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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573 vote 0 2013.01.29 (13: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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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교라는 것이 도무지 무엇인가? ‘부정적 사고의 힘’이라고 번역한 어떤 서양사람이 있었다. 핵심을 짚었다.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는 한 마디로 반항이다. 노자의 부정과 까뮈의 반항, 무언가 통한다.


    족보가 있다. 원래 동양사상은 인간중심 철학이다. 공자도 신을 경원했다. 석가는 인간을 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신을 섬기는게 아니라 인간이 신의 레벨로 올라서는 것이다. 이건 방향이 다른 거다.


    묵자는 반항을 했고, 법가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폭로했다.(한비자는 마키아벨리와 비견할 인물인데 민주주의를 발명할 뻔 했다.) 원래 군주의 통치권은 신권으로부터 위탁받는 것인데 한비는 이를 과학으로 대체한 것이다.


    동양철학은 원래 출발점이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다. 다만 공자의 언설이 헷갈렸을 뿐 아니라 황제들이 공자의 사상을 통치에 이용할 의도로 조직적으로 왜곡했다. 그래서 공자가 황제의 통치권이 신권에서 위탁받는다(동중서의 천인감응설)는 거짓말을 해준 것처럼 잘못 알려졌다. 공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서양으로 눈을 돌리면 실존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있고 마르크스는 칸트를 비판하고 있고 칸트는 교부철학을 비판하고 있고 교부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계승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기독교의 구원개념을 등치시켰다. 그러므로 플라톤에서 마르크스와 샤르트르까지 한 줄에 꿰는 족보가 완성되는 것이며 이들은 그 이전단계를 비판하고 있지만 본질은 한통속이다.


    본질로 보면 샤르트르=마르크스=칸트=플라톤까지 이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합리주의다. 단지 버전을 바꾸어 온 것이다. 샤르트르와 마르크스와 칸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차이란 도스와 윈도와 윈도XP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반대편에 디오게네스와 마키아벨리와 니체와 까뮈가 있으나 이들도 소박하게 합리주의 전통에 안티를 하는 보완재에 그치고 있다. 대체재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서구철학은 기독교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전혀다. 꽝이다.


    근본적으로 모델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까뮈의 부조리라는 것도 칸트의 합리주의 모델을 소박하게 의심하며 시크한 표정을 짓는 정도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하면 서양에는 철학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모델을 바꾸는건데 그들은 모델을 바꾼 적이 없다. 인간의 언어는 전제와 진술의 구조이며 전제는 call이고 진술은 why다. 둘은 결정되어 있다. 인간의 언어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고도 정해져 있다.


    call에 why를 충돌시켜 reason을 구하는 것이 서양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다. call은 신, 국가, 공동체, 가족 따위의 상부구조로 정해져 있다. 답을 미리 정해놓고 행동을 짜맞추는 것이 합리주의다.


    부조리는 그렇게 세팅된 전제와 진술의 구조를 송두리째 타파하고 원점에서 새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까뮈 역시 안티를 걸었을 뿐 그 패러다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동양사상으로 말하면 죽림칠현의 완적과 혜강으로부터 완전한 답이 나왔다. 패러다임을 깨뜨린 것이다. 전제를 부정해 버린다. 무의식적으로 깔고 들어가는 것이 없다. 기본 전제가 없다. 희망과 욕망을 부정하는데서 시작된다. 완벽하게 부정했을 때 몸의 반응이 들려온다. 거기서 출발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본이 없는 거다. 요즘 TV에서 하는 일밤 – 아빠! 어디 가?는 대본이 없다. 정글의 법칙도 대본이 없다. 리얼리티쇼다. 그런데 설정은 있다. 시트콤의 본질이 그러하다. 애드립을 따는게 목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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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정해진 대본을 버리고 애드립을 치는 것이 돈오입니다. 여전히 대본대로 움직이는 수구꼴통이나 무뇌좌파들과 우리는 가는 길이 다르며 영원히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들은 짐승입니다. 인간은 집단지능을 만들고 짐승은 정해진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 두 세계가 절대로 만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세계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레벨:15]오세

2013.01.29 (15:14:05)

전송됨 : 트위터

연애가 그렇소

준비된 이벤트보다 애드립이 더 먹어주오, 

준비된 이벤트에는 놀란'둣'한 리액션을 해줘야 예의지만 

애드립에는 그런 것이 필요없소. 즉문즉답이 이루어지는 것이오.

모르는 이들은 멋진 이벤트로 뭘 어떻게 해 볼까 하지만 그건 하수고

진짜는 애드립으로 하는 것이오, 


그런데 깨달음도 그렇구려. 

일단 대본부터 손에서 놓고 시작하기. 

[레벨:7]iness

2013.01.29 (15:36:58)

근데 애드립,병맛도 각본대로 연기하는거 아닌가요?


애드립, 병맛 안에도 질서가 있죠.

예를 들어서 물컵에 물을 담아 마신다고 하면,

물컵을 거꾸로 들어서도 마실수도 있지만 (물컵바닥에 얕은 굴곡으로;;ㅋ)

다소 자유도는 있지만, 결국 물을 제대로 마시려면, 물컵을 똑바로 들고 마셔야되고,

웃기려면, 이상하게 마시면되고.


인위적인 각본을 거부하고, 어떤 일을 성립시키려면,

원래 있던 질서를 순간적으로 셋팅해야한다는건데.

애드립, 병맛은 원래 세상에 있던 자연의 질서, 신의 각본을 빌려 온다는거고.


이건 이미 2차적인 대응인데, 전제 조건을 거부하는게 아난거 같은데요.

걍 거기 순응하는거 같은데;;

뭐?가 있는데 (1차적원인) 거기에 거부한다(2차적원인) 이니까.. 절대적으로 뭐?에 예속되버리는데요;;

에전에도 이걸로 여기글에 리플달았던거 같은데 =_=; 


선문답하는 노스님의

'차나 한잔 들게' 에 어떤 형식으로든 대답하게 된다면, 2차적 대응. 스님의 게임에 낚이는게 되서 실패.

그런데, 선문답이라는 병맛게임을 설계하는 노스님도

이미 이세상속에서, 자연의 질서, 신의 각본에 낚여있음.


어떤이가 완전한 것을 찾아서 신과 마주보고 앉게 되었다.

그래서 신을 얼굴을 계속 쳐다본다. 영원히 서로가 평행선상에 시선을 마주치면서 본다 보고 또 본다.. -_-

음.. 무한히 평행선을 그리면서 계속 되는 과정에 뭐가 있는건가? 의문도 가지지만..

결국 벽보고 30년 수련하는 스님처럼 병맛.

잠시, 대등한것처럼? 행세 했을뿐.

그 어떤이도 남이 셋팅한 병맛게임에 강제적으로 참가한거 뿐 아닌지.


신이랑 마주보는데 답이 없다면, 바깥을 보고

자신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든다. 새로운 기준점이 된다..(어제 딴글에는 이렇게 섰는데, 또 생각해보니)

얼핏 보면, 맞는말처럼 보여도.. 진정한 '바깥' 이라는게 과연 있냐는거.

새로운 스타일도 결국 원래 있던 자연질서나 신의 각본을 빌려오는데서 벗어날 수는 없고.

말이 '바깥'이지.. 결국 신이 싸놓은 빅똥을 헤집는건데.

(애초에 답을 가진 신이라면, 세상이란걸 만들지도 않았을듯.)


부조리라는게 .우리는 신의 빅똥에 머리를 박고 있다..는 고발 아닌가요?

그리고, 애드립,병맛,선문답을 새로운 기준?답?이라고 보는것도 좀 이상한거 같고..;;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1.29 (18:14:51)

전제는 당연히 있습니다.
가짜 전제가 문제지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 인간이 상승했느냐입니다.


봉건주의는 상부구조에서 임무를 내려보내고 

인간은 그 임무를 수행하는 형식으로 세팅이 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임무가 숨은 전제입니다.

전제가 있다는걸 사람들은 모르는 거죠. 


자기 판단이라고 착각합니다.

예컨대 마을에 열녀가 났다고 하면 암묵적인 타살입니다.


그 열녀를 인터뷰 해보면 죽은 남편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남의 눈치를 본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근데 암묵적인 타살 맞습니다.


집단을 위해 임무를 수행한 겁니다.

현대성은 집단을 위한 임무수행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한 개인의 상승입니다.


중요한건 개인이 상승했느냐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6]id: 15門15門

2013.01.29 (20:05:30)

"보이지 않는 임무가 숨은 전제입니다.

전제가 있다는걸 사람들은 모르는 거죠. 

자기 판단이라고 착각합니다."


이 동렬님의 글을 읽고 문득 지난 번 이야기쇼에 나온 도올선생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라캉의 말인 '인간의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암암리 실제적으로는 

내가 아닌 타자 즉 이시대가 나에게 강요하는 가치관이 선택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알고 보면 

나도 모르게 세상의 기준에 물들어 꼭두각시처럼 생각과 행동이 

움직이는 것은 아닌지, 깨어있어도 깨어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싶은

스산한 생각마저 드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6]id: 15門15門

2013.01.29 (16:53:01)

어제 '영화는 영화다'라는 댓글을 단 뒤 영화 '진링의 13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넷에 조금 찾아보았는데 그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이야기가

떠돌아 한참 웹서핑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원작소설이 있는 것을 보건데 아무

래도 난징대학살이라는 사실을 배경으로 한 픽션인 듯 합니다.


다만 궁금한 점이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물론 영화로서 그 이야기는 계몽주의의 

색깔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필요없는 가정일지 모르겠지만 

영화 속 감독의 의도가 아닌 실제로 이 창녀들이 이같은 결정을 선택했다면 역시 합리적인 

결정으로 봐야할까요? 예를 들어 과거 일본인을 구한 이수현의 행동은 강한 개인의 발로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는 감동을 유도하는 별로였던 영화로 기억합니다.


어쩌면 희생에 대해 제 스스로가 갖고 있는 의문일지 모르겠지만 창녀들의 결정을 통해 제가 

부조리를 떠올렸던 건 언젠가 뜰앞의 잣나무에서 언급하셨던 고독한 우주비행사 챕터에서 

지구로 추락하는 우주비행사에게 선택을 맡김으로써 신과 대면한다는 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같은 가정을 생각해보는 이유 역시 그들의 희생이 거룩하거나 성스럽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그들을 속박하는 사회의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결정이 

사회적 포지션에 함몰된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1.29 (17:48:32)

이 영화는 쉰들러리스트나 라이언일병구하기를 연상시킵니다.

금릉 13채라는 이름도 홍루몽의 귀족 여인들을 연상시키고. 

13이라는 숫자도 12사도와 예수를 연상시키고.

13인이 집단적인 행동을 했다면 지극히 합리적이지요. 

이수현이나 우주비행사는 혼자고.

13인의 결정이 틀린건 아닙니다. 집단주의라는 거지요. 

집단의 힘을 강조하면 재앙이 일어납니다.


위에 댓글에 썼듯이 죽은 남편을 따라죽은 열녀는

개인의 숭고한 선택이라고 해도 집단에 의한 타살입니다.


그 13인은 그저 살해된 것입니다.

그리고 장예모는 살인을 미화하는 거고. 누가 죽였든.


25시와 비교할 수 있는데 똑같은 전쟁이야기지만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게오르규는 말합니다. 전쟁이라는 광기에 인간은 치였다. 교통사고처럼.


스필버그는 말하죠. 영웅탄생이다. 우리 모두 영웅이 됩시다.

스필버그가 살인자입니다. 히틀러를 비난하는 그 얼굴이 히틀러의 얼굴입니다.


장예모의 얼굴에서 히틀러를 보지 못한다면 실패죠.

왜 게오르규와는 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을까요? 동일한 사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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