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의 세계관을 얻어라 쓰다보니 스케일이 커졌다. 조금 더 이야기를 보태자. 세상은 에너지다. 단지 에너지에 주목하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에너지의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추상적 세계관이다. 에너지는 물질이 아니라는 점이 각별하다. 세상은 에너지로 되어 있다고 하니 '아! 에너지라는 물질로 되어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에너지는 추상개념이라는 점이 다르다. 에너지는 일의 원인이다. 결과에서 원인을 보는 게 추상이다. 추상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양의 음양론이나 그리스의 카오스와 코스모스로 보는 세계관은 추상적인 세계관이다. 반면 서양의 4원소설은 물질적 세계관이다. 동양의 5행설은 물질적 관점과 추상적 관점이 공존하고 있다. 상생상극설은 물질로 출발하나 대칭을 따르는 점에서 추상적이다. 목화토금수는 물질인데 여기에 색깔과 방위를 갖다 붙이면 추상이다. 띠도 그렇다. 개띠나 말띠에 이름으로 붙은 개와 말은 물질적 존재다. 그러나 띠는 원래 숫자를 나타내는 점에서 추상이다. 그냥 숫자일 뿐 동물과 상관없다. 쥐띠니까 성격이 쥐를 닮았을 거라는 식이면 곤란하다. 무엇인가? 추상은 앞뒤를 잰다. 그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 점이 각별하다. 이것에 의해 저것이 결정된다는 것은 추상적 관점이다. 그냥 이건 이거라는 식은 물질적 세계관이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알게 되는 것은 추상적 세계관이고 하나하나 낱낱이 조사하는 것은 물질적 세계관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은 분명 추상적 세계관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추상적 세계관이 있었다. 그런데 뉴턴 이후 물질적 세계관으로 바뀌었다. 추상이 더 과학적 사고다. 그런데 물질로 퇴행해 버렸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이미 물질을 지워버렸는데도 여전히 인간은 물질에 사로잡혀 있으며 오히려 추상에서 물질로 퇴행해버린 것이다. 주역은 추상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주역은 한마디로 밸런스다. 천칭저울 곧 밸런스야말로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되는 것의 대표라 하겠다. 한국팀과 브라질팀이 축구를 했는데 한국팀이 이겼다면 브라질팀은 진 거다. 내가 분명히 한국팀이 이겼다고 말해두었는데, 그런데 브라질팀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면 안 된다. 그런 멍청이는 패버려야 한다. 추상이 안 되는 자라 하겠다. 불교의 깨달음과 주역의 가르침 그리고 플라톤의 지혜는 2500년 전에 이미 세상을 밸런스로 설명하려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가 도로 퇴행해 버렸는가? 왜 인류는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는가? 왜 인간은 단체로 바보가 되어버렸는가? 뉴턴의 권위에 넘어간 것이다. 뉴턴은 독실한 기독교도에 연금술사였다. 그렇다. 뉴턴은 신을 죽이지 못했던 거다. 신의 창조물인 물질에 매달리는 게 이상하지 않다. 신은 완벽하므로 물질은 완벽하게 창조되어야 한다. 구조론은 물질을 부정한다. 물질을 부정한다는 말은 신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창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렇게 되면 저것이 저렇게 되는 추상원리가 스스로 작동하여 가만 놔둬도 스스로 알아서 우주를 조직하는 판에 창조할 일이 뭐 있겠는가 말이다. 세상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일정한 조건에서 스스로 작동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확실히 추상의 결실이지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라는 세 가지를 일의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이걸로 신은 수월해졌다. 시간과 공간을 각각 창조한 다음 거기다 물질을 태워야 한다면 상당히 빡센 작업이다. 공돌이를 갈아넣어야 할 판이다. 일은 수월해졌다. 상대성이론으로 보면 물질이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라서 하나만 창조해도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완벽성에 대한 믿음은 공고해졌다. 추상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얼개를 건드리지 않았다. 자신이 뉴턴의 단점을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추상적 세계관으로 보면 세상은 백퍼센트 수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 이것과 저것이 별도로 있지 않으니 언제나 이것이 저것을 결정한다. 둘은 일의적으로 결정된다. 사과와 바나나가 별도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이게 사과면 저건 바나나다. 그런 논리적 당위를 계속 추적해 간다. 구조론이 맨날 하는 소리가 그건데 여전히 물질적 세계관에 빠진 채로 구조론을 대한다면 피곤하다. 하나를 배우면 열은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그게 수학이다. 1+1을 가르칠 뿐 10+10은 가르치지 않는다. 세상은 에너지로 되어 있다. 수학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에너지는 일정한 조건에서 스스로 작동하는 힘이다. 돌멩이를 던지려면 사람의 팔힘을 써야 한다. 가솔린은 일정한 조건에서 스스로 폭발하는 점이 다르다. 우주는 스스로 작동한다는 말이다. 수학은 완벽하지만 수는 완벽하지 않다. 수는 센다는 뜻이다. 센다는 것은 일대일 대응을 의미한다. 손가락 하나와 숫자 1이 대응된다. 모두 이렇게 대응되는가? 아니다. 대응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항상 나머지가 있다. 확률로 얼버무려야 한다. 수학은 모순된 것이며 그 모순이야말로 에너지를 작동시키는 힘이다. 모순은 스스로 붕괴하기 때문이다.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 북극보다 북쪽에 무엇이 있나? 아무것도 없다? 아니다. 더 높은 차원이 있다. 물질적 관점은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막다른 곳에서 끝난다. 사건은 항상 더 위가 있다. 막다른 곳으로 가면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간다. 북극은 끝이다. 그러나 평면의 끝일 뿐이다. 북극에서 나침반은 지구중심을 가리킨다. 지구 핵이다. 평면에서 입체로 도약하는 것이다. 입체에서 밀도로 도약할 수 있다. 우리의 시공간개념은 평면개념이다. 더 높은 세계가 있다. 부분은 전체로 도약한다. 점이 다한 곳에 선이 있고 선이 다한 곳에 각이 있고 각이 다 한 곳에 입체가 있고 입체가 다한 곳에 밀도가 있다. 우주의 끝까지 가면 또 다른 세계가 있다. 공간의 어디가 아니라 사건의 어떤이다. 우리는 우주의 처음을 사유한다. 처음은 시간의 처음이고 시간은 선이다. 선에서 각으로 도약하면 풀린다. 시간은 공간으로 도약한다. 우주의 처음으로 가면 그 앞은 없지만, 그 옆은 있다. 빅뱅은 한 점에서 시작되고 그 한 점은 다른 둘의 충돌에서 도출되기 때문이다. 어떤 둘의 충돌지점이 빅뱅의 특이점이다. 처음의 시간적 앞은 없고 공간적 옆이 있다. 앞으로 더 못가면 옆으로 가야 한다. 옆으로 가면 무엇이 있나? 다른 사건이 있다. 이 게임에서 저 게임으로 갈 수 있다. 우리 우주 밖의 다른 우주는 어떤 공간에 있다. 선의 시간과 각의 공간을 넘어 입자와 질로 도약해야 한다.
|
" 7행 창도되어→ 창조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