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실재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언제라도 답은 하나라야 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신과 피조물이 있는 셈이니 합쳐서 2다. 일원론이라는 대전제를 어긴다. 그러므로 신은 우주를 창조할 수 없다. 신은 다만 신 자신을 창조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은 신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그 바깥이 없기 때문이다. 바깥이 있으면 2가 되고 2가 되면 이미 신은 아니다. 그것은 신이 아니라 그냥 어떤 것이다. 한국과 브라질이 축구를 했는데 한국이 이겼다면 브라질은 진 거다. 한국팀이 이겼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브라질팀의 사정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계속 물어온다면 피곤하다. 에너지를 설명하면 물질은 이미 설명되어 있다. 물질을 설명하면 공간은 설명되어 있다. 공간을 설명하면 시간은 설명되어 있는 거다. 공간은 대칭의 세계다. 에너지가 내부적으로 대칭되어 두 방향을 가지는 것이 공간이다. 왼쪽이 있으면 오른쪽도 있다. 왼쪽만 있는 경우는 없다. 시간은 거기서 하나를 떼어낸다. 시간은 하나의 방향을 가진다. 우리는 동서남북과 상하를 알지만 그런 거 없다. 방향은 둘 뿐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의 과거나 미래는 없다. 과거는 흘러갔으니 없다.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없다. 과거와 미래가 없으므로 현재도 없다. 현재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있다. 있는 것은 모두 변한다. 그냥 제자리에 가만이 머무르는 것은 없다. 남산 위의 잠두봉이 가만있지 싶어도 주변의 변화를 열심히 따라잡고 있다. 부지런히 쫓아오고 있다. 변화가 있을 뿐이며 동서남북은 변화를 설명하는 방편이다. 동서남북 말고도 전후좌우, 위와 아래, 안과 밖, 중심과 주변, 수렴방향과 확산방향이 있다. 다양한 방향들은 사람들 사이에 약속을 정하는데 따른 편의에 불과하다. 그것은 존재의 사정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도 마찬가지다. 사람끼리 시간 약속을 맞추기 위해 과거니 미래니 현재니 하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과 물질은 모두 인간 마음에 있으니 공이다. 관념론은 인간의 사정일 뿐 자연의 사실이 아니다. 인간이 필요해서 적당히 명명했을 뿐 자연의 소프트웨어에 그것이 없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공간을 구현해 보자. 동서남북은 정하지 않아도 도출된다. 당신이 신이라 치고 우주를 창조함에 있어서 동서남북이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니 이런 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의사결정구조만 유의미하다. 계와 축과 대칭과 평형이탈에 대해서만 적절히 디폴트값을 지정해주면 시간과 공간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어 있다. 당신의 우주에서 3D 게임이 잘 작동해준다. 관념론이 허구이므로 그 관념의 대척점에 있는 실재론도 의심되어야 한다. 관념은 자의적인 인간의 입장에 불과하다. 그게 인간의 자기소개다. 누차 말했듯이 자기소개는 안 되는 거다. 관념의 대척점에 세워진 실재도 허구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관념에 대척하는 것이 허구일 뿐 실재는 실재대로 있다. 다만 인간의 바깥에 별도로 독립하여 있지 않고 덮어씌워져 있다. 관념론적 실재론이라는 것도 있고 서양철학에서는 여러 가지로 논의가 분분하다. 플라톤이 관념과 실재를 적당히 뒤섞어 놨다. 홀리면 허구의 수렁에 빠진다. 수렁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구조론으로 정리하자. 관념이 자의적인 인간의 입장이면 실재는 그 인간에 맞선 자연의 입장이다. 그런데 둘의 상호작용 때문에 논의가 꼬여 있다. 먼저 관념이라는 허구를 만들고 그 허구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실재라는 또 하나의 허구를 만든다. 거짓을 만들고 그 거짓을 때려잡는 또다른 거짓을 만든다. 창조설이 대표적이다. 창조설이란 한마디로 ‘아 씨바! 이렇게 인간들을 싸질러 놓고 어찌할겨? 니가 다 책임질겨?’ 이런 것이다. ‘오냐! 내가 책임질께.’ 그게 기독교의 신이다. 다분히 인간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지워버려야 한다. 과학영역에서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인간의 입장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한다. 관념과 실재는 동시에 지워져야 한다. 무엇인가? 서구인들은 인간의 희망사항을 반영하여 관념화된 신을 상상해 놓고 말이 안 된다 싶으니까 그 신의 피조물을 실재로 놓아서 얼버무렸다. 관념적 실재론이다. 구조론은 관념론이 아니며 실재론도 아니고 유명론도 아니고 구조론이다. 정확히 말하면 실재론이되 인간 바깥의 무언가를 상정하지 않는다. 독립된 바깥의 실재라는 것은 없다. 주역의 음양론 개념이나 불교의 공즉시색 개념은 관념과 실재를 동시에 부정한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에 버려진 촌스러운 생각이 서구에서는 근래까지 명맥을 이어온 것은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다. 물질적 실재를 인정한다면 기독교의 창조설에 가깝다. 실재를 부정해야 무신론이다. 인간 바깥의 어떤 대상을 인정하면 그것은 타자가 된다. 틀렸다. 실재라는 것은 여기에 있다는 뜻이다. 국소성의 원리다. 양자얽힘에 의하만 만리 밖에서 결정될 수도 있다. 비국소성이 작동한다. 실재가 완전 부정될 수 없고 국소성이 작동하는 물질의 실재론에서 비국소성이 작동하는 사건의 실재론으로 갈아타야 한다. 물질의 externalism는 부정되나 사건의 realism은 완전 부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르다. 서양철학의 모든 논의는 기독교의 수렁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 피조물이 있어야 한다. 실재론은 유물론과 통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슬쩍 비틀면 기독교의 신이 된다. 질료를 부정하고 형상만 남기면 유물론이 된다. 창세의 브라흐마를 무시하고 현세의 비쉬누와 미래의 시바로 대체하는 인도인의 방법과 같다. 신은 용도폐기다. 그러나 철저하게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먼저 인간을 세우고 그 인간의 대표자로 신을 세우고 그 신의 피조물로 유물론을 세우고 용도가 다한 신을 폐기한다. 교활한 돌려치기다. 구조론으로 보면 먼저 인간을 세운게 잘못되었다. 그게 자기소개다. 수요측 입장을 제안한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 들어가면 안 된다. 필요하다고 발명하면 안 된다. 발견이 옳다. 신이 창조했거나 인간이 관측하거나 간에 바깥에 무언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게 구조론이다. 안과 밖의 경계를 정하면 안 된다. 여기서 갈린다. 실재도 없고 관념도 없다. 있는 것은 사건이며 사건은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사건은 실재하나 다만 관측자 인간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 사건은 어딘가에 있지 않다.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바깥에 있지 않다. 바깥이라는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독립해 있지 않다. 사건을 일으키는 에너지를 조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은 신 바깥으로 나갈 수 없고 인간은 인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나라는 관념은 환상이다. 나가 없으므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경계 바깥에서의 독립된 실재도 없다. 사건은 모두 연결되어 커다란 하나를 이루었다. 서양철학의 실재론, 관념론, 유명론, 유물론은 논의가 어수선하다.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다. 서로 비판하며 표절하고 있다. 누구도 플라톤의 비뚤어진 이원론을 탈출하지 못했다. 맨 앞에 간 사람이 한 번 잘못된 길을 닦아 놓으니 뒤에 가는 사람들이 모두 전철을 밟아 엉망이 되었다. 동양에서는 일찌감치 밸런스 개념 하나로 해결했는데 말이다. 유물론은 창조론의 영향을 받아 퇴행했으니 불교의 공즉시색과 다르다. 밸런스를 추구하는 공자의 중용과 다르다. 그들은 대척하는 점이 다르다. 피조물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들은 인간 바깥에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신 바깥에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신 바깥에 무엇이 없으므로 신은 무엇이든 창조할 수 없다. 신은 오직 신 자기를 창조해갈 뿐이다. 구조론은 실재를 부정하지 않으나 실재론을 설명하는 인간 바깥의 어떤 독립된 존재를 부정한다. 안과 밖의 경계를 부정한다. 실재는 다만 사건이다. 사건은 모두 연결되어 일원적으로 존재한다. 사건의 실재는 시간과 공간의 어딘가에 있지 않으므로 인간 바깥에 없으며 신 바깥에 없다. 국소성이 작동하는 물질일 수 없다. 만유는 연결되어 하나다. 네트워크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 내 컴퓨터와 독립되어 바깥에 뭐가 있는 게 아니다. 네트워크는 연결되었을 때만 기능한다. 관념론은 세상을 인간 안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시도다. 무리다. 구조론에서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다. 인간의 입장은 배제가 맞다. 마찬가지로 인간 바깥에 무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우주가 있을 리 없다.
인간 바깥의 물리적 공간 혹은 시간의 어느 위치에 물질적인 무언가 있을 리 없다. 신조차도 신 바깥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판에 물질이든 공간이든 시간이든 어디든 뭐든 있을 리가 없다. 경계는 없다. 대척할 수 없다. 인간이 대척함으로써 경계가 생겼다. 왜 대척하는가? 자기소개 하는 것이다. 나를 의사결정의 단위로 삼으려는 시도다. 구조론은 언제나 전체가 먼저다. 우주 안에 내 있다. 신 안에 내 있다. 내 안에 우주를 집어넣지 말라. 나를 앞세우지 말라. 세상과 나를 대척하지 말라. 나를 버리고 넘어서라. 사건으로 보면 하나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원래 딱 분리되지 않는다. 하드웨어라는 것이 신의 관점에서는 소프트웨어다. 어떤 경계의 구분이든 모두 극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