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연역이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우주가 된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잘게 쪼개져서 우주가 되었다. 크기는 의미가 없다. 내부질서가 중요할 뿐이다. 우리는 숫자를 1부터 센다. 1,2,3… 이게 맞는 건가? 숫자를 1부터 세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작은 것이 뭉쳐서 큰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믿게 된다. 그런게 어딨어? 셈은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고 자연은 셈이 없다. 자연은 양자화를 쓴다. 대칭과 균형을 쓴다. 손도 둘이요 발도 둘이다. 남녀 성별도 둘이다. 둘씩 짝지어 양자화시킨다. 풀이든 나무든 잎이 나고 가지가 나는 방식이 있다. 마주나기, 돌려나기, 어긋나기 등의 잎차례가 있다. 대개 쌍으로 되어 있다. 인간이 덧셈 위주의 셈을 쓰는 것은 다른 사람과 약속을 맞추기 위해서다. 자연은 혼자 해낸다. 구조론은 연역이다. 연역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통제가능성이다. 통제가능성은 절대주의다. 통제가능성은 계 안에 자체적으로 대칭이 존재하고 통제불가능은 계 바깥에 별도로 대칭이 존재한다. 계 바깥의 대칭상대는 관측자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으로 나눠진다. 실패다. 분리되면 실패다. 귀납은 별도로 분리되어 있으므로 대상을 통제할 수 없다. 에너지가 없다. 에너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대칭과 호응으로 조직된 수학적 질서가 에너지다. 노자는 통제불가능성에 주목하고 공자는 통제가능성에 주목한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임에 주목해야 한다. 어떻게든 통제실패를 찾으려 하는 자는 학문할 자격이 없다. 내가 못 먹는 감은 남도 먹지 못해야 하므로 실패가 좋은 거다. 틀렸다. 성공이 좋아야 한다. 누구나 각자 자기의 우주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 하면 또 만화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평행우주가 어떻고 하는 사람도 등장하기 마련인데 대칭만 보고 호응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근본적인 태도에 관한 것이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라는 말이 있다. 우주는 손바닥 안에 있다.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바깥으로 무한히 달려가도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대칭을 구사하여 쪼개기를 무한반복했기 때문에 1미터도 전진하지 못했다. 안에서 밖을 보는 손오공의 세계관에서 밖에서 안을 보는 부처님의 세계관으로 갈아타야 한다. 빅뱅은 밖으로의 무한진출이 아니라 안으로의 무한대칭이다. 에너지는 안에서 일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에너지는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무한대칭을 구사하고 있다. 구조론은 연역이다. 무수히 말한 바 있다. 구조론은 깨달음이다. 연역을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은 통제가능성을 깨닫는 것이다. 이건 아는 게 아니고 깨닫는 것이다. 자동차와 마차를 분별하는 것은 앎이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깨달음이다. 에너지와 연역과 통제가능성은 동의어다. 방향은 둘이다. 확산방향과 수렴방향이 있다. 확산방향은 통제되지 않고 수렴방향은 통제된다. 두 개의 방향을 가질 때 그중에서 하나를 소거하는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