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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3195 vote 0 2008.01.07 (22:29:23)

깨달음을 권하며

깨달음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며, 완전성의 경지를 아는 것이며, 세상을 하나의 원리로 통일시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며, 네가 내임을 아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의 완성된 모습을 끌어내는 미학적 기준을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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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첫째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이성이 아닌 다른 것에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삶이 타자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는 의미다.

타고난 본능이나 성장기의 잠재의식이나 살아가며 겪은 정신적 트라우마나 혹은 사회적 평판 따위에 지배된다면 불완전하다. 그것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먼저 온전한 자유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사랑을 품어낼 수 있다.

죽음 뿐 아니라 죽음으로 대표되는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습관, 모든 편견, 모든 고정관념, 모든 타성, 온갖 생존의 조건들, 모든 세상의 참견자들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깨달음은 완전성의 경지를 아는 것이다. 정상에서 전모를 볼 수 있다. 그 정상에서의 이미지를 얻는 것이며 그 정상에서의 체험을 가지는 것이다. 진리의 완전성에 기초한 근원의 보편성을 아는 것이다.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을 아는 것이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내 행동을 결정함이 아니라 상대의 대응여부와 상관없이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나의 목표와 기준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깨달음은 세계가 하나의 원리아래 통일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세상이 구조와 관계와 상(相)과 인연으로 된 존재임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세계를 한 줄에 꿰어 하나의 기준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얻는 것이다.

보편성에 이어 일반성을 알고 절대성에 이어 상대성을 아는 것이다. 학습이 아닌 창의, 귀납이 아닌 연역적 사유를 전개할 수 있음이다. 다양한 개별적 사실들을 근원으로부터 원리를 끌어대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깨달음은 네가 내고 내가 네임을 아는 것이다. 모든 마찰, 대립, 비교,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네가 이룸으로써 내가 이룬 것이며, 너를 만남으로 하여 내가 완성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사랑인 것이다.

좋은 사람을 사귀기를 욕망하고 그것을 구함이 아니라 그 사람이 혹은 그것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이다. 너와 나를 가르고 어제와 오늘을 가르는 경계를 넘어 진정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섯째 깨달음은 자기만의 미학적 기준을 획득하기다. 처음 타고난 것은 자아(自我)의 기준이다. 그것은 부끄러움과 떳떳함, 어색함과 자연스러움을 판단하게 하는 삶의 나침반이다. 이를 극복해야 한다.

자라면서 제 2의 기준을 얻는다. 그것은 타자가 들이대는 잣대이며 사회의 평가다. 주변의 평판과 위신, 혹은 체면, 지위, 신분, 명성 따위의 비교된 평가기준들이다. 이 역시 극복해야 한다.

깨달음은 이 둘을 극복하는 제 3의 시선을 얻음이다. 또다른 기준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내적 정합성에 맞는 조형적 질서를 획득함이며 곧 자기 자신의 미학적 기준을 획득하는 것이다.

자기 캐릭터와 컬러와 상표와 논리를 가지기다. 그것을 조주의 차(茶)에 담아내든, 임제의 할 덕산의 방에 담아내든, 혹은 선승의 무(無)자 화두에 담아내든, 악사의 음(音) 시인의 시(詩)에 담아내든 그것이 있어야 한다.

모든 희망과 야심을 말소하고 모든 의도와 계획을 표백하고 그 백지 위에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끌어낼 수 있는 미학적 기준을 얻어야 한다. 어제와 오늘을 연결하는 고집은 가짜다. 지금 이 순간에 완성되어야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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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질문해야 한다. 죽음을 극복하고 참된 자유에 도달했는가? 근원의 신성(神聖)에 도달했는가? 마침내 거울을 버렸는가? 존재 자체에 감사할 수 있는가?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포착하였는가?

삶은 자기 내부에 주어진 테마를 포착하고 그것을 마음의 결따라 낱낱이 풀어내어 세상이라는 캔버스 위에 한 바탕 펼쳐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멋진 그림 하나 그려내고 떠나가는 것이다.

깨달음은 자유다. 자유의 결론은 사랑이다. 사랑의 결론은 미학이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는 미학이다. 구도자는 먼저 자유를 추구하지만 그 자유는 마침내 사랑할 자유이고 그 사랑은 비로소 완성할 사랑이다.

은자가 산중에 고립된 채 홀로 외치는 자유가 아니라 대승(大乘)의 정신을 따라 세상 앞에서 사랑으로 전개시켜 내고 선종(禪宗)의 정신을 따라 미학으로 완성시켜 내어 구체적인 성과물을 제시할 수 있어야 진짜다.

자기 내면에 그것이 본래 갖추어 있듯이 세상에도 그것이 본래 갖추어 있다. 그 둘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그 거룩한 만남에서 전율함이 있다. 공명함이 있다. 울림과 떨림이 있다. 마저 토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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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쉬운 것이다. 난해한 이론으로 포장되어서 안 된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어야 진짜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그러나 막연히 마음을 비우고 평정을 얻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고요한 산사에서 평상심을 얻기 쉬우나 입전수수하여 시장바닥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기 어렵다. 세상의 거친 파도 속에서 버텨낼 확실한 기준을 가져야 한다. 굳센 심지가 있어야 한다. 등뼈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세속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어야 한다. 자기 내면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 일치할 때 그 험난한 파도를 넘을 수 있다. 존재의 진실과의 정직한 대면이 있어야 한다. 그 대면의 끝에 낳음이 있어야 한다.

선종불교 특유의 미학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최종적으로 미학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학이 결여된 수행위주의 소승, 이론 위주의 교종,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점오점수의 태도는 불완전한 것이다.  

일찍이 깨달은 사람이 있어서 그 미학을 만든 것이다. 경허와 성철의 일관됨을 만든 것이다. 그 일관됨의 아름다움을 낳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있고 깨달은 사람이 있다. 차이가 있다.

그저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것과 프로의 경지는 다르다. 그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과 화가가 된다는 것은 다르다. 막연히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것과 음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결을 얻어야 진짜다.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 일관되게 꿰어내는 방법으로 자기 내부의 조형적 질서에 도달할 수 있어야 진짜다. 일 사이클의 전체과정을 알고 스스로의 힘으로 설계하고 조직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

시를 쓸수 있다는 것과 시인이 된다는 것은 다르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과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다르다.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서 눈덩이를 굴리듯 단번에 뽑아내는 방법을 쓴다.  

언제든 붓을 쥐어주기만 하면 그릴 수 있어야 화가다. 언제든 악기만 쥐어주면 곧바로 연주할 수 있어야 연주자다. 마찬가지다. 바로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의 완성된 모습을 끌어낼 수 있어야 진짜다.

깨달음의 경지에는 계단이 없다. 금을 그어서 여기까지는 아마고 여기부터는 프로라고 경계를 구분할 수 없다. 깨달음을 심사할 수 없고 자격증을 발급할 수 없다. 스승이 제자를 인가한다든가 하는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 넘기 어려운 문턱이 있다. 그 문턱을 낮추어 깨달음을 대중화 시키고자 한다. 어쨌든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앞서가며 길을 열어놓았기에 뒤에 온 사람이 더 쉽게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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