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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8360 vote 1 2015.05.26 (14:34:00)

    최대다수의 최대권력


    모든 사상의 결론은 같다. 어떤 철학자가 무슨 주장을 하든 뒤에 따라붙는게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피해갈 수 없는 실천의 문제. 관문으로 딱 버티고 있다. 그렇다. 철학의 답은 정해져 있다. 정해진 답을 찾아가는 논리를 발굴하는 것이 철학사상의 역할이다. 색다른 철학이나 사상은 없다.


    단지 부분을 보느냐 아니면 전체를 보느냐, 단기전이냐 아니면 장기전이냐, 세력전이냐 아니면 생존전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큰 철학과 작은 철학이 있을 뿐 철학의 근본은 같다. 집을 지어도 큰 집이냐 작은 집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추위를 막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집의 본질은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 누구라도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답은 보나마나 ‘권력’이다. 그렇다.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사상의 결론은 한결같이 ‘권력’이다. 나머지는 주워섬기는 서론에 불과하고, 철학의 본론은 권력이다. 어느 코스로 가든 결말은 같다.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있을 가능성은 없다.


    철학은 권력이다. 문제는 누가 권력을 쥐면 누구는 권력을 잃게 된다는 거다. 그래서 계산이 복잡해진 것 뿐, 철학은 결국 인간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문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아니라 최대다수의 최대권력이다. 닫힌계라면 제로섬을 피할 수 없고 외부로 빼서 타개하는데 묘미가 있다.  


    권력의 표상은 신神이다. 옛사람이 신을 숭배한 이유는 신에게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은 섬기는게 아니라 창출하는 거다. 권력창출이다. 다만 그 권력을 누가 탈취해가지 못하게 추상의 개념 속에 가두어 놓은 것이 절묘하다. 세상의 권력이 작동하는 모든 곳에 신의 그림자가 숨어 있다. 


    권력은 예측불가능성에서 나온다. 예측할 수 있다면 그 자에게 권력이 있다. 주술사는 권력이 있다. 점을 치고 예언을 한다. 그리스 역사만 봐도 점 이야기가 반이다. 델피의 신전에서 신탁을 했다니 어쨌다니 하는 식이다. 왕은 권력이 있다. 수학자를 동원하여 나일강의 범람을 예측한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일식과 월식을 맞추기도 한다. 제우스 신의 권력은 벼락의 예측불가능성에서 나온다. 태양은 아침마다 뜨는데 벼락은 심심하면 뜬다. 비유하면 태양신 ‘라’는 공무원 같고 제우스 벼락신은 벤처창업자 같다. 공무원보다 벤처기업 CEO가 더 신랑감으로는 더 인기가 있다.


    석가는 무엇인가?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듯이 석가는 신의 진리를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을 위해 신의 권세를 훔쳐낸 거다. 그는 최초의 인본주의자다. 인본주의는 근대와 통한다. 봉건시대와 근대를 가르는 기준은 신권이냐 인권이냐다. 갈림길에 마키아벨리가 있다.


    중국이면 한비자다. 마키아벨리와 한비자는 우울하다. 그는 ‘의사결정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하고 최초의 인간선언을 했지만, 그가 말하는 인간은 권력의 술수에 놀아나는 허약한 인간이었다. 한비자도 마찬가지. 그는 인간의 본질을 꿰뚫었지만 권력에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한비자는 ‘인간은 권력에 취하여 죽는다’고 예견했지만 자신을 살리지 못했다. 근대과학 역시 우울하기는 마찬가지. 인간이 의사결정의 주체라고 선언했지만 그 인간을 통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인권이 신권에 밀린다. 인간 개개인은 의사결정에 실패한다. 인간은 집단에 의사결정을 위임한다.


    종교가 권력을 위임받는다. 인간은 신에게서 어렵게 돌려받은 권력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 신에게 돌려주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지식인은 계몽의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권력은 상당부분 인간의 사회적 본능에 속한 문제이므로 계몽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다만 깨달아야 한다.


    석가의 가르침은 둘이다. 고집멸도 사성제와 연기법칙이다. 사성제는 인간이 의사결정 주체라는 선언이며, 연기법은 신도 건드리지 못하는 자연법칙을 내세운다. ‘1+1=2’와 같은 수학법칙은 신도 허물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리에 의지할 때 인간은 권세를 누릴 수 있다. 권세가 깨달음이다.


    불안해하지 않고, 쫄지 않고, 자기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고, 쪽팔리지 않고,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의사결정하게 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권세가 있을 때 가능하다. 공자는 석가가 찾아낸 권세를 구체화 했다. 선배가 후배를 통제할 수 있게 유교다. 권력을 구석구석 널리 전파한 거다.


    원래는 제왕만이 권세를 누렸지만, 공자에 의해 도덕과 윤리를 아는 지식인 혹은 예의를 아는 문명인은 누구라도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위태롭다. 정치권력의 압도적 힘 앞에서 윤리와 도덕은 허약하기만 하다. 노자는 공자의 정치권력을 통제하는 자연권을 발견했다.


    권세는 좋은 것이나 휘두르면 나빠진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통제하고 그 윗사람은 누가 통제하는가? 여럿의 집합이 통제한다. 그것이 자연권이다. 의사결정은 독립적인 1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2만 되면 의사결정을 못한다. 새정치가 의사결정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이어야 하는데 친노와 비노로 나뉜 2라서 통제가 안 된다. 유권자는 다수다. 어떤 상황에서 다수 유권자가 1로 행세하게 된다. 그럴 때가 있다. 군중이 한 방향을 보고 움직일 때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어떤 외부로부터의 환경변화를 계기로 군중이 일제히 움직여갈 때는 제왕도 통제된다.


    결국 인간은 의사결정권을 원하나, 권세는 쓸수록 나빠진다는 모순이 있다. 윗사람이 돈을 쓰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거역한다. 윗사람이 돈을 쓰면 보고 있다가 그 돈이 바닥날 때 덮친다. 인간은 배반한다. 그것이 비정한 권력의 본질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와 한비자는 우울할 수 밖에 없다.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죽는다. 그러므로 권력은 순환되어야 한다. 부단히 옮겨가야 한다. 목동이 양떼를 몰고 초원을 옮겨다니듯, 농부가 지력이 쇠하면 밭을 묵히듯 권력도 이리저리 옮겨가야 한다. 석가는 인도인이다. 중국인의 자존심이 놔두지 않는다. 중국으로 옮겨야 한다.


    육조 혜능 출현이다. “우리가 왜 인도인 말을 들어야 하지?” 이 생각이 전파되어 망했던 유교가 되살아났다. 유교에 불교를 가미한 주자의 성리학이다. 대개 그런식이다. 부족민의 존 프럼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왜 우리를 괄시하는 이방인 선교사의 말을 들어야 하지? 권력욕의 발동이다.


    선교사의 영향으로 권력의 존재를 알아챈 그들이, 스스로 권력창출을 시도한 것이 부족민의 카고 컬트다. 한국 기독교도 마찬가지. 유교시스템을 상당히 가미했다. 권사니 집사니 하며 본고장에 없는 기묘한게 있다. 선후배 따지는 유교관습을 기독교에 끼워넣었다. 유교는 권력을 나눠가진다.


    이 모든 논의의 결론은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다. 인간이 권력의 주체라는 말은 초딩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의 어디에서 권력이 나오느냐다. 권력은 자연에서 받는다. 원래 권력은 태양에서 나온다. 태양이 곡물을 키우지 않으면 인간도 힘없다. 권력은 자연이 일방적으로 주는 거다.


    정靜이냐 동動이냐다. 정은 왕이니 귀족이니 평민이니 노예니 하는 구분이다. 남자니 여자니, 전라도니 경상도니, 백인이니 흑인이니 하고 칸을 나누면 에너지의 낙차가 생겨 권력이 탄생한다. 권력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인간을 차별하는 것이다. 이는 보수꼴통이 쓰는 악랄한 방법이다.


    보수꼴통뿐 아니라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알게 모르게 이 방법을 쓰고 있다. 동은 신분상승을 인정하는 것이다. 노예가 평민되고 평민이 귀족된다. 노예가 해방되어 이제 모두 평등해졌으니 되었다고 떠드는 지식인들이 많은데 사실 그들은 모르는 거다. 왜 진보는 항상 선거에 지기만 하는지.


    한겨레나 오마이가 왜 항상 조중동에 밀리는지 말이다. 권력을 없애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노예해방의 의미는 권력의 획득에 있다. 권력을 없애버려서는 그 권력을 얻을 수 없다. 모두가 평등해져서 권력이 사라졌다면 해방이 의미가 없다. 차별을 없애면 안 된다. 그러므로 다시 차별해야 한다.


    지로 무지를 차별하고, 선으로 악을 차별하고, 빛으로 어둠을 차별하고, 진리로 비진리를 차별하고, 오유로 일베를 차별하고, 효율로 비효율을 차별하고, 승리로 패배를 차별해야 한다. 권력은 차별에서 나온다. 정당한 권력은 인정하라. ‘일베도 인간인데’ 하고 떠드는 자들은 처단되어야 한다.


    ◎ 석가 –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권력을 가져왔다.
    ◎ 공자 – 선배가 후배에게로 권력을 전파하여 널리 보급했다.
    ◎ 예수 – 권력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절묘하게 양다리를 걸쳤다.
    ◎ 마키아벨리와 한비자 – 권력의 메커니즘을 보았으나 통제하지 못했다.
    ◎ 노자 – 권력의 정점에 선 독재자를 통제하는 자연권을 발명했다.


    권력의 딜레마는 권력이 없어도 안되고 행사되어도 곤란하다는 점이다. 권력이 없으면 사회는 분열하여 멸망하고, 권력이 행사되면 인간이 다친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얄궂은 권력이 필요하다. 예수다. 예수는 신의 권력을 인간에게 가져왔다. 인간에게 주지 않고 다시 신에게 되돌렸다.


    이거 묘수다. 신은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인간은 복종한다? 이건 실패다. 단지 인간을 벌하기만 하는 신은 필요없다. 권력은 인간에게로 이양되어야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권력이 이양되면 독재자가 출현한다. 아뿔싸! 짜르를 타도했더니 스탈린이 나타났다. 고약하다.


    권력을 신에게만 두면 인간은 비참해지고, 인간에게 주어지면 어떤 인간이 그 권력을 독식한다. 그래서 ‘삼위일체’라는 반신반인의 모호한 권력 탄생이다. 권력을 인간에게 주되 그 인간은 추상적 인간이어야 한다. 얼굴은 인간이되 영혼은 신이다. 인간 욕망의 은밀한 부분을 제대로 짚었다.


    그렇다면 구조론의 정답은? 동動이다. 권력은 인간에게 있지만 정靜에 없고 동動에 있다. 귀족이니 평민이니, 혹은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신분에 없고 혁신에 있고, 창의에 있고, 승리에 있다. 분명히 권력은 있다. 그리고 작동한다. 잠 자는 자에게는 권력이 없다. 자는 자의 몫은 당연히 없다.


    외출한 사람의 몫은 있다. 외출했다 돌아온 사람이 ‘나 없는 사이에 니들끼리 나눠가졌지? 내 몫 내놔.’ 하고 태클 들어오면 줘야 한다. 그러나 자던 사람이 ‘나 자는 사이에 떡 먹었지? 내 떡 내놔.’ 하면 안 준다. 누가 잠 자랬냐고? 모든 움직이는 인간에게는 권력이 있다. 살아서 움직이기다.


    노력하고, 창의하고, 혁신하고, 모험하고, 투자하고, 도전하는 자에게 권력이 있으나 자는 일베는 없다. 문제는 인간의 폭주를 통제할 수 있느냐다. 가능하다. 석가의 법이다. 동은 동으로 막는다. 인간의 동은 자연의 동으로 막는다. 인간이 움직여 권력을 만들면 자연이 움직여 법칙으로 막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탐욕은 제어되는 것이다. 모든 철학사상의 충돌은 이 둘의 시간차에서 빚어진다. 인간이 탐욕했는데 자연의 법칙이 뒤늦게 나타나면? 이명박 된다. 이명박의 탐욕이 사대강을 만들었는데 그 사대강의 비리가 뒤늦게 탄로나니 그 사이에 시간차가 있어서 먹튀가 발생하는 거다.


    그러나 이는 짧게 본 것이고, 길게 보면 제 2의 이명박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법령을 정비해서 막을 수 있다. 인간이 동動하므로 법도 동動해야 한다. 헌법도 안 되면 바꿔야 한다. 임금도 잘못하면 갈아야 한다. 국가도 잘못하면 망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동이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연은 정靜이어야 했다. 나일강 홍수는 일정한 시점에 일어나야 했다. 태양은 일정한 시점에 떠야 하고, 계절은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여야 한다. 기상이변 뿐만 아니라 모든 변화는 좋지 않다. 그래서 양陽을 남자로 놓고, 음陰을 여자로 놓아서 음을 차별한다. 그러면 자식은 누가 낳느냐고.


    변화가 없으면 생명은 태어나지 않는다. 모두 죽는 수 밖에. 자연은 동이어야 한다. 낳는 음이 좋은 것이다. 자연은 동이므로 인간도 동이어야 하며, 신이 동이므로 인간도 동이어야 한다. 팽이는 움직일 때 편안하고, 자전거는 달릴 때 안정되고, 수영은 헤엄칠 때 편안하다. 멈추면 죽는다.


    자전거가 멈추면 죽는다. 수영하다 멈추면 죽는다. 잘 돌던 팽이가 멈추면 죽는다. 인간은 잠을 잘 때도 호흡을 멈출 수 없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불은 꺼지지 않는다. 동의 상태, 에너지가 충전된 상태, 열정이 가득한 상태, 설레이게 흥분한 상태, 사랑을 느끼고 상대방에게 끌리는 상태가 좋다.


    들뜬 상태가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정의 상태, 멈춘 상태는 죽은 것이다. 배터리가 고갈되고, 열정이 식고, 마음이 설레이지 않고, 상대방에게 끌리지 않으면 그것이 도리어 위태롭다. 인간은 불과 같아서 불타오르거나 아니면 죽거나다. 그것이 권력의 본질이다. 권력은 동, 인간도 동이다.


    동은 동으로 통제한다는 것이 동서고금 모든 철학의 최종결론이다. 석가나 공자나 예수나 노자나 마키아벨리나 모두 권력을 이야기한다. 이들 낱낱을 떼놓고 보면 인간은 희망이 없다. 권력이 없으면 인간은 비참하고, 권력이 있으면 사람이 다친다. 권력 앞에서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다.


    한비자는 우울하다. 자신의 죽음을 알지만 피하지 못한다. 그런데 말이다. 석가의 권력창출, 공자의 권력보급, 예수의 권력제어, 마키아벨리의 권력학습, 노자의 권력순환을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연결시키면 하나의 완성된 모습이 드러난다. 비로소 통제된다. 통제될 때 권력은 아름답다.


    권력에 의해 인간이 통제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 의해 권력 자체도 통제되어야 한다. 이에 권력의 조절장치가 발견된다.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다. 결론은 능동이냐 수동이냐다. 권력은 오직 능동에서 나온다. 수동은 권력이 없다. 잠자코 움직이지 않으면 대통령 할애비라도 권력이 없다.


    7시간 실종된 자는 권력이 없다. 창의하고, 혁신하고, 운동할 때 권력이 있다. 권력은 인간의 동에서 나온다. 어느 순간 내 가슴이 뜨거워졌다면 권력이 탄생한 거다. 동으로 동을 막는다. 권력으로 권력을 막는다. 자연권으로 독재를 막는다. 권력이 아름다운 연주가 된다. 그 안에 흥이 있고 망이 있다.


    오름이 있고 내림이 있다. 고저가 있고 장단이 있다. 흥겨움이 있고 의분이 있다. 인간이 권력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든 수동이 아니라 능동에 점수를 줘야 한다. 나간 자의 몫은 있어도 자는 자의 몫은 없다. 모두에게 몫이 있으니 나누며 때로 합친다.


    모여서 태산을 이루고, 흩어져서 축제를 벌인다. 권력에 중독되지 말고, 권력에 제압되지 말고, 권력으로 오만하지 말고, 권력 앞에 비굴하지 말고, 정 모르겠으면 움직여라. 움직이면 나란해져서 저절로 정렬되고 정렬되면 통제된다. 게임 안에서 권력은 통제된다. 그리고 멋진 소리를 토해 낸다.


    괴로워하지 말라.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권력상실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통제하지 못하면 대신 신호등이 통제한다. 내가 인위로 대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자연이 진리로 통제하여 낸다. 운전자에게만 핸들이 있는게 아니고 도로에도 핸들이 있다.


    인간이 신의 비위를 맞추지 못했다고 괴로워 말라. 신도 인간의 비위를 맞출 책임이 있다. 내가 삑사리 냈다고 괴로워 말라. 지휘자도 삑사리를 낼 때가 있다. 인간의 괴로움은 약자가 권세를 잃고 강자인 신의 비위를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강자에게도 책임이 있고 삑사리가 있다.


    인간은 동적 존재이다. 자연도 동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신도 동적 존재이다. 인간에게 여유가 있듯이, 신에게도 여유가 있다. 인간에게 권세가 있듯이 신에게도 권세가 있다. 인간에게 각자의 재량권이 있듯이 신도 적절히 눈감아주는 재량권이 있다. 인간이 인간적이면 신도 인간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신은 무엇일까? 권력 메커니즘 자체가 신이다. 권력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괴로움은 없다.



DSC01488.JPG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자신을, 혹은 신의 역할을 고정시켜 놓고, 능동이 아닌 수동에 서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능동에서 나옵니다. 곧 죽어도 선빵을 날려야 합니다. 우선권을 쥐어야 합니다. 선점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먼저 침발라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움직여야 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어떤 고정된 것에 고정된 것을 맞추기가 쉬워 보입니다. 퍼즐을 맞추더라도 퍼즐판을 고정시켜놓아야 맞추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지구는 둥글고 우리는 운명적으로 월미도 디스코팡팡의 DJ 용이처럼 돌아가는 놀이기구 위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해치워야 하는 신세입니다. 운명이라면 즐기는 수 밖에.


프로필 이미지 [레벨:30]ahmoo

2015.05.26 (15:30:13)

인류 문명 전체를 관통하는 통렬한 서문!

프로필 이미지 [레벨:9]무득

2015.05.26 (17:02:23)

감사합니다.

 

한국 기독교는 유교+무교가 합쳐졌다고 봅니다.

신과의 만남은(불신 지옥) 오직 솟대 지역(성역)에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측면에서...

프로필 이미지 [레벨:6]id: 15門15門

2015.05.26 (17:57:43)

"괴로워하지 말라. 모든 괴로움은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권력상실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통제하지 못하면 신호등이 통제한다.
 내가 인위로 대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자연이 진리로 통제하여 낸다. "
 
읽고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글이네요.
검색하기 쉽게 댓글로 스크랩 좀 할까 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1]까뮈

2015.05.26 (22:32:12)

빵 뚫리는 시원함~~~

[레벨:14]해안

2015.05.27 (00:11:48)

그네는 , 

정[당선]이 됐기에


그 순간, 동은 없어지고 그 때, 그는  사실 죽었다!

[레벨:7]새벽이슬2

2015.05.27 (09:44:43)

"권력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괴로움은 없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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