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 ● 신(神), 존재, 생명, 자연, 물질 - 진리, 세계, 진보, 역사, 문명 ● 윤리 사회 안에서 인간이 인간을 통제한다. 이상의 이름으로 판을 짜고, 미학의 이름으로 기준을 세우고, 규범의 이름으로 정렬시키고 도덕의 이름으로 간섭한다. 정당한가? 그 정당성의 궁극적 근거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늘의 원형이정에서 인간의 인의예지가 유도된다. 인륜의 근거는 천륜에서 찾아진다. 인간의 인권은 근본 하늘의 법칙에서 유도된 것이다. 여기서 하늘은 진리의 완전성, 곧 신성의 의미다. 윤(倫)은 집단 내부에서의 질서를 뜻하며 리(理)는 곧 자연법칙이다. 윤리란 인간사회에 적용되고 있는 이상과 미학과 규범과 도덕의 궁극적 근거를 자연법칙에서 찾는 입장이다. 인간을 통제하는 윤리, 이상, 미학, 규범, 도덕의 개념들은 인식론에 속하는 개념이며 인식론은 존재론을 복제하고 있으므로 존재론의 궁극인 신과 존재와 생명과 자연과 물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윤리, 이상, 미학, 규범, 도덕은 사회 안에서 인간이 인간을 통제하는 기술이며 그 궁극적인 정당성을 자연법칙에서 찾는 것이 곧 합리성이다. 자연이 그러하므로 인간도 그리하는 것이다. 삼강오륜을 예로 들 수 있다. 친구와 친구 사이에 의리가 있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인륜이 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도 의리가 있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도 의리가 있고 상사와 부하 사이에도 지켜야 할 원리가 있다. 그 의리를 따르는 것이 합리성이며 그 의리를 따르지 않는 비합리적 태도는 모든 일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다. 친구사이의 윤리는 소통의 윤리다. 소통하지 못하면 친구간의 협력은 실패로 된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윤리는 생존의 법칙이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어길 때 인간은 원초적으로 태어날 수 없고 태어난 인간의 생존 또한 보장될 수 없다. 여자와 남자 사이의 윤리는 물론 봉건사회의 잘못된 해석이다. 임금과 신하의 윤리, 형과 아우의 윤리는 일의 우선순위에 관한 것이다. 임금과 신하는 봉건적 표현이고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생산자와 소비자, 작가와 독자, CEO와 부하직원 사이의 윤리다. 발명가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누구도 발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특허권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작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노동자와 소수자와 모든 약자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윤리에 따라 사회 안에서 인간이 인간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이 아니면 안 된다. 미학이 아니면 안 된다. 규범이 아니면 안 되고 도덕이 아니면 안 된다. 이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인간을 통제하려 든다면 윤리를 어기는 것이다. 물리력을 사용하여 인간을 통제하려 한다면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저항할 권리가 있다. 그러한 저항 역시 윤리다. 그러한 저항에 의해 사회는 합리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저항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을 통제하는 방법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질문하고 검증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본의는 저항에 있고 지식의 본질 역시 저항에 있는 것이다. 모든 부당한 통제의 시도에 의연하게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 이상 이상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이상이 없다는 것은 근원의 합리성을 바라보는 시야가 닫혀있다는 것이다. 신(神)의 완전성이라는 표준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무모함과 같다. 유토피아 개념, 무릉도원 개념, 파라다이스 개념, 샹그릴라 개념, 에덴동산 개념, 청산별곡 개념, 요순시대 개념이 있어야 한다. 모든 미학적 가치판단의 준거가 되는 기준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고서야 사상할 수 있다. 흔히 이상과 현실이라고 한다. 틀렸다. 이상은 현실의 반대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 현실을 판단하는 준거로서의 이상이다. 그러므로 이상이 현실이다. 허무를 극복함으로써 그 현실의 밀도를 높여나가는 것이다. 철학에서 이상은 도덕이나 규범, 미학과 윤리에 대한 개념이다.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서의 이상, 모든 규범적 판단의 궁극적 토대로서의 이상인 것이다. 도덕과 규범은 이상에 기반하므로 이상이 무너지면 도덕이 무너진다. 가만히 있다면 선도 악도 아니다. 인간이 행동하므로 선과 악이 판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므로 그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은 궁극적으로 미래에 대한 판단인 것이다. 지금 옳지 않더라도 미래에는 옳을 수 있다. 지금 허용되지 않더라도 미래에는 허용될 수 있다. 100년 전에는 자유연애가 비판되었다. 100년 후에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도덕률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것은 도리어 비현실적이다. 이상적인 것이 도리어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이상이 필요하다. 현실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다. 시대의 배경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판단의 준거가 마련되어야 한다. 현실적 판단은 상대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이 있어야 한다. 이상이 없을 때 선을 선이라 주장할 근거가 없고 악을 악이라 꾸짖을 절대적인 근거가 없다. 지금 선이라 불리는 것이 내일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이상은 시대를 초월하고 관습을 초월하고 문화를 초월하고 모럴을 초월하여 도덕의 극한, 규범의 극한, 윤리의 극한을 드러내는 것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점을 드러낸다. 그러고서야 도덕과 규범의 논리가 선다. 도덕은 개인의 양심에 있고, 규범은 사회적 합리성에 있고, 미학은 타자간의 소통과정에 있으며, 윤리는 자연의 법칙에 있다. 이렇듯 인간을 통제하는 서로 다른 기준들을 하나의 테마로 묶어내는 것이 이상주의다. 이상은 테마를 가진다. 내적 정합성을 가진다. 제시된 주제에 맞는 논리적 자기 완결성을 가진다. 윤리와 미학과 도덕과 규범이라는 서로 다른 기준들에 제 포지션을 주어 알맞게 배치하여 멋진 그림을 잡아낸다.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완전한 인격, 완전한 사회, 완전한 국가에 대한 그림을 마음 속에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표준을 얻을 수 있다. 그래야 소통할 수 있다. 그것을 갖춘 사람이 지성인이다. 현실은 변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도덕도 변하고 규범도 변하고 미학도 변한다. 그러나 이상이 있기 때문에 지성은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그 변화의 흐름에 맞게 해석해낼 수 있다. 이상이라는 등대가 환히 비추어주기 때문에 부단한 변화 가운데서도 길을 잃지 않고 그 변화의 흐름에 몸을 실을 수 있다. 사람이 변덕을 부리므로 도덕이 잡아주는 것이며, 사회가 변하므로 규범이 잡아주는 것이다. 학문이 변하므로 미학이 잡아주는 것이며, 사상이 변하므로 이상이 잡아주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의 기준으로 윤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를 품는다는 것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세계를 사유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품지 않는 인간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차피 대화가 안통할 것이며 대화해봤자 웅성거림 뿐이다. 인간의 모든 의사소통은 궁극적으로 이상이라는 등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통제함에 있어서 물리력을 사용하거나 모욕을 가하거나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잠재해 있는 근원의 동기를 끌어내는 것이 이상이다. 군자가 자연을 사랑하듯이 본래의 사랑을 끌어내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사람을 사랑하는 욕망이 있다. 완전을 꿈 꾸는 열망이 있다. 그러한 동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외부에서 물리력을 가하지 않고 동기부여의 방법으로 내면에서 끌어내어 통제하는 것이다. 인위적인 통제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통제된 결과를 유도하는 것이다. 허무를 극복하고 비참을 극복하고 더 나은 세계로,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며 상승하려는 의지가 인간 내부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 미학 어원으로 보면 한자어 미(美)는 큰(大)+양(羊)이다. 양고기가 맛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미(美)는 맛이다. 맛은 사람을 유혹한다. 그러므로 미는 유혹이다. 매력이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그것은 멋이다. 미(美)를 나타내는 우리말은 여러가지가 있다. 예쁘다와, 곱다, 어울린다, 아름답다, 멋있다가 있다. 모두 미(美)를 나타내지만 그 중에서 미학적 의미에서의 미(美)는 유혹, 매력, 끌림을 나타내는 멋이다. 미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실로 다양하다. 이래서는 학문의 의미가 없다. 학문적 의미는 그 다양성 속에서 하나의 보편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다양성 속에 숨은 질서가 있고 하나의 뚜렷한 방향성이 있다. 그것이 학문의 대상이 되는 진정한 미다. 무엇인가? 하나의 멋 속에 여러 아름다움이 있고, 하나의 아름다움 속에 여러 어울림이 있으며, 하나의 어울림 속에 여러 고움이 있고, 하나의 고움 속에 여러 예쁨이 있는 것이다. 큰 나무와 같다. 예쁨은 그 나무의 잎이다. 고움은 그 나무의 가지다. 어울림은 그 나무의 줄기다. 아름다움은 그 나무의 뿌리다. 멋은 그 나무 전체다. 예쁨이 많고 고움이 많아도 나무는 하나인 것이다. 진정한 미는 멋이다. 우리말 아름다움은 내부적인 통일성을 의미할 때가 많다. 조화와 균형이다. 그러나 진정한 미를 그 수준을 넘어선다. 고흐의 그림과 모짜르트의 곡은 조화와 균형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의 다양성 속에서 하나의 근본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 하나로 소통의 매개를 삼는다. 우리는 미로 소통한다. 그러므로 이심전심이다. 멋은 소통이며 아름다움과 어울림과 고움과 예쁨은 그 소통으로 가는 경로다. 멋은 사람을 긴장시키고 이완시키며 긴장과 이완 사이의 밸런스를 가지고 자유자재로 이끄는 것이다. 그야말로 뛰어난 연주자가 관객을 웃기고 울리며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것이 멋이다. 그 연주되는 곡 속에, 그 그려지는 그림 속에, 묵직한 등뼈가 있어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무게중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그로부터 다양한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이다. 반복의 매너리즘을 극복하게 할, 하다보면 다 똑같아져버리는 진부함을 극복하게 해줄, 타성과 고정관념과 편견과 모방과 복제를 넘어서게 하는 굳센 심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멋이다. 매력이다. 끌림이다. 유혹이다. ◎ 멋 - 매력, 유혹, 끌림, 긴장과 이완으로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가슴이 쿵 하는 충격을 던진다. 그 가슴 속에 던져진 의심이 다 낱낱이 풀어질 때 오르가즘의 이완을 느낀다. ◎ 아름다움 - 조화, 여러 요소들이 하나의 중심 테마에 의해 통일된다. 극을 구성하는 제 요소들을 하나의 주제로 꿰어낸다.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고 일제히 달려가게 한다. 통일성을 부여한다. ◎ 어울림 - 앙상블, 서로를 보완하는 것. 햄버거와 콜라처럼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를 보완하여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 그것이 있어야 이것도 제 역할을 하는 것. 짝이 있어서 죽이 맞는 것. ◎ 고움 - 받아들여지는 것, 껄끄럽지 않은 것. 부드러운 비단이나 모피처럼 상대방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 여유공간을 주는 것, 자유롭게 허용하는 것. ◎ 예쁨 - 눈에 잘 띄는 것,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의 신체감관을 자극하여 주목하게 하는 것. 자꾸만 눈길이 가고 귀가 쫑긋하게 하고 코가 벌름거리게 하고 입맛을 다시게 하는 것. 미에는 계급이 있다. 멋≫아름다움≫어울림≫고움≫예쁨의 순으로 미학적 깊이가 차별화된다. 밀도의 차이가 있다. 멋으로 갈수록 밀도가 높고 깊이가 있으며 예쁨으로 갈수록 깊이가 얕다. 물론 우리말 아름다움은 이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미학적 관점에서 정밀하게 접근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정한 미는 멋이며 나머지는 멋으로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정거장 들이다. 모든 소설, 모든 음악, 모든 예술은 궁극적으로 멋을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멋은 하나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최적화 될 수 있고 따라서 인간들이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는 하나 뿐이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 멋의 반대개념 - 무미하고 싱거운 것, 지루한 것, 진부하고 타성적인 것, 모방되고 복제된 것, 긴장감을 낳지 않는 것, 긴장과 이완의 사이클이 없는 것. 매너리즘에 빠진 것. 유혹하지 못하는 것. ◎ 아름다움의 반대 - 산만한 것. 짜증을 유발하는 것. 일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것. 하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 ◎ 어울림의 반대 - 공존할 수 없는 것. 서로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 배합이 잘못된 것. ◎ 고움의 반대 - 징그러운 것, 껄끄러운 것, 마찰하는 것. 역겨운 것. ◎ 예쁨의 반대 - 보이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 희미한 것. 드러나지 않는 것. 미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이 어떻게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마찰하지 않고 공존하기에 성공하느냐이다. 그것은 인간을 유혹하는 멋≫아름다움≫어울림≫고움≫예쁨들 사이에 질서를 부여함이다. 확일화 시키지 않고, 조직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고, 명령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줄세우지 않고도 구성원 모두에게서 각자가 가진 잠재력의 최선을 끌어내는 것이 미학의 원리다. 미학적 동기부여로 가능하다. 인간의 내면에 종이 있다. 그 종을 울리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공명하기로 가능하다. 울림과 떨림으로 가능하다. 소통으로 가능하다. 스스로 다가오게 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낮은 곳으로 고이게 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 규범 규구(規矩)는 콤파스와 직각자로 목수의 상징물인데 고대사회에서 우주의 질서를 의미했다. 중국의 신화시대는 삼황오제로부터 시작된다. 여러 설이 있지만 흔히 복희씨, 신농씨, 수인씨를 삼황으로 친다. 복희씨는 여왜씨와 짝을 이루는데 복희씨가 들고 있는 것이 구(矩), 여왜씨가 들고 있는 것이 규(規)다. 복희씨가 들고 있는 직각자 구(矩)를 norm 혹은 norma라 하는데 normal, 곧 standard의 의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목수의 연장에서 우주의 질서를 추상했다. 여왜씨와 복희씨가 그 콤파스와 직각자로 우주를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여왜복희씨는 태초에 우주를 처음 건설한 하늘나라의 목수부부다. 규범은 여왜씨의 콤파스다. 규칙, 규율, 규정, 규찰, 법규, 상규, 예규 등의 개념으로 전개되었다. 모두 질서를 의미한다. 콤파스는 동그라미를 그리는데도 사용되지만 콤파스의 진정한 의미는 동일한 크기의 대량복제에 있다. 목수는 처음 평지에 선을 긋고 선을 분할하여 칸을 나누는 방법으로 건축물을 설계한다. 이때 같은 크기의 칸을 대량생산해야 한다. 10미터를 1미터짜리 열개로 나눈다면 눈금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콤파스로 작도하는 것이다. 하나의 근본으로부터 대량 복제되는 것이 콤파스의 원리다. 여기서 우주의 근본원리가 콤파스의 자기복제에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지구상이 모든 생명체는 수십억년 전 하나의 단세포 생물에서 나왔다. 우주 안의 모든 별은 수백억년 전 하나의 빅뱅으로부터 나왔다. 우주는 이질적 요소를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결합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수정란의 세포분열처럼 대량의 자기복제에 의해 스스로 탄생한 것이다. 자연(自然)의 자(自)는 스스로 자다. 자연이 자연인 것은 외부에서의 인위적인 개입이 없이 내부에서 스스로 전개하여 나왔기 때문이다. 가능한가? 자기복제 원리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것이 콤파스의 복제원리다. 인간은 언제라도 의미를 추구한다. 등산객이 벼랑길을 오를 때 난간을 따라 이어진 밧줄을 잡고 따라가듯이 의미라는 끈을 따라 인생의 항로를 잡아가는 것이다. 의미란 무엇인가? 연결되는 것이다. 왜 연결될까? 복제되었기 때문이다. 형제는 부모로부터 복제되었기 때문에 친(親)으로 연결된다. 친족이 친하다는 것은 연결된다는 의미다. 가지는 줄기로부터 복제되었기 때문에 연결되는 것이다. 의미있다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며 의미없다는 것은 연결의 링크가 끊어졌다는 뜻이다. 모든 연결되는 것은 자기복제에 의하여 성립된다. 학연으로 연결되거나 지연으로 연결되거나 친족으로 연결되거나 마찬가지다. 하나의 지식이 스승에서 제자에게로 복제되었으므로 학연이 성립한다. 하나의 대지가 골목으로 나눠지면서 호별로 복제되었으므로 이웃으로 연결된다. 하나의 부모로부터 자녀가 복제되었으므로 친족으로 연결된다. 왜 인간은 규칙을 지켜야 하는가? 규칙을 어겼을 때 공동체로부터 처벌받기 때문에? 아니다. 처벌이 개입한다면 이미 규칙은 실패다. 처벌하지 않아도 저절로 규칙이 유지되므로 규칙인 것이다. 왜 강제하지 않아도 규칙이 유지되는가?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으면 내가 손해이기 때문이다. 도로에서는 교통법규를 지켜야 한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더 용이하게 목적을 달성하게 한다. 규칙은 효율을 낳는다. 하나의 대지가 둘로 나눠졌기 때문에 두 건물 사이에 골목길이 생겨난다. 이때 그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두 집은 그 하나의 골목길을 공유할 수 있다. 두 집이 각각 별도로 진입로를 개설하는 것 보다 더 효율적이다. 즉 규의 복제원리는 그 복제과정에서 표준을 낳고 그 표준이 인간에게 효율을 제공하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이윤의 근원은 규(規)에 있다. 표준은 인위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규의 복제과정에서 저절로 탄생한다. 윈도가 표준이 된 것은 MS가 요구해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모든 업체가 윈도의 기능을 복제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규(規)는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서 권력자가 작업한 결과가 아니라 근본 우주의 탄생원리다. 그것은 타인을 배려함이다. 왜 배려하는가? 복제되었기 때문이다. 가로선 위에 세로선을 그으면 두 칸이 탄생한다. 선은 하나를 그었는데 칸은 둘이 탄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하나의 독립된 구획을 얻을 수 있다. 정사각형 가운데 십자선을 그으면 단지 두번 그었을 뿐인데 네 칸이 얻어진다. 두 배의 이익이 얻어진다. 그러므로 규는 자연법칙이다. 인간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타인을 배려한다. 누군가가 가로선 위에 세로선을 긋고 있다면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 선긋는 사람을 배려하면 공짜로 구획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길을 만들고 있다면 배려해야 한다. 길은 그 사람이 만들었지만 그 길 끝에 내가 집을 지으면 공짜로 그 길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길을 개설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는다. 공짜로 이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규(規)는 배려다. 왜 배려하는가? 혜택을 얻기 때문이다. 내가 양보할 때 타인도 양보하면 짜릿해진다. 그러한 쾌감의 경험에 의해 인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규범을 지키게 된다. 누군가가 연주하고 있다면 발길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얻는다. 그 연주자도 관객을 얻어 행복하다. 그럴 때 미소짓는다. 나의 미소에 타인이 미소로 화답할 때 쾌감은 배가된다. 공명이 있고 전율이 있다. 울림이 있고 떨림이 있다. 스포츠경기를 시청하는데 누군가가 고함을 지른다면 불쾌해질 것이다. 그러나 슛이 골문을 넘는 순간 모두가 일어서서 일제히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모두가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쾌감은 배가된다. 그것이 규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멋진 합창이 일어난다. 공감이 있다. 갈채가 있다. 그것이 규(規)다. 인간의 삶이 규에 의해 자율되는 것은 규칙을 학습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와 내가 하나의 근본으로 부터 복제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 도덕 인간의 마음에는 나를 나로 인식하게 하는 원리가 있다. 그것이 양심이다. 양심은 곧 자기 정체성이 있다. 자기동일성과 자기연속성에서 비롯한 자기일관성이 자기 정체성을 규정한다. 자기동일성은 공간에서의 행동을 일치시키고 자기연속성은 시간에서의 행동을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일관성을 얻는다. 그 일관성에 의해 나를 나로 인식하게 된다. 곧 자기 정체성이다. 그것이 양심이다. 양심을 잃으면 정체성을 잃는다. 정체성을 잃으면 나를 나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 경우 행동의 일관성이 사라진다. 노예의 삶이 그러하다. 노예가 정체성을 잃는 이유는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예에게는 내가 사는 집이 내집이 아니고 내가 쓰는 연장이 내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내것이 아니다. 내 가족도 내것이 아니고 내 나라도 내것이 아니다. 모두 주인의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나로 인식하지 못한다. 양심은 선(善)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다.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한다 해서 양심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양심은 인간의 삶이 동기와 보상 사이에서 일사이클 순환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몸짓이다. 인간이 행하는 이유는 동기가 있기 때문이고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적과 과정과 결과를 하나의 테마로 꿰어내는 데서 자기정체성이 얻어지는 것이며 나를 나로 인식하게 되고 양심을 따르게 된다. 자기정체성이 파괴될 때 동기와 보상의 고리가 끊어져서 삶의 보상이 사라진다. 허무해진다. 노예가 그러하듯이 시키니까 하는 것이며 처벌이 두려워서 하는 것이며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다. 불완전해진다. 인간의 삶에서 개별적 행동 하나하나에 심리적인 보상이 주어진다. 게임을 하면 그 얻은 점수만큼 쾌감을 얻는다. 정체성의 파탄은 그 동기와 보상의 고리를 끊어 게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범죄자는 사회 안에서의 모든 동기를 상실한다. 스포츠의 관전자가 한국팀을 응원하거나 연속극의 시청자가 주인공을 옹호하는 심리는 동기와 보상의 연속성을 이어가려는 마음이다. 곧 양심이다. 자기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다. 범죄자는 자기 정체성을 잃었으므로 한국팀을 응원하는 즐거움이 없고 주인공을 옹호하는 즐거움이 없다. 범죄자는 반사회의 입장에 섰으므로 한국팀의 승리가 그와는 무관한 일로 되는 것이다. 범죄는 나쁜 짓이 아니라 실패하는 짓이다. 경찰이 지켜보는 앞에서 도둑질을 한다면 곧 잡히고 말 것이다. 도둑질은 실패다. 법질서라는 경찰이 지켜보는 앞에서 범죄를 저지른다면 곧 자승자박이 된다. 모든 범죄는 자기정체성의 실패, 자기일관성의 실패다. 자기동일성과 연속성의 실패다. 가정에서의 나와 직장에서의 나가 유리되어 따로 노는 것이 자기동일성의 실패다.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가 이어지지 않음이 자기 연속성의 실패다. 인간이 범죄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실패로 되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을 범죄자로 규정하게 된다. 대부분의 범죄자가 체포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범죄자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양심의 원리다. 만약 인간에게 양심이 없다면 어떨까? 자기 연속성이나 동일성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딱 한번 범죄를 저지르고 다시 평범한 사회인이 되어 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일관성을 추구하도록 세팅되어 있기 때문에 한번 범죄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자신을 범죄자로 규정하여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 일관되게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범죄자가 사회의 교도를 받지 않고 평범한 이웃이 되어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양심의 원리에 의해 스스로 자신을 범죄자로 규정하여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다가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양심은 인간을 항상 선(善)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선이든 악이든 일관되게 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며 일관되게 악을 행하면 결국 체포되고 만다. 양심은 자신의 행동을 일관되게 세팅해 두는 것이다. 완전범죄는 실패한다. 완전범죄를 꿈꿀 정도의 지능이 있는 인간은 자신을 범죄자로 규정하는 실패를 저지르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를 정도의 비합리적인 인간은 오션스일레븐류의 영화에 나오는 치밀한 협력을 유지하지 못한다. 왜 범죄를 저지르지 말아야 하는가? 양심의 원리에 의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범죄자로 규정하게 되고 그 때문에 재범을 저지르고 언젠가는 구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양심이 당신을 그렇게 만든다. 그것이 인생의 무게다. 누구라도 자기정체성을 쫓아가는 것이며 그것은 일관되게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며 그것은 직장에서의 나와 가정에서의 나를 일치시키고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만약 사회에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면 이는 범죄자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그 자체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윤리의 실패, 이상주의의 실패, 미학의 실패, 규범의 실패가 도덕의 실패를 초래한다. 인간은 원래 선하다. 양심이 있어서다. 모든 악은 치명적인 실패다. 특정한 찬스에서 악을 저지르고 다시 선한 인간으로 되돌아와 상식의 울타리 안에서 평범하게 사는 따위는 불가능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회가 성공할 때 범죄는 사라진다. 윤리가 성공하고, 이상이 성공하고, 미학이 성공하고, 규범이 성공하면, 도덕의 실패는 불가능하며 부도덕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 개인의 실패는 있어도 사회전체의 실패로 확대되지 않는다. 윤리와 도덕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 사이에 이상과 미학과 규범이 있다. 윤리는 하늘의 원리에서 인간의 삶을 제어하는 근본을 끌어오고 도덕은 인간의 내부의 양심에서 그 원리를 끌어온다. 이상과 미학과 규범은 그 둘 사이에서 연결시킨다.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킨다. 이상은 기준을 정하고 미학은 여럿 중에서 판단하여 선택하게 하며 규범은 이를 행동으로 연결시킨다. 도덕의 사공이, 윤리의 불빛에 의지해, 이상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미학의 키를 조종하며 규범의 노를 저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삶의 항해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삶의 다양성 속에서도 조화될 수 있다. 멋진 화음을 끌어낼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