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은 많은 영감을 준다. 진리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거다. 이 말이 용기를 주는 이유는 언어를 넘어선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언어 위에 무엇이 있는가? 모형이 있다. 헬렌 켈러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대신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설명할 수 있다. 언어의 설명으로 진리를 전할 수 없다면 대신 직관의 모형으로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 언어는 주어와 술어, 곧 전제와 진술의 구조로 되어 있다. 말을 하는 자와 말을 듣는 자의 상호작용 관계로 포지션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이렇듯 둘로 쪼개져서 포지션이 나눠져 있다면 이미 잘못된 것이다. 진리를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언어가 본래 나눠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눠지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모형이 있었다. 모형은 존재에 언어를 가하여 포지션을 나누기 이전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근대과학의 토대는 인과율이다. 인과법칙 역시 원인과 결과로 나누어져 있다. 이미 잘못된 것이다. 인과로 나눠지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역시 모형이 있었다. 모형에는 완전성이 반영되어 있다. 직관된다. 원자론은 그러한 모형의 예다.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모형적 사고를 하며, 모형으로부터 패턴을 베낀다. 그 모형은 원자론이다. 그러나 원자론은 근대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과학의 급속한 발달 때문이다. 석가의 깨달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었으나 지금은 꼴이 우습게 되었다. 과학과의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원자 개념은 획기적인 발상이기는 하나 진리를 추적하는 하나의 단서로 기능할 뿐이다. 원자론은 문제해결의 속시원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며 인간의 사고를 가두는 한계로 작용한다. 원자론은 뉴턴≫아인슈타인≫양자역학≫표준모형으로 전개되는 현대과학의 흐름과 방향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인간 언어의 한계는 진작에 노정되었고,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직관의 모형이며 원자론은 업그레이드해야 할 구시대의 낡은 모형이다. 구조론은 새로운 직관의 모형이며 의사결정 모듈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구조론의 모형은 원자론과 비슷한 점이 있으면서도 원자론을 넘어선다. 구조는 모듈의 구성소다. 모듈은 구조에 완전성을 태운다. 이는 입자가 에너지를 얻은 바와 같고, 길짐승이 토굴을 얻은 바와 같와 같다. 새가 둥지를 얻은 바와 같고, 물고기가 물을 얻은 바와 같다. 구조와 완전성 의 결합인 의사결정모듈개념으로 직관의 모형을 얻어 세상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모형에 대입하여 풀어내는 사고를 해야한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는 다섯개의 의사결정모듈로 모두 설명한다. 자연은 에너지의 의사결정에 의해 회로를 결정함으로써 작동하고 인문은 갈림길에서 사회의 의사결정에 의해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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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결국 부단한 의사결정이며, 의사결정은 막연히 생각해서 하는게 아니고 모형에서 베끼는 것입니다. 하나의 일정한 모형을 가지고 일관되게 한 방향으로 가야 신뢰를 축적할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임기응변하면 조삼모사가 되어 자신의 자산을 까먹습니다. 대개 미래를 팔아 현재를 조달합니다. 확률을 파먹는 거죠. 소년이 남의 것을 슬쩍하여 1천원의 이익을 얻을 때 소년은 미래의 인생성공 확률을 그만큼 팔아먹은 것입니다. 밑천을 빼먹은 거죠. 봄에 파종할 종자를 겨울에 먹어치운 것입니다. 인생은 부단한 의사결정이며 퇴계처럼 회피하지 말고, 율곡처럼 적극적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최소한 데이터는 얻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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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뵈는 자원만 후손들 것을 벗겨먹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미래도,
보이지 않는 자원도 모조리 벗겨먹고 있다.
부디 종자는 먹어치우지 말아야 할터...
어렸을 적부터 못견기게 힘들었던 것은
파릇파릇 솟아오르는 싹수를 뭉개는 놈들과 그들의 작태........
종자를 생산하지 못하게 씨를 말리는 건,
미래를 깔아뭉개는 행위다.
미래를(생명력을) 그렇게 뭉갠다고 그게 뭉개지냐? 이 바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