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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6503 vote 0 2009.10.13 (20:12:22)

일본의 갈라파고스 신드롬
'지난주 동영상 강의 해설입니다.'
 

내 안의 아름다움

내 안 감추어진 아름다움 끌어내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 아름다움 코드로 소통함이 미학이다. 우리 인생의 무수한 장면들 중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눈부시게 아름다울 수 있다면 성공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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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근거는 내 안의 완전성. 내가 먹고 싸며 기운낸다. 그 사이에 에너지 순환 일 사이클이 있다.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한 해가 되듯, 하나의 일이 시작하고 끝맺는 완전성 있다.

시작과 끝, 탄생과 죽음, 입력과 출력, 인풋과 아웃풋. 거기서 (A=B)의 논리칙, 곧 ‘A면 B다’, ‘먹으면 싼다’는 방정식 유도된다. 그 논리의 연쇄고리로 전개하여 세상 모두를 한 줄에 꿰어낸다.

그것으로 표준을 삼아, 기초 세우고, 원칙 밝히고, 상식을 살찌워 세상 모두의 포지션을 낱낱이 지정해준다. 그렇게 상부구조를 형성하여 간다. 형이상학이다. 인문학의 최종결론이라 할 미학이다.

이를 자연에 대입하여 도출한 사실이 과학이다. 과학은 하부구조에 불과하다. 과학도 필요하지만 2라운드. 미학이 과학에 선행한다. 그러나 미학은 어렵다. 과학의 산업화 쉽고 미학의 르네상스 어렵다.

신인왕이 MVP보다 어렵듯이, 앞에서 표준 세우기 어렵고 뒤로 모방하여 성적내기는 쉽다. 김성근 감독 새로운 야구를 선보임은 어렵고, 김경문 감독 김성근식 야구로 김성근을 이김은 쉽다.

과학이 쉽다. 배우기 쉽고 모방이 쉽고 따라잡기 쉽다. 미학은 어렵다. 한국에서 산업화 되는데 르네상스 안 된다. 역사가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무엇이겠는가? 한국미학의 완성, 한국에서의 르네상스다.

골치아픈 미학 내버려두고 과학으로 바로가면 어떨까? 편법으로 갈 수 있고 요령으로 갈 수 있다. 한 참은 잘간다. 꼴찌도 벼락치기 해서 2등까지는 잘 따라잡는다. 오늘날 중국처럼 잘 쫓아온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2등은 쉽게 되는데 1등은 좀처럼 안 된다. 사이클 경주처럼 뒤에서 쫓아가기는 잘하는데, 추월하여 앞서가지 못한다. 일본이 잘 보여주고 있다.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 한다.

세계의 보편적인 흐름과 동떨어져, 특정 지역에서만 통하는 기괴한 표준으로 진화하여 가고 있다. 일본인들은 열광하는데 세계인은 시큰둥하다. 왜 일본만 유독 그럴까? 다 원인이 있다.

미국도 갈라파고스 현상 있다.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 버리고 자기네들끼리 미식축구에 올인한다. 미국과 일본의 공통점이 있다. 섬으로 고립된 채 극단적인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근본 미학이 어긋나서 그러하다. 합리주의 버리고 실용주의 추구한 결과다. 일본 풍속화와 김홍도 풍속화를 비교하면 단박에 드러난다. 일본 그림은 입을 작게 그린다든가 하며 인체를 가볍게 왜곡한다.

편법과 요령. 관객의 주의를 끄는 스킬. 그러다가 망가진다. 실용성은 있는데 합리성이 결여되었다. 합리성이 없으면? 호환이 안 된다. 그 분야에서 통하는데 사회 다른 분야와 소통하지 못한다.

근대는 르네상스로부터 촉발되었다. 다빈치라는 한 명의 천재가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모두가 공유하였다. 표준을 공유한 것이다. 원칙이 바로 섰다. 거기서 산업화가 이끌어져 나왔다.

미학에서 과학이 나온 것. 일본은 어떤가? 이집트 고분 벽화라면 얼굴은 측면, 가슴은 정면, 발은 측면으로 왜곡한다. 서슴없이 왜곡한다. 일본은? 한국에 없는 기괴한 투시도법을 함부로 쓴다.

곤란한 부분은 구름 비슷하게 둥글둥글 색칠하여 지운다. 한 컷의 그림 안에 실내에서 일어난 사건과 실외풍경이 공존한다. 용납이 되는가? 용납될 수 없다. 김홍도는 적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일본인은 그랬을까? 이유가 있다. 사무라이들의 괴상한 머리모양만 해도 그렇다. 마빡에 고속도로 냈다. 투구를 쓰기 위한 실용적인 디자인이다. 여진족이 변발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순신 장군 투구처럼 하면 보기 좋은데 이마에 염증이 생긴다. 확실히 일본투구가 실용적이다. 생긴건 야비해도 방어력은 좋다. 그러나 선비라면 곧 죽어도 그런 볼품없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 기생들은 이를 까맣게 칠하기도 한다. 용납 되는가? 용납한 결과 겉잡을 수 없이 빗나가 버렸다. 미켈란젤로, 다빈치는 용납하지 않았다. 일본은? 잘도 용납했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말이다.

‘뭐 어때? 대충 넘어가지고.’ ‘요령도 좋고, 편법도 좋고, 탈법도 좋고, 실용은 더욱 좋지. 운찬이 봐. 총리만 되잖아. 얼마나 좋아.’ 눈썹 밀고 그 위에 가짜눈썹그리는 일본의 기괴한 화장술도 그렇다.

발가락에 신발을 끼우는 쪼리(쪽발이. 일본 짚신은 뒤축이 없어서.)도 그렇다. 그게 용납이 되는가? 처음엔 망설여진다. 에라 모르겠다. 용납한다. 여름에 편하고 좋잖아. 그래도 되는가?

한번 용납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오늘날의 일본, 망가에서부터 AV까지 그림체가 똑같다. 천편일률로 되고 있다. 전 국민의 취향이 같아졌다. 미의 기준이 세계 보편기준과 다르다.

세계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갈라파고스가 되었다. 미래 없다. 중국의 산술은 이론적인 해명없이, 상부구조 없이, 공리없이, 정의없이, 집합론 없이 실용적인 계산법으로 바로 간다. 용납이 되는가?

어떤 기술이든 그것을 끌어오는 그 전단계로서의 상부구조가 있는 법이다. 학문은 합리성에 기초하며 원래 자연에서 유도된다. 자연의 완전성과 인간의 깨달음이 반응한 결과 학문의 합리성이 유도된다.

그 부분에 대한 이론적 해명없이 결론을 함부로 도출하여도 좋은가? 그러니 수학 울타리를 넘어 근대 합리주의로 발전하지 못하고, 뉴튼의 새로운 세계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장사치 잔재주로 전락하고 만다.

미학 상부구조 없이 과학 하부구조에 몰입한 결과 호환성 잃었다. 왜 중국산술은 호환성을 잃었나? 근본 인간과 자연의 첫 대면에서 태도문제다. 첫 대면이 잘못되었다. 밤중에 선보고 결혼한 격이다.

르네상스는 신과 인간의 경건한 대면이다. 거기서 이상주의와 합리주의가 나왔다. 인간이 신에게로 다가가려는 열망이다. 용납될 수 있는 것과 용납될 수 없는 것 사이에 명확한 선이 그어졌다.

중국이 요즘 그림을 잘 그린다지만 그 화장실을 용납하는 한 미래없다. 하나가 어긋나면 모두 어긋난다. 왜? 전부 한 줄에 꿰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연과 대면하는 태도가 틀렸다.

사돈집은 어려운 법이다. 어려워야 한다. 첫 만남, 첫 대면, 첫 선, 첫 키스는 긴장되는 법이다. 그 긴장에서 미학적 표준이 세워진다. 그것을 잃고 실용으로 바로가면, 막가는 인생으로 전락한다.

한 번 기준이 오염되면 더러운 것이 없어져서 막 가게 된다. 왜 이 점이 중요한가? 우리가 서구를 모방하여 제법 과학을 꾀해도 미학적 상부구조의 건실한 토대 없이는 서양문명의 하부구조로 편입되고 만다.

여진족이 중국을 지배했지만 중국에 흡수되어 지금 존재가 없듯이. 서구 관점으로 보면 한국문화는 일본의 아류거나 중국의 변방문화다. 용납이 되는가? 그걸 용납한 결과가 이명박이다.

동양문명이 서구문명의, 한국문화가 일본, 중국문화의 하부구조로 편입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를 회복해야 한다. 미학을 회복해야 한다. 갈라파고스 신드롬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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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차를 잘만든다지만 근본적으로 ‘자동차는 이런 것이다’ 하는 큰 틀에서의 정의를 내려주는 데 실패하고 있다. 디자인의 한계가 보인다. 한국차는 뭐 그 점에 있어서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고.

애초에 첫 대면이 잘못된 것. 석가의 독화살 비유가 문제. 불교에는 방편이란 것이 있다. 중생들 어차피 어려운 불교이론 못알아먹으니 원하는대로 부적 써주고, 사주 봐주고, 관상 봐주고.

미신과 적당히 영합하는 것이다. 그게 가짜라는 거 뻔히 알면서. 절에다 산신당도 모시고. 해서는 안될 타협. 일본 스님은 결혼도 한다. 잘 하는 짓이다. 석가가 처음에 기준을 잘못 세웠다.

독화살이 날아온 원인을 묻지 않았다. 환자 살리는게 급하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호환 안 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예수는 죽었다. 독화살을 뽑지 않고 현장을 보존하여 원인을 밝혔다.

석가는 환자부터 살렸기 때문에 미학이 망가져 호환 안 되니 발달한 인도수학 써먹지 못했고, 예수는 원인을 밝혔기 때문에 완전성 규명하여 호환이 되고 그 인도에서 수입한 수학으로 세계를 리드했다.

공자는 실용주의자였다. 귀신을 경원하라고 말했지만 대략 얼버무렸다. 내세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그는 몰랐고 무관심했고 귀찮아 했다. 엄격하지 않았다.

완전성 개념이 없었다. 수학과 논리학이 발달하지 못하게 되어 학문들이 서로 호환되지 않게 되었다. 명가의 논리학은 궤변으로 치부되었고 발달한 산학은 장사꾼의 기술로 없신여김 받았다.

노자는 시를 썼고 장자는 소설을 썼다. 노자 글은 비유투성이 운문이고 장자 글은 유머스런 꽁트다. 재미도 있고 교훈도 되지만, 학문의 원칙을 밝히는 데서 멀다. 첫 단추 놔두고 두번째 단추부터 꿴 것.

왜 사상가가 시나 소설을 쓰지? 왜 문학을 하지? 자신의 사상을 자연의 완전성으로부터 유도하는 절차 생략하고 바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실용성으로 쳐들어간다. 일의 앞뒤가 바뀐 것.

르네상스는 그림과 조각이지만 교회의 틀 안에 가두어지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교회로 되었다. 15세기 피렌체 전체가 하나의 교회였다. 신의 완전성과 경건한 만남이 있었다.

표준되어 용납되지 않을 것들이 걸러졌다. 한 점의 오점도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가 그 안에 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 그 긴장 얻어야 한다. 호연지기와 같은 헌걸찬 기개 얻어야 한다.

그 긴장 버리고, 실용주의로, 요령으로, 편법으로, 탈법으로, 정운찬으로 일탈함은 마치 담임이 교실 비운 뒤의 떠들썩한 장면과 같다. 편하다. 실속있다. 좋은데 그 다음 페이지가 없다.

학문은 끊임없이 연결되어야 한다. 면면히 이어져야 한다. 한 때 부흥했던 아라비아 그 뒤가 없고, 한때 세계의 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흥청거렸던 청나라 그 뒤가 없다. 남긴 것은 엄청난 인구 뿐.

긴장 풀리고 야비해지면, 대중적으로 세속적으로 치달으면 한이 없다. 봐줄거 다봐주면 끝이 없다. 흥청거림도 좋으니 때로 리셋하고 미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출발점을 확인해야 한다.

선진국과 후진국 차이

선진국은 개인이 강하다. 농부가 목장에서 우유를 짜도 깨끗하게 잘 짜고, 밭에서 당근을 키워도 제대로 잘 키운다. 포도를 재배해도 제대로 한다. 시골 농삿꾼이 삼성전자 기술자처럼 한다.

모두들 자기만의 무언가가 있다. 그런게 있다. 한국은 어떤가? 터미널 앞 노점상 수준보면 까맣게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혀 경쟁이 없다. 어차피 터미널 앞에는 배고픈 여행자가 있을테니까.

뭘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그냥 변함없이 나와서 변함없이 장사하다가 문 닫고 집에 간다. 진보가 없다. 근본이 틀어져 있다. 농부가 포도를 대충 키우는데 포도주 공장에서 기술만 베껴가지고 되나?

한국의 과학중심 실용중심은 포도는 엉망으로 키우면서 포도주 제조기술만 베끼려는 태도다. 그 방법으로 갈 수 있는 한도는 딱 여기까지. 더 이상은 못 간다. 중국의 화장실이 그러한 이상 진보는 없다.

[칸막이 없는 화장실의 문제는 단순히 화장실 시설이 후진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삶에 대한 태도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등만 돌리면 소변기가 되는 무개념 한국 아저씨들도 마찬가지.]

북경올림픽때 화장실 고쳤으니 중국은 이제 시작이다. 지금까지 중국산업은 한국산업, 일본산업, 미국산업의 하부구조였다. 화장실 고치고 난 다음에 진정한 중국산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미학은 거룩한 분노다. ‘이건 아니잖아’ 하는 것이다. 세 나라의 문살만 비교해도 그렇다. 일본 문살은 격자형이다. 선종불교 영향으로 단순함의 미학이 있다. 그러나 답답하다. 감옥의 창살같다.

한국문살은 편안하다. 나아가고 멈추고 쉬어가고 어루만짐이 있다. 중국은? 문을 둥글게 원형으로 만든다. 문살은 사방으로 각개약진이다. 함부로 빗금을 쓴다. 불안하다. 한번 보면 기특하나 자주보면 짜증난다.

도교의 대충주의 철학이 배어 있다. 일을 말끔하게 처리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곧은 것 피하고 직격으로 바로 뻗어나감을 피한다. 정치를 해도 정면으로 비판은 않고 항상 배후에서 조정한다.

대련의 건설자로 민초들에게 인기가 높은 보시라이가 짤려도 정면으로 치지는 않고 아들의 탈선을 언론에 노출하는 등 우회적인 방법으로 공격한다. 이명박식으로 대놓고 칼 휘두르는 일 없다.

문살 하나만 봐도 다 드러난다. 전부 연계되어 있다. 근본적인 원칙이 바로 서야 한다. 세상과의 첫 대면이 중요하다. 첫날밤에 다 결정된다. 두 가지 전략이 있다. 전략은 이거 아니면 저거다.

이거면 이 기준, 저거면 저 기준으로 통일한다. 그 전략이 잘못되었다. 과학에서 미학으로 전환한다 함은 ‘1명이 벌어 5명이 먹는’ 구조를 ‘1명의 아이디어를 5명이 공유하는’ 구조로 바꾸는 것이다

● 후진국은 1명이 벌어서 5명이 나눠먹는다.
● 선진국은 1명이 창안한 재주를 5명이 공유한다.

아이디어를 공유하려면 장벽이 없어야 한다. 지역간, 성별간, 인종간, 문화권 간 장벽 허물어야 한다. 한국은 어떤가? 도처에 장벽이다. 여자 아이디어 남자가 모른다. 호남 아이디어 영남이 모른다.

강남 아이디어 강북 모른다. 일반고 아이디어 특목고 모른다. 네티즌 아이디어 조중동 모른다. 진보 아이디어 보수 모른다. 재벌 아이디어 중소기업 모른다. 이거 하나만 뚫어도 선진국이다.

후진국이 도처에 장벽 만드는 이유는 1명이 번 것을 5명이 나눠먹는데 여섯번째 사람이 같이 먹자고 낄까봐서다. 이건희는 자기 가족들과 사회주의 잘만한다. 건희와 재용이 평등하게 나눠먹는다.

몽구것은 의선이 것, 의선이 것은 몽구것, 형님좋고 아우좋고 몽구모터스 사회주의 잘도 한다. 거기에 더 끼워주기 싫어서 장벽 세운다. 과학은 장벽을 만들어야 한다. 미학은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충담사의 안민가처럼 군은 군다이, 신은 신다이, 민은 민다이 서로 간에 장벽 세우고, 역할 정해서 서로 금 넘어가지 말자는 봉건제도 자체가 과학적 발명품이다. 그 방법으로 강남 금긋고 특목고 나눈다.

한 명이 벌어서 여럿이 나눠먹는다는 발상을 깨야 한다. 되는 집안 밀어주기다. 삼성만 밀어주고 현대만 밀어주면 대한민국 잘될까? 인재의 블랙홀 된다. 인재편중은 지역편중 이상의 재앙이다.

가난하던 시절 누나는 공장에서 일하고, 동생은 밭에서 일하고 집안에 장남 하나만 밀어서 판검사 만들면 온 가족이 성공했다. 그 시절 지나갔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그 과학적(?) 시스템 벗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좌파들도 1명이 생각하고 99명이 삽질하는 과학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란 결국 한 명의 독재자가 생각을 독점하고 99명의 시민은 삽질하는 사회다.

● 역할 나누기의 과학적 컨셉 .. 백명의 집단 중에서 1명의 리더(독재자)가 생각하고 나머지 99명이 열심히 삽질하면 효율이 증가한다.(무뇌좌파들)

● 생각 합치기의 미학적 컨셉.. 백명의 집단 중에서 백명이 생각을 모으고 삽질은 되도록 기계에게 맡기면 구조적으로 완성된다.(진정한 진보의 컨셉)

빌 게이츠의 효율을 추구하는가 스티브 잡스의 미학적 완성을 추구하는가이다.(빌의 윈도즈는 스티브의 아이디어를 상당히 훔쳤다.) 효율이 좋지만 꼴찌에게 필요한 컨셉이다. 이는 재래식 슈퍼마켓을 개량해서 24시간 편의점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미학은 상부구조다. 과학은 하부구조다. 상부구조 없이 하부구조로 안된다. 편의점은 상부구조가 있다. 슈퍼는 상부구조가 없으므로 구조적으로 안되게 되어 있다. 하부구조만으로 될 때도 물론 있다.

잘 나가는 다른나라 밑에 편입되었을 때다. 후진국이 단기간에 성장하려면 그 방법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그 식민지 근성, 노예근성 버리지 못하고 변방에서 빌빌댈 것인가? 부끄럽지 않나?

한국차 디자인이 후진 것은 그것을 용납하는 소비자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몽구 혼자 작품이 아니고 한국인 모두의 안목의 합작품이다. 그래서 부끄럽다. 한국인 지혜의 총합이 그 정도라니.

디자인을 못했다고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의 문과 트렁크, 본네트 사이의 틈새간격이 만드는 선굵기가 일정하지 않다. 어떤 선은 굵고 어떤 선은 가늘다. 굵기가 고르지 않으니 차가 물러 보인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 디자인은 못해도 되지만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기본을 안 지키는 것을 용납하면 안 된다. 왜 그럴까? 일본차, 미국차도 기본이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럽차는 되는데.



** 유튜브 동영상 주소 **

학문이란 무엇인가1 : http://www.youtube.com/watch?v=ZSz8q1vhYw4

학문이란 무엇인가2 : http://www.youtube.com/watch?v=wNiM0Q84uZY

자연과 인간의 컨셉 : http://www.youtube.com/watch?v=oDczzVq6RT4

미학은 초기조건의 형성 : http://www.youtube.com/watch?v=vuwoMVtUnII

엣지는 관계의 통로 : http://www.youtube.com/watch?v=OWHrBOQjBys

http://gujor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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