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탄생을 결정한 인간은 없다. 인간은 부모가 쏜 화살에 의해 날아가고, 사회가 쏜 화살에 의해 날아간다.
자신이 사건을 조직하기 전에는 A나 B포지션에서 친구나 경쟁자를 바라본다. 상대성의 영역이다.
친구를 이기고 경쟁자를 이기면? 사이가 멀어진다. 허무해진다. 부자는 빈자에 의지하고, 승리자는 패배자에 의지한다.
깨달아야 할것은 토대와 토대의 진보다. 알고보니 나는 공동체로부터 파견나왔고, 그 공동체가 가는 방향성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토대가 발전하는 방향성은 비가역적이다. 왜 민주주의인가? 공동체가 균일할때 구성원의 총역량을
뽑아낼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덜 균일한 공동체를 이길수 있기때문이다. 위치에너지를 잘 조직해야 운동에너지를
오지게 쓸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팀플레이가 발전할수록 뽑아쓸께 많기 때문이다.
보통은 A포지션에 서서 B포지션에 세상을 둔다. 세상이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하지. 그렇다면? 등뒤가 허전하다.
빽이 없다. 상대가 실수할때는 이길수 있지만, 실수를 하지않으면 이길수 없다. 저절로 약해진다. 만만한 것만 찾기
시작한다. 부자가 되서 빈자를 치려고 하고, 엘리트가 되서 대중을 치려고 한다. 약자를 통제하려 한다.
토대의 관점, 신의 관점, 공동체의 관점에서 '나'라는 체스말을 둘 수 있어야 한다. 등 뒤에 토대가 있으면, 에너지의
우위를 달성할수 있다. 등 뒤에 토대가 있으면 실수해도 토대가 도와준다. 문재인이 실수해도 대중이 도와준다.
왜? 방향성이 맞기 때문이다. 그것이 토대의 이익이 되기때문이고 대중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라이벌 기업과의 마케팅 전쟁에 주목하기냐, 고객의 환경변화에 주목하기냐다. 고객의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면 좀 부실해도 고객이 용서해준다. 왜? 그것이 고객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축에 서서 대칭을 바라봐야 올바르다. 김대리와 이대리를 경쟁시키는 것은 회사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고,
애플과 삼성을 경쟁시키는 것은 소비자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토대의 토대의 토대를 찾아 최후에 신을 만나게 된다. 사회가 가는 방향을 알고 역사가 가는 방향을 알려면
공부를 해야함은 어쩔 수 없다. 토대를 발전시키는 방법은 팀플레이고, 팀플레이는 서로 손발의 타이밍을 맞춰야하고,
타이밍에는 시간제한이 있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