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요체는 의사결정에 있다. 당신은 언제라도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가? 천만에! 불가능하다. 몇 가지 전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은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고 가치판단은 의사소통을 전제로 한다. 당신은 의사소통과 가치판단에 실패하므로 의사결정에 실패하는 것이다. ◎ 의사소통≫방향판단≫의사결정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이유는 인류가 하나의 모듈을 이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나인 것도 아니고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니다. 모든 비극은 거기서 일어난다. 국적이 다르면 언어가 다르다. 언어가 다르므로 소통은 실패다. 그런데 국적이 달라도 수학은 통한다. 수학의 언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그것은 깨달음이다. 인류의 문제는 의사소통의 문제 하나로 집약된다. 인류가 하나의 이상적인 그림을 공유할 때 바른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자연의 완전성을 반영하는 모형이어야 한다. 국어나 중어가 아니라 그 모형어로 소통해야 한다. 단지 언어가 같다고 해서 의사결정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제일 뿐이다. 의사소통 다음에는 가치판단이다. 가치판단은 방향판단이다. 가치판단에 성공하려면 방향을 통일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보조를 맞추려면 전체가 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발 맞추어 갓!’ 하는 대장의 구령에 따라 전체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발을 맞출 수 없다. 연주하지 않으면 박자를 맞출 수 없다. 눈빛을 교환하지 않으면 타이밍을 맞출 수 없다. 이때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진보와 보수 중에서, 보편과 특수 중에서, 집단과 개인 중에서 가치판단이 가능하다. 방향은 마이너스와 플러스가 있다. 마이너스가 정답이다. 마이너스가 모형어다. 마이너스가 연역이다. 마이너스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전개한다. 플러스는 부분에서 전채로 전개한다. 플러스는 귀납이다. 귀납하면 방향이 틀린다. 발을 맞출 수 없다. 타이밍을 맞출 수 없다. 연주는 어긋나고 만다. 패스는 연결되지 않는다. 치고달리기 작전은 실패하고 만다. 왜 진보가 옳고 보수는 그른가? 진보가 마이너스이기 때문이다. 왜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인가? 집단은 마이너스이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방향이어야 보조를 맞출 수 있다. 집단이 개인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더 중요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1+1=2다. 이건 플러스다. 플러스는 보조를 맞출 수 없다. 협력플레이가 불가능하다. 프로스포츠의 승부조작은 고의로 실점하는 형태로 일어난다. 고의로 득점할 수는 없다. 마이너스만 보조의 일치는 가능하다. 방향의 일치는 가능하다. 물 한 컵 더하기 한 컵은 큰 한 컵이다. 플러스로 가면 이러한 혼선이 빚어진다. 기준이 통일되지 않는 것이다. 각자 다른 크기의 컵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2-1=1이다. 이는 마이너스 방향이다. 의견은 일치된다. 보조가 맞는다. 손발이 맞아서 도둑질을 할 수 있다. 승부조작은 가능해진다. 연주는 가능해진다. 번트작전은 성공시킬 수 있다. 크로스는 슛으로 연결된다. ◎ 2-1=1에서 등호 전에 2가 정의되어 있다. ◎ 1+1=2에서 등호 전에 2가 정의되지 않았다 약속플레이를 하려면 사전에 모여서 약속해야 한다. 패스를 받으려면 사전에 신호를 보내야 한다. 2가 1에 선행해야 하는 것이다. 2에서 1로 갈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약속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보조를 맞추려면 먼저 약속해야 하고 그러려면 먼저 만나야 한다. 모듈을 이루어야 한다. 모형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논리의 근거는 완전성이다. 그것은 어떤 것이 처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초기조건의 복잡성이다.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오파린의 가설은 틀렸다. 처음에는 지구가 균일하게 둥글어서 육지가 없고 모두 바다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진흙이 없었기 때문에 진흙에서 생명체가 태어날 수 없다. 심해의 열수구에서 생명이 탄생했을 수도 있다. 화성에는 생명이 없다. 왜? 그러한 복잡성이 없기 때문이다. 2가 아닌 1이기 때문이다. 왜 오파린은 진흙에서 생명이 태어났다고 주장했을까? 호숫가의 진흙에 복잡성이 있기 때문이다. 모형이 성립할 수 있는 초기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생명이 탄생하려면 인자가 결합되어야 하고 결합되려면 붙잡아주어야 하고 또 움직여야 하고 그 과정에 서로 보조를 맞추어야 하고 나아가는 방향판단이 필요하고 마지막으로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한다. 붙잡으려면 진흙이 필요하고 움직이려면 물이 필요하고 에너지가 투입되려면 햇살이 비치는 얕은 물가여야 한다. 그러려면 반드시 진흙이 있는 호숫가여야 한다. 그러나 심해의 열수구에서도 그러한 복잡성을 갖춘 환경은 성립할 수 있다. 그곳에 진흙도 있고 물도 있고 에너지도 있기 때문이다. 최초에 하나의 세포가 탄생하고 이를 복제하여 지구상의 무수히 많은 생물이 탄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초에 완전한 하나를 정의하고 이를 연역하여 무수한 지식을 탄생시킬 수 있다. 이에 필요한 것은 의사소통, 방향판단, 의사결정이다. 의사소통은 진흙처럼 그대를 붙잡고, 방향판단은 물처럼 그대를 이동시키며, 의사결정은 에너지처럼 생명을 작동시킨다. 세 조건 중에 하나라도 부족하면 생명은 탄생하지 않는다. 진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도 나도 태어나지 않는다. 화성처럼 황폐해진다. 최초의 복잡성이 필요하다. 주사위의 눈은 여섯 개다. 주사위 눈이 한 개이거나 두 개라면 게임을 할 수 없다. 그러한 복잡성이 없기 때문이다. 전략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칭구조를 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축구골대가 하나 뿐이면 시합을 할 수 없다. 팀의 숫자가 홀수이면 경기를 할 수 없다. 골대는 반드시 둘이어야 하고 팀은 반드시 짝수여야 한다. 자물통과 열쇠는 둘이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흙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곧 의사소통의 단계이다. 두 당구공은 닿아서 2를 성립시키고 있다. 의사소통은 애초에 두 당구공을 붙여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방향판단은 이미 붙어있으므로 떼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진보할 수 밖에 없다. 생물은 진화할 수 밖에 없다. 주사위는 던지는 수 밖에 없다. 윷놀이라도 마찬가지다. 팽이는 칠 수 밖에 없고, 공은 차는 수 밖에 없고, 연은 날리는 수 밖에 없고, 화살은 쏘는 수 밖에 없다. 이때 모두 2에서 1로 전개한다. 윷은 모였다가 흩어지며, 공은 발과 붙었다가 떨어지며, 연은 얼레가 감겼다가 풀어지며, 화살은 시위에 올랐다가 날아가며 모두 2에서 1로 이행한다. 그 반대는 우주 안에 절대로 없다. 영원히 없다. 이것이 방향판단이다. 진보와 보수, 집단과 개인, 전쟁과 평화, 생산과 파괴, 투자와 소비의 방향판단은 오직 2에서 1로 가는 수 밖에 없다. 그 이외의 경우는 절대로 없다. 그 다음에 의사결정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전체는 부분에 앞선다. 이미지는 텍스트에 앞선다. 모형어는 전개어에 앞선다. 이것이 연역이다. 연역은 마이너스다.
(양모님의 글에서 인용함) 큐브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림의 큐브는 24조각이 엮여 있다. 하나를 맞추면 하나가 도망간다. 멀리있던 것을 움직이면 옆면으로 달려온다. 그 본질은 엮임이다. 서로 엮여있는 것이 2다. 큐브를 맞추려면 조각들이 서로 엮여있다는 전제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각각의 조각은 세 면을 가지므로 엮여있는 셋을 동시에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 색깔 중의 하나를 축으로 삼고 나머지 둘을 대칭시키는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저마다 엮여있다. 멀다고 생각한 사람이 어떤 축을 통해 가깝게 되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된다. 한 사람과 가까워지려하면 축으로 인하여 또 다른 사람이 멀어지게 된다. 큐브를 다 맞추려면 가장 큰 단위의 엮임을 찾아야 한다. 가장 상위 개념의 철학을 제시해야 한다. 당신과 나의 차이가 아닌 공존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은 1이 아닌 2다. 두 당구공이 접촉해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한다.
###
대부분의 판단은 방향판단에 의해 1초 안에 가능합니다. 생각해보고 판단한다는 따위는 없습니다. 역방향이냐 순방향이냐를 읽는 것이며 여기에는 1초가 걸리지 않습니다. 2에서 1로 가면 순방향이고 그 반대로 가면 역방향입니다. 위하여는 역방향이고 의하여는 순방향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라고 하면 개인에서 국가로 가므로 1에서 2로 가는 즉 역방향입니다. '제도개선에 의하여' 라고 하면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므로 순방향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1초만에 판단됩니다. 홍준표가 옳은지 그른지는 이 규칙으로 1초 안에 판단할 수 있습니다.
∑ |
왜 게시글에 자바스크립트가 붙는지 그 이유를 연구하는 것이 더 빠르겠소.
오세님 컴퓨터를 쓴 것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일단 삭제했습니다.
.
오세님께 알려줘야겠소.
황당하군요.
도대체 왜 이게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소.
누구든 1초 안에 알 것인데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단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수학적 증명이 어렵다는 건인가 본데
그건 수학적 증명을 하는 방법을 정립해야 할 수학자들이
수학적 증명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건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수학의 문제가 아니라 수학적 증명의 규칙에 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이 문제의 경우
짝수는 최종단계에서 자신과 나누어 1을 이루므로 일단 해당이 없고
홀수는 어떻든 1을 더하여 짝수를 만들므로 역시 해당이 없소.
끝.
3을 곱한다는게 트릭인듯 한데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수고이오.
실제로는 아무런 조작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거.
3=2+1인데
2를 곱하는건 짝수를 만들므로 일단 해당이 없고
거기에 추가되는 1은 결국 자기 자신과 곱하라는 말인데
이는 현상유지를 뜻하는 것이고
어쨌든 현상유지에서 1을 더해서 짝수를 만들라는 말이잖소.
그냥 어떤 홀수를 제곱하여 1을 더하면 짝수가 된다는 말이군요.
그냥 홀수에 1을 더하여 짝수로 만들라는 말을 복잡하게 해놨군요.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변경할 수 있소.
김동렬 추측.. 홀수를 제곱하면 홀수가 된다.
이 추측은 또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소.
김동렬 또측.. 어떤 홀수를 가만 두면 홀수다.
더 줄일 수도 있소.
홀수는 홀수다.
더 줄이면
홀수.
더 줄이면
홀.
.
짝수를 2로 나누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소.
짝수를 2로 나누면 짝수 아니면 홀수가 나오는데
짝수가 나오면 계속 2로 나눌테니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고
홀수가 나오면 1을 더하여 짝수로 만드니 결국 같은 거고.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오.
.
짝수로 만들어 2로 나누면 숫자가 작아지는데 어떻게 무한히 반복되겠소?
여기서 플러스로 갈 가능성은 3을 곱하라이고 마이너스로 갈 가능성은 2로 나누라인데
3을 곱하라는 한 번이고 2로 나누라는 횟수를 지정하지 않았잖소?
홀수는 1을 더하여 짝수로 만들므로 한 번이고, 짝수는 홀수로 만들지 않으므로 무한.
2가 1보다 큰 숫자인건 당연한 일.
2가 1보다 크다는걸 증명하면 되겠군요.
3n-1로 식을 바꾸면 성립하지 않는다 합니다.
단 기대를 완전히 배반하는 그런 것은 아니고 순환하는 방식으로.
(즉 5와 17을 대입하면 제자리에 돌아옴.)
그리고 웬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더 재밌는 것도 있습니다.
더더 재밌는 거. 이건 몇년 전에 증명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