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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7703 vote 0 2009.09.24 (00:01:27)

학문의 족보

‘과학’과 ‘미학’은 학문에 대한 기본적인 두 가지 태도다. ‘태도’라는 표현에 주의하기다. 말하자면 미학 안에도 과학이 있는 거다. 그림을 그리면 미학이지만 그리는 기교를 배우면 과학이다.

피아노를 치면 미학이고, 치는 법을 배우면 과학이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은 미학이지만, 시험문제 출제용으로 쓸데없이 가르치는 품사 나부랭이는 과학이다. 뭐든 기르치고 배우는건 과학이다.

대저 배운다는 것이 무엇일까? 아기가 걸음마를 익히고 말을 익히는 것도 배우는 것일까? 누가 아기에게 걷기와 말하기를 가르쳤지? 알아야 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배움의 전부가 아니다.  

미학은 당위를 따라간다. 책가방을 잊어먹고 빈 손으로 등교하는 멍청이는 있어도, 신발을 잊어먹고 등교하는 학생은 없다. 왜? 발바닥이 아파서 맨발로 등교하기는 물리적으로 불능이니까.

도화지를 준비한 다음 연필로 스케치하고 색을 칠한다. 이건 당위다. 순서와 절차를 어길 수 없다. 그린 다음에 스케치 한다거나, 먼저 그리고 나중에 도화지를 조달한다는 것은 불능이다.

미학은 근본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미학은 실천하는 것이며 익숙해지는 것이다. 사격술은 일초 만에 배울 수 있다. 방아쇠만 당기면 된다. 그러나 일초만에 타겟을 명중할 수 없다. 연습해야 한다.

그것은 배움이면서 배움이 아니다. 아기의 걷기와 말하기는 배움이면서 배움이 아니다. 가르쳐서 배우는 것은 과학이고, 아기의 걸음마처럼 논리적 당위를 따라 저절로 익히는 것은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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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학문은 미학에서 출발했다. 선비들의 도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답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학교에서 밥벌이 수단으로 배우는 철학은 차원이 다르다.

지금은 직업이 되어서 취직용이다. 타인을 위하여 써먹는다. 사회에 기여하기 위하여 배운다. 종교의 신도가 경전을 배음은 자신을 위해서다. 목사나 승려들이 경전을 암송함은 밥벌이 수단이다.

뭔가 ‘위하여’ 하는 것이 과학이다. ‘의하여’ 하는 것이 미학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밥이 싱거우면 반찬을 먹는다. 반찬이 짜면 물을 먹는다. 먹고 난 다음에 상을 물리고 설겆이를 한다.

이건 당위다. 미학은 당위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점차 익숙해지는 것이다. 밥이 싱거워서 반찬을 먹을 수 밖에 없으니 ‘의하여’다. 반찬이 짜서 물을 마실 수 밖에 없으니 ‘의하여’다.

밥을 먹었으면 상을 치워야 한다. 역시 ‘의하여’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휴도하고, 사회에 기여하고, 출세하기 위하여가 아니다. 아기가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익힘은 내부의 충동에 의하여다.

본능에 의하여다. 아기가 출세하기 위해 걸음마를 배우는 것은 전혀 아니다. 목적과 의도는 없다. 미학은 ‘의하여’라는 정언명령 곧 필연의 연쇄고리를 따라가므로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답다.

그러므로 미(美)다. 반면 과학은 ‘위하여’라는 인위적인 목적 곧 가언명령을 따라간다. 그 배움의 목적이 내 안의 본래에 있지 않고 바깥의 주문에 있다. 바깥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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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과 과학은 근본 입장이 다르고, 취지가 다르고, 접근법이 다르고, 서 있는 바탕이 다르다. ‘학문의 역사’에서는 ‘미학’과 ‘역학’이라고 표현했다. 구조론으로 보면 존재론과 인식론의 차이다.

학문이 하나의 산이면, 정상에서 아래를 굽어본 입장이 미학이다. 기슭에서 정상을 올려다본 입장이 과학이다. 답을 알고 실천하면 미학의 존재론, 모르면서 답을 찾아가면 과학의 인식론이다.

최초에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A=B)라는 방정식으로 세팅되어 있다. 거기서 괄호를 지우면 미학과 논리학(수학)이 나온다. 미학에서 예술이 나오고 문화가 나오고 삶이 나온다. 그렇게 실천된다.

미학은 실천의 학문이다. 구조론은 가르치고 배우므로 과학의 입장에 선다. 구조론은 논리학이다. 논리학에서 수학이 나오고, 수학에서 과학이 나오고, 다시 응용과학이 나오고 최후에 기술이 나온다.

● 원리 ≫  개념 ≫ 가치 ≫ 의미 ≫ 사실

● 깨달음≫ 미학≫  예술≫  문화 ≫ 삶

● 구조론≫수학≫  과학≫응용과학≫산업기술

● (A=B)≫ A=b≫  A=?≫  A→B ≫ B (A는 전제, B는 진술)

분류는 항상 세번째 가치, 곧 짝짓기부터 시작하는게 좋다. 과학은 수학적 원리와 개별적 사실을 짝짓는다. 짝지어진 파트너에 따라 물리도 되고 화학도 되고 의학도 되고 천문학도 된다.

각각 원리(수학)에 에너지, 물질, 질병, 별자리가 짝지어졌다. 과학은 인위로 만들어진다. 계속 짝지으면 계속 새로운 과학이 탄생한다. 과학은 다시 2차과학으로 전개한다. 응용과학, 공학이다.

● 구조론(논리학, 공리)

● 수학(기하-대수, 집합론)

● 과학(1차과학, 순수과학)

● 공학(2차과학, 응용과학)

● 산업(3차과학, 단순기술)

‘원리≫질서≫발견≫발명≫사용’이 있다. 원리는 레고블럭이다. 질서는 블럭들의 집합이다. 발견은 블럭의 분리와 결합이다. 발명은 블럭으로 자동차나 배를 만드는 것이다. 사용은 만들어진 작품이다.

● 원리≫질서≫발견≫발명≫사용

● 구조≫수학≫과학≫공학≫기술

발견 다음이 발명, 발명 다음이 사용이다. 순수과학이 컴퓨터 원리를 발견하면, 응용과학인 공학이 컴퓨터를 발명하고, 기술은 그 컴퓨터를 사용한다. 컴퓨터는 원래 자연에 없었다.

원래부터 자연에 있으면 순수과학, 1차과학이고, 없는 것을 만들어내면 공학, 응용과학, 2차과학이다. 발견이 1차과학이고, 발명이 2차과학, 제품의 사용이 3차과학 곧 단순기술이다.

모든 것의 전제는 수학이고, 수학의 전제는 논리학이다. 구조론은 논리학이다. 구조론이 학문의 아버지다. 논리, 곧 구조론에서 공리를 추구하여 수학이 나오고 수학에 파트너를 짝지으면 과학이다.

과학의 성과를 적용하여 무언가 발명하면 응용과학이 된다. 인간사회 또한 발명된 것이므로 사회과학 역시 2차과학에 속한다. 법학이라면 법은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니 2차과학이 된다.

그러나 법의 원리는 자연법칙으로 발견된다. 자연의 합리성이 인권개념을 낳고 이것이 발전하여 법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법철학은 1차과학이다. 법전을 외워서 판결함은 단순기술이다.

대부분의 법조인은 기술자에 불과하다. 무개념 판검사들은 3차과학자에 속한다.법을 발명하는 입법가야말로 진정한 법학자이다. 소로우의 시민불복종 개념처럼 법에 도전하는 선구자가 1차과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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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는 족보가 있다.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다. 하나의 존재는 (전제)=(진술)로 세팅된다. 앞에 오는 것이 뒤에 오는 것의 전제가 된다. 논리가 없으면 수학이 없고 수학이 없으면 과학이 없다.

구조론은 논리학에 속하므로 가장 어른이다. 가장 어른인 구조론은 깨닫는 것이고 수학은 전개되는 것이다. 과학은 발견되는 것이며 응용과학은 발명되는 것이고 단순기술은 사용되는 것이다.

● 구조론(깨닫는다.)

● 수학(전개된다. 1로부터 연동되어 연쇄적으로 펼쳐진다.)

● 과학(짝짓기로 발견된다.)

● 응용과학(인위로 발명된다.)

● 기술(사용된다.)

이러한 전개는 가르치고 배우는 과학에 속하며 근본적으로 역학이다. 즉 에너지를 다루는 것이다. 에너지는 외부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외부와 교섭하는 것이다. 사회의 것이다. 객관적이다.

● 깨달음(완성한다)

● 미학(자연스러움으로부터 전개된다.)

● 예술(그림, 음악, 건축, 패션, 문학 등으로 다양하게 짝짓는다.)

● 문화(어느 기준에 맞추어서 인위적으로 양식이 세팅된다.)

● 삶(실천된다.)

과학의 객관적 범주와 미학의 주관적 범주가 비슷한 족보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이 물리학, 화학, 천문학, 의학, 생물학 등으로 다양하게 짝짓듯이 미학도 음악, 미술, 건축, 패션 등 다양하게 짝짓는다.

과학이 집단적, 객관적, 사회적, 외향적 협력작업 곧 상대가 있는 게임인데 비해, 미학은 독립적, 주관적, 개인적, 내향적 창조작업 곧 혼자 가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림도 협력하여 그릴 수 있다.

미학 안에도 과학이 있다. 그러나 본질에서 미학은 개인작업이다. 삶은 혼자 사는 것이다. 더불어 살지만 그건 딴 이야기고 본질에서 삶은 혼자 가는 길이다. 더불어 아기를 낳지만 근본 혼자 낳는다.

미학은 실천된다. 미학 역시 학문이다. 그러나 연습되고 훈련될지언정 누구로부터 배우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안에도 배워야 할 것은 있다. 그러나 본질은 아기가 말을 익히듯이 익히는 것이다.

익힘은 당위를 따라간다. 당위에는 질서가 있으며 1번을 해치우면 2번은 저절로 명백해진다. 순서를 바꿀 수 없으므로 배울 필요가 없다. 화장실의 크고 작은 근심 사이에서 무엇을 먼저 풀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미학과 과학은 50 대 50이다. 내 안과 내 밖의 문제에 답함이다. 미학은 내 안의 고민을 해결함이요 과학은 남 앞에서 우쭐댐이다. 근본적으로는 미학이다. 과학은 수레다. 미학은 그 수레를 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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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과학의 시대이다. 21세기는 미학의 시대이다. 20세기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과 자동차를 탄 사람 사이에 차별이 있었다. 지금은 자동차를 탄 사람 사이에 마티즈냐 그랜저냐 차별이 있다.

20세기에 라면값은 모두 50원이었다. 21세기에 라면값은 천차만별이다. 만약 중국과 일본의 라면이 수입된다면 50원부터 5천원까지 다양한 라면이 판매될 것이다. 무엇인가? 21세기는 미학으로 차별한다.

경제는 무한성장하지 않는다. 스위스에서는 한식 밥 한상이 6만원이다. 한국의 5천원짜리 밥이나 스위스의 6만원짜리 밥이나 같은 밥이다. 다른것은 미학이다. 문화적 양식이 가격을 결정한다.

20세기는 자전거 탄 사람과 자동차 탄 사람 사이에 빈부차가 있었지만 21세기에는 똑같은 자동차들 사이에 차별이 있다. 차는 같은 차인데 문화가 다르고 양식이 다르다. 미가 최종적으로 가치를 결정한다.

기록된 인류역사 3천년 중에서 산업시대는 300여년에 불과하다. 대부분에 있어서 생산력이 아니라 미학이 가치를 결정했다. 아직은 생산력의 차별이 있고 거기서 갈라지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것은 아니다.

구조론과 깨달음은 같은 것이다. 구조론은 깨달음으로 바깥에서 과학을 통제하려는 것이며 깨달음은 내 안에서 삶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과학 안에 미학이 있고 미학 안에 과학이 있다.

아기가 강변에서 모래로 지은 까치집(두꺼비집)이나, 크로마뇽인이 지은 움집이나, 목수가 지은 한옥이나, 건축가가 지은 100층 빌딩이나 점수는 같다. 완성되면 백점 미완성이면 빵점이다.  

미학은 하나의 정상에서 여러 루트로 내려오므로 길이 여럿이다. 다양한 답변이 주어진다. 과학은 다르다. 과학으로 보면 아기의 모래집은 0점, 크로마뇽인의 움집은 10점, 한옥은 50점. 빌딩은 백점이다.

과학은 여러 기슭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정상에 도달하므로 정답이 하나다. 여럿이 협력하므로 객관적 평가다. 창조하면 미학이고 협력하면 과학이다. 삶을 다루면 미학이고 에너지를 다루면 과학이다.

http://gujoron.com


[레벨:17]눈내리는 마을

2009.09.25 (04:06:17)

달러 남발의 시대에,

중국 감싸돌기의 판국에,

어리광쟁이 한국 엘리트 난장에,

자기 삶을 온전히 완성시키는 길은 어디에 있나요.

깨달음 없다면,

인생은 공허.

그 공허와 허무가 햇살 좋은 날에 자살을 느끼게 했다오.

신의 형상에 다가설수 있다면, 그의 정면을 볼수 있다면,

그렇게 하루가 완성될수 있다면.

이 초라한 생도 사람구실을 할텐데.
프로필 이미지 [레벨:17]안단테

2009.09.25 (09:23:58)







트리안.jpg


'....아기가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익힘은 /내부의 충동/에 의하여다. '

'본능에 의하여다. 아기가 출세하기 위해 걸음마를 배우는 것은 전혀 아니다. 목적과 의도는 없다. 미학은 ‘의하여’라는 정언명령 곧 필연의 연쇄고리를 따라가므로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답다.'

이 곳을 읽어내려가던 중, '번뜩' 창가에서 자라는 이 화초가 생각이 났습니다. 이놈은 바람 불때마다 알았다는듯이 이파리가 움직이는데... 오종종한 잎이 마치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의 걸음마를 연상케 해주지요. 그래서 내가 엄마가 되는 양, 아기 손을 잡아 주고 싶은, 그 마음이 들게 하지요. 오늘도 창가에서 이놈들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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