의 독재자하고 똑같아져도 곤란하다. 사람의 성질도 질에 해당한다. 난폭한 성질과 부드러운 성질이 있는 것이다. 질은 균일해야 에너지가 전달되므로 일베충에 들어가면 균일하게 저질이 된다. 의사소통의 문제 때문이다. 구조론 연구소에 오면 균일하게 질이 향상된다. 유유상종의 법칙이다. 아니면 말이 막힌다. 이러한 질의 다양한 측면을 모르고 어떤 하나의 질을 알면 그것 하나로만 모두 해석하려는게 문제다. 예컨대 질의 균일 문제는 인간들 사이에도 있다. 동창회에 가면 밀도가 가까워져서 달라붙는다. 국회에 가면 밀도차가 드러나서 삿대질한다. 사람마다 거리가 있어서 외국인들은 누가 자기 옆 1미터 안쪽으로는 private space라고 해서 못들어오게 한다. 한국인은 찰밥먹고 끈적끈적 달라붙는다. 밀도가 다르면 질이 달라져서 의사소통이 막히고 같이 놀지 않게 된다. 소리굽쇠 실험과 같다. 밀도가 같으면 떨어져 있어도 반응하고 밀도가 다르면 찰싹 붙어 있어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구조론의 처음 문제는 어떻게 밀도를 균일하게 해서 사건을 성립시킬 것인가이다. 밀도차가 나면 중국인과 같아서 거리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모른척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이때 사건은 실패다. 다름과 차이의 문제 현대 철학은 다름의 문제, 차이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획일화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문제겠는가?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에서 구조론적이다. 다만 혁명을 시도하다보니 정치적 왜곡이 들어가서 변질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처음에는 자유와 차이와 다름을 강조하다가 점점 획일화 되는 법칙이 있다. 시장자율에 맡기면 다름과 차이가 있을 것 샅지만 건희독재에 의해 획일화 된다. 시장독재가 있다. NHN 독재에 벤처 죽는다. 그러므로 새로운 상품, 새로운 시장이 끝없이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놔두면 획일화 된다. 한국처럼 땅덩이가 작으면 무조건 획일화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고립된 섬나라들은 왕을 둔다. 왕의 중재로 강자가 약자를 압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일본의 와和 사상이다. 일본은 재벌도 관동에 하나, 관서에 하나 하는 식으로 대칭구조를 이룬다. 시장에 맡긴다고 획일화가 피해지는 것은 아니며 시장규모가 계속 커지는 동안만 획일화를 피할 수 있다. 이는 기승전결의 법칙이다. 원형이정에 따라 봄에는 다양하고 여름에는 무성하다가 가을에는 획일화 되고 겨울에는 얼어붙는다. 원형이정의 정은 딱딱해져서 정렬한다는 것이다. 최후에는 획일화 된다. 어떤 일의 전개과정에서 다양성>독재자등장>획일화의 구조를 피할 수는 없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새로운 시장, 새로운 대륙, 새로운 상품, 새로운 도전자를 끝없이 만들어내는 방법 뿐이다. 인간 수명이 정해진게 다행이다. 만약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모두 획일화를 피할 수 없다. 외부에서 끝없이 젊은이가 공급되어야 한다. 구조론은 이를 정교하게 튜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무작정 획일화를 반대하는 것도 답이 아니고 무작정 방치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입구와 출구를 두고 하나의 방향으로 유도하며 끝없이 제어해야 한다. 방법은 반드시 있다. 그런데 상부구조에 있다. 한국도 북중러를 뚫고 유럽과 이어져야 확일화를 피할 수 있다. 무작정 건희만 때려잡는다고 답이 나오는게 아니다. 큰 스케일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내부에서 쥐어짜기로는 전혀 답이 없다. 재벌을 잡으면 더 재벌독재가 심해진다. IMF 때 많은 재벌이 엎어졌으나 현대, 삼성으로 더 집중되었다. 외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FTA 반대는 답이 아니다. 더 개방해야 재벌이 통제된다. 마르크스주의도 정치 외에 다양한 분야에 전개시켜야 오직 정치 하나에만 몰입하므로 획일화 된 것이다. 마르크스의 본질적인 부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야말로 맹아기 구조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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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든 전제와 진술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제는 감추어져 있고 사람들은 맨 마지막에 오는 동사만 봅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는 식이죠. 마르크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합니다. 불완전하다는 거죠. 그러나 결론에 맞추어 성급하게 제품화 되었으며 세일즈 과정에서 크게 왜곡되었습니다. 실용을 추구하는 순간 왜곡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전혀 쓸모없는 이론이 되었을 때 진정한 쓸모가 발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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