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이냐 연역이냐 깨달음은 ‘연역적 사유’다. 연역은 툴tool을 사용하므로 특별히 훈련해야 한다. 수학이라도 처음에는 주먹구구로 셈하지만, 어느 정도 레벨이 올라가면 반드시 공식을 외어야 하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일정한 공식에 대입하여 단번에 풀어내는 사유방법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다. 깨달음이 쓰는 연역의 툴tool은 구조론이 제공한다. 구조론의 세부내용을 몰라도 깨달음의 툴을 사용할 수 있다. 컴퓨터의 원리를 몰라도 이메일을 보낼 수는 있다. 자동차의 작동원리를 몰라도 운전면허는 딸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해도 툴을 빌어쓸 수 있다. 단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내가 이메일을 보내도 상대방이 받지 못하면 실패다. 내가 운전대를 잡아도 친구가 조수석에 앉으려 하지 않으면 실패다. 많은 사람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와야 ‘깨달음의 스타일’이 먹힌다. 깨달음이 우리의 삶 안으로 깊숙히 들어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 언젠가는 인류 모두가 이 방법을 쓰게 된다. 총은 7세기에 그 원시형태가 출현했지만 전쟁에 쓰인 것은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16세기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400년이 지나고서야 총이 칼과 활을 전쟁터에서 완전히 퇴장시켰다.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패러다임의 문제가 장벽이 된다. 바꾸려면 학계의 시스템까지 다 바꾸어야 하는 문제다. 인류의 의사결정 방식을 통째로 갈아엎어야 한다. 혁명이 필요한 거다. 그런데 구조론이 아니라도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뀔 조짐이 있다.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려 한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로 입증된 것은 바둑의 상부구조가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다는 거다. 인류는 아직 바둑을 잘 못 둔다. 바둑이 가야할 길이 멀다. 알파고가 먼저 가서 인간을 손짓해 부르는 상황이다. 알파고도 중대한 약점을 드러냈다. 인간의 뇌구조를 모방했지만 여전히 구조를 모른다. 일본로봇 아시모군이 이족보행에 도전한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동작이 어설프다. 혼다가 구조를 모르기 때문이다. 근래에 드론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단지 이목을 끌었을 뿐이다. 인류는 도처에서 구조에 부딪혀 있다. 귀납의 한계다. 연역하지 않으면 구조의 마지막 천장을 뚫지 못한다. 귀납은 모방이다. 연역은 복제다. 표피를 모방하지 말고 원리를 복제해야 한다. 귀납으로는 알파고가 인류를 이기지 못하고, 휴머노이드 로봇이 폼나게 달리지 못한다. 그렇다. 지금 도처에서 구조론을 부르고 있다. 그런 시대다. 응답해야 한다. 언젠가 모두가 가게 될 길을 먼저 가면 즐겁다. 구조론이 쓰는 연역의 툴은 ‘일’을 복제한다. 일을 결정하는 것은 에너지의 결이다. 에너지의 결은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이다. 알파고는 정책망과 가치망을 쓴다. 정책망이 먼저 시나리오를 추출하면 가치망이 평가하는 순서가 결이다. 열역학 2법칙이 열역학 1법칙에 앞선다는 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 다섯 개의 매개변수를 쓴다. 질에서 확산의 방법으로 경우의 수를 모으고, 입자에서 수렴시켜 시나리오를 추출하고, 힘에서 평가하여 의사결정하고, 운동에서 실행하면 량에서 결과값이 제출된다. 알파고가 아니라도 하다보면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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