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은 손을 놓으면 입자는 사라진다.
우리는 입자만 볼 수 있다.
에너지가 손잡는 방식이 존재를 결정한다.
입자는 인간의 편의일 뿐 실체가 없고 위치도 없다.
입자는 없지만 있는 걸로 친다.
입자가 쌍을 이룰 때 명확해진다.
실제로 있는 것은 입자가 아니라 화살표다. 입자가 없으므로 결정론은 틀린 것이다. 그러나 일정한 조건에서는 결정론이 맞는 것처럼 작동한다. 약속과 같다. 두 사람이 서로 약속하고 약속을 지키는 동안에는 약속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죽으면 약속은 없는 것으로 된다. 입자적 상황, 결정론적 상황은 분명히 있으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확대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그 또한 연출된 것이다. 영화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동안만 있는 것이다. 극이 끝나면 관객은 돌아가고 필름도 망실된다. 영화는 사라진다. 그것은 원래 없었던 것이다. 존재는 굳세게 버티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에서 잠정적으로 연출된 것이다.
입자 중심의 세계관을 던져버리면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입자 개념은 길을 가다가 어떤 벽을 만났을 때의 좌절감이 각인된 것입니다. 대상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이 '있다'고 여깁니다. 존재감을 느끼는 거지요. 그래서 '쪼갤 수 없는' 알갱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신의 관점에서 창조로 보면 우주는 연출된 것이며 '쪼갤 수 없다'는 것은 없습니다. 존재는 에너지의 매듭이며 풀면 풀리고 꼬면 꼬입니다. 꼬아서 세상을 이루고 풀어서 문득 사라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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