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교육의 함정 영국인은 한때 해적이었고 잡스는 한때 해커였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반칙을 저질렀다. 따지고 보면 많은 역사인물들이 요령과 꼼수의 대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반칙은 과연 나쁜가? 지난번에 언급한 뉴턴의 limit도 그렇다. ‘수학은 완전하다. 얄궂은건 안 된다’는 학계의 고정관념을 깼다. 모로 가도 계산만 해내면 장땡이다. 중요한건 달나라에 로켓을 보낼 수 있느냐다. limit는 엄격한 수학적 질서에서 신의 비밀을 캐려고 했던 피타고라스 이래의 전통적인 수학관념으로 보면 수상하기 짝이 없는 개념이지만 어쨌건 달에 사람을 보냈으니 받아들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지고 가벼운 것은 천천히 떨어진다고 말했다. 누구도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인의 경험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경험으로 안다. 가벼운 풍선과 무거운 돌을 공중에 던져보라. 당연히 무거운 돌이 빨리 떨어진다. 이는 물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무거운 것은 물 속에 빨리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물 속에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당연한 상식을 흔들어 놓았다.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공기 중에는 공기의 저항을 받으므로 당연히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진다. 여기서 방향판단의 문제가 제기된다. 각자의 판단기준이 다른 거다. 갈릴레이의 기준으로는 갈릴레이가 맞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준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맞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더 중요한 것에 가산점을 준다. 뭐가 더 중요하지? 보편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 공기압은 장소에 따라 다르다. 바람이 불 때는 풍선이 천천히 떨어지고 바람이 전혀 불지 않으면 빨리 떨어진다. 보편적인 것은 공기가 없는 진공상태일 때다. 보편성이 진정한 기준이다. 아이와 어른이 싸우는데 둘 다 잘못했으면 아이가 승. 정부와 국민이 싸우는데 둘 다 잘못했으면 국민이 승이다. 상부구조 중심의 판단이 방향판단이다. 그런데 무엇이 상부구조냐다. 더 많은 의사결정을 하는 쪽이 상부구조다. 이건 그냥 숫자를 세어보면 된다. ###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수세에 몰리자 기습하여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를 치는 꼼수를 썼다. 짐승의 본능과 같은 순간적인 판단으로 운좋게 이겼을 뿐 로마교범식 완승은 아니었다. 이 경우 상대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재도전을 걸어온다. 재시합에도 알렉산더가 이겼지만 알렉산더의 전술은 똑똑한 적장을 만났다면 대패할 수 있는 위험한 전술이었다. 운이 좋았다. 나폴레옹은 운이 나빴다. 나폴레옹도 알렉산더와 같이 적의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교범식 전투가 아니라 전황을 읽는 순간적인 센스로 이겼다. 주특기인 종심돌파 후 각개격파 전술이 그렇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한 것은 위장병 때문에 막사에 드러누워 잠시 전황에서 눈을 뗐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막사에서 나오자 이미 전황은 엎어졌다. 게다가 하필 강적 웰링턴을 만났다. 만약 알렉산더가 오래 살았다면? 결과는 나폴레옹과 같았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오래 살았기 때문에 하필 웰링턴을 만났고 한니발 역시 오래 살았다가 운 나쁘게 강적 스키피오를 만났다. 꼼수로 이기는 사람이 진짜 천재다. 전쟁의 의의는 적의 전의를 꺾는데 있다. 실력으로 이기면 적은 전의를 상실하여 평화가 유지된다. 그러나 꼼수로 이기면 적은 반드시 재도전을 해온다. 꼼수가 반복되면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상부구조를 불러내는 것이다. 특수성이 물러가고 보편성이 나타난다. 무엇인가? 총이 칼을 이기는 것은 꼼수가 아니다.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로마교범식 전투도 꼼수가 아니다. 압도적인 전력에는 항복해야 한다. 그런데 징기스칸의 전투라면? 징기스칸은 다르다. 꼼수인데 꼼수가 아니다. 왜인가? 알렉산더나 한니발은 한 명이다. 알렉산더 없는 알렉산더군은 패배한다. 한니발 없는 한니발군은 조금의 쓸모도 없다. 나폴레옹 없는 나폴레옹군도 마찬가지. 그러나 징기스칸 없는 징기스칸 군대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알렉산더가 무수히 많은 알렉산더를 복제하면? 한니발이 무수한 한니발을 복제하면? 꼼수가 아니다. 정공법이다. 징기스칸이 그러했다. 무수한 징기스칸을 복제했으니 모두가 승복할 밖에. ### 교육이론에 대해서는 두 개의 전선이 있다. 하나는 서구식 방임교육과 한국식 억압교육의 대결이다. 이건 답이 나와 있다. 똑똑한 아이는 방임할수록 좋고 멍청한 아이는 가르칠수록 좋다. 한국은 지나치게 가르치는게 문제로 되어 있고, 미국은 지나치게 안 가르치는게 문제로 되어 있다. 또 하나의 교육전선은 미국식(또는 한국식) 칭찬교육과 프랑스식 좌절교육의 대결이다.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30322205011192 특히 어린이에 대해서는 무조건 잘한다는 칭찬과 격려가 도리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보고를 근래에 많이 접한다. 못하는데도 잘한다고 하면 잘한다는 전제로 결과를 맞추는 수가 있다. 전제와 진술의 구조다. 그 지점에서 숨은 전제가 세팅된다. 자신을 잘하는 아이로 포지셔닝하고 그때부터 연극을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만나면? 회피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해. 왜냐하면 나는 잘하는 아이니까.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고.’ 못한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도피하는 것이다. 부모도 그렇다. ‘우리 애가 공부를 안해서 그렇지. 머리는 참 좋은데.’ 바로 역할놀이 들어간다. 그때부터 아이는 ‘잘하는 아이’ 역할을 맡아서 연극을 한다. 매우 황당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못하는 애가 잘하는 척 하는 방법은 컨닝이다. 못하는데도 주변에서 칭찬하면 컨닝을 하거나 결과를 조작한다는 보고가 근래에 있었다. 자기생각을 감추고 주변에서 원하는 대답을 한다. 연극을 하고 칭찬받기에 길들여졌다. 공부의 문제가 아니라 처신의 문제로 바뀌는 거다. 반면 사실대로 못하는 것을 못한다고 평가받은 아이는 열심히 노력한다. 제 분수를 아는 거다. 못하니까 공부를 해서 잘하게 된다. 주위의 시선에 희생되지 않는다. 애들을 무턱대고 칭찬해서 건방지게 만들면 부모만 힘들어진다. 요즘은 핵가족이라 동생들을 눌러줄 형들도 없다. 칭찬교육과 좌절교육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면 어느 쪽이 옳을까? 어쨌든 비용은 칭찬교육이 더 많이 먹힌다. 애 키우기 힘들다. 그런데 국가 전체로도 손실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꼼수가 는다. 한번 하면 꼼수지만 반복하면 천재다. 비용 대비 효과를 떠나, 아이가 과연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떠나 어떤 교육이든 국가 전체적으로는 더 힘든 교육이 좋을 수도 있다. “프랑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한번도 소리지르며 떼를 쓰거나, 엄마가 친구들과 얘기하거나 전화를 할 때 칭얼대거나 울지도 않았다. 프랑스 아이들은 심지어 생후 2~3개월 때도 밤새 단 한번도 깨거나 칭얼대지 않았다.”[기사인용] 이게 과연 좋은 현상일까? 가장 나쁜 교육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나쁜 것은 시시콜콜 다 가르쳐주는 것이다.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으면 의사결정을 힘들어 한다. 시시콜콜 다 가르쳐주면 역시 의사결정을 회피한다. 매뉴얼과 시스템에 의존하게 된다. 둘 다 좋지 않다. 가장 좋은 결정은 처음에 조금 가르쳐주고 그 다음은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찬교육은 일정한 효과를 얻게 한다. 류현진도 가르쳐 줘야 체인지업을 던진다. 한때는 박찬호처럼 조기에 미국에 진출하게 하는 것이 야구판의 유행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류현진처럼 충분히 기술을 배우고 난 다음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으로 유행이 바뀌었다. 기술을 잘 가르쳐 주지 않는 미국식 프로야구 시스템이 동양인에게는 불리할 수 있다. 메이저리그가 동양인을 선호하는 이유는 사고를 안치기 때문이다. 중남미 애들은 문득 사라져 버리거나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거나 등등 문제를 일으킨다. 동양인의 장점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건 무엇을 배울 것인가이다. 지식은 대개 쓸데없다. 사회성 교육이 중요하다. 반응하는 교육이 중요하다. 감탄하기, 리액션하기, 호들갑떨기, 칭찬하기, 공감하기도 배워야 한다. 칭찬교육을 하면 꼼수와 반칙력이 늘어난다. 문제를 풀어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답을 정해놓고 문제를 재조직해 낸다. 이는 발상의 전환이다. 이러한 반칙능력이야말로 천재의 특징이다. 이것이 너절한 잔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상식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칭찬교육을 하면 부모나 선후배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한다. 부모에 의존한다는 것은 외부환경의 이용이다. 프랑스식으로 합리적인 매뉴얼을 만들어놓고 단순작업을 하도록 하기 보다는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게 하는 것이 낫다. 회사운영도 그렇다. 미국식, 일본식은 매뉴얼대로 가는 것이다. 한국식은 늦게까지 남아서 상사 눈치보며 똥개훈련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이 나을까? 물론 미국식이 효율적이다. 한국식은 맨땅에 헤딩으로 능력이상의 과제를 받아 주변을 이용한다. 한국기업이 칼퇴근을 못하는 이유는 애초에 능력이상의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매뉴얼이 없으므로 모든 업무가 능력이상이다. 친구를 이용하든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한다. 미국이나 일본식은 사전에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추어놓고 정해진 일만 하면 되며 그 시스템은 누구든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비용 대 효과로 보면 미국식이 낫지만 전체로 보면 한국이 낫다. 반칙의 명수는 유태인들이다. 은행업은 부도덕하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데 대담하게 은행업을 한 것이다. 대담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로마교범식 교육은 사람을 고지식하게 만든다. 꼼수나 반칙이란 무엇인가? 문제를 풀어 답을 찾는게 아니라 답을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어 문제를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창의다. 일회에 그치면 꼼수지만 복제되면 천재다. 칭찬교육이든 좌절교육이든 장단점이 있다. 각자에 맞게, 상황에 맞게 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 전체로 보면 한국과 같은 고립된 국가는 유태인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 칭찬교육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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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을 무리하게 칭찬하면 오만과 독선에 빠져서 자기가 무조건 옳다는 전제를 미리 깔아놓고 거기에 맞추어 임의로 게임의 룰을 바꿉니다. 반칙을 하는 것이지요. 위대한 천재들은 모두 반칙의 명수들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노예에게는 좌절교육을 시켜왔고 제왕에게는 반칙교육을 시켜왔습니다. 이런 말은 너무 고지식하게 알아들으면 안 되고 역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사만 보지 말고 메커니즘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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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교육에 익숙한 사람과 노예교육에 능한 사람이 패키지를 이룰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게 중요합니다. 수준별학습은, '시장'자체를 소멸시켜서 자멸. 수성기에는 노예 매뉴얼로 고지식하게, 수세에는, 변방을 치는 변칙가들로. 팀을 이루고 있을때, 솔루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솔류션이 있다는걸 알고 가는게 중요합니다.
칭찬교육이든 좌절교육이든,
인간의 존엄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인의 자존감을 세우는 방향으로
진짜 소통을 지속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칭찬이나 눈치보는 칭찬은 상호 불신을 낳고, 엄한 것에 매달리게 만든다.
아이 주변에 제대로 칭찬해주는 어른들( 교사, 부모, 삼촌이나 이모, 나이차 많이 나는 사촌, 동네 아저씨, 부모님 친구)과 또래집단 아이들 -동네형, 학교 선배, 친구들, 후배, 형제들 7-8명만 있어도 아이가 자기 길을 찾아 성장에 이른다.
칭찬도 세력이 되어야 가능하다. 한 사람만 칭찬하면 아이가 그 사람에게 앵겨붙기를 시도해서 어설프게
성장하다가 삼천포로 간다. 문제는 제대로 칭찬하는 사람 한 사람 찾기가 힘들다는거...
'널 끝까지 믿는다'는 한마디가 칭찬의 끝.
그럼 죽어도 좋다는 결기가 생김. 그 죽음의 순간에 사람이 바뀜.\아니, 내재된 것이 나옴.
시계불알
진자
추
교육에서 이 놈들은 왔다리 갔다리 합니다.
과거에 냅다 체벌교육이 먹힌다고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칭찬교육이 좋다고 하다가,
다시 뭔가 잘못되어 시계불알을 만지작거리고 있지요.
서양은 지금 동양의 수직관계를 배우고 있고,
동양은 서양식 교육이 좋다고 수평관계를 배우고 있지요.
동양은 도제식 교육이 전통이었고,
서양은 매뉴얼식 교육이 대세로 자리해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능력은 동양이,
팀웍은 서양이 우세를 보이다가,
지금은 서로 장단점을 인정하며 보완하려는 추세로 돌아섰습니다.
건축에서도 젠zen스타일이라고 동양의 공간이 도입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냅다 서양식 건축을 베껴다 세웠지요.
어설픈 것은 거기까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충하는 건 따라하지 말아야죠.
교육에서는 채찍도 필요하고, 당근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시도 때도없이 당근을 주고, 시도때도없이 패버리면 교육이 망합니다.
교육가라면 이걸 파악해야하고,
구조론이라면 이걸 건드려야겠지요.
집단의 의사결정
이걸 잘 훈련시켜야 하는데,
개인의 능력배양이 없이는 집단의 의사결정은 불가능합니다.
대략 서구사회든 동양사회든 똑똑한 넘 몇명이 대략 필요한만큼 자기복제를 해놓고 사회를 굴립니다.
자기복제가 왕창되면
사회는 왕창 달라질 겁니다.
구조론으로 언능 복제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