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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6851 vote 0 2007.12.12 (23:04:37)

● 소유

所有(소유)의 所(소)는 바 소다. 바는 장소다. 그러나 그 장소가 공간 상의 주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메커니즘이다. 모든 존재는 어떤 벼리에 딸리어 기능하고 있으며 그 딸리어 있는 장소가 바다.

예컨대 ‘아는 바 없다’와 ‘모른다’는 다르다. ‘아는 바’의 ‘바’가 없다는 것은 앎의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알았는데 잊어먹은 것과 다르고, 목격했는데도 깨닫지 못한 것과 다르다. 앎을 성립시킬 그 이전단계가 원초적으로 없다는 말이다.

소유는 반대로 그 ‘소(所)’가 있고 ‘바’가 있는 것이다. 저것이 내것이라는 것은 저것의 소속한 바가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내 존재의 명목에 딸리어 있으며 나에 의해서 저것이 비로소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유(有)가 먼저 있다. 유(有)는 어딘가에 딸리어 소속됨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다. 붓은 서예가를 만났을 때 비로소 붓이 되고, 칼은 무사를 만났을 때 비로소 칼이 되고, 도끼는 나뭇군을 만났을 때 비로소 도끼가 된다.

그것이 존(存)이다. 존(存)은 명목이다. 다른 유(有)가 의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주는 것이 명목이다. 유(有)는 존(存)을 얻었을 때 비로소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존(存)을 얻은 유(有)가 곧 존재다.

무엇인가? 추상적인 약속이 구체적인 물질을 지배한다. 예컨대 소유권은 사람들 사이의 추상적 약속에 불과하다. 그 추상이 구상의 세계를 지배한다. 부도수표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종이로 된 수표는 구체적인 존재이지만 그 약속이 부도나는 순간 유(有)에서 무(無)로 돌변한다. 추상인 존(存)의 명목이 오히려 뚜렷하고 구체적인 물질이 오히려 기능에 있어서는 모호하다.

실제로 그렇다. 고립된 무인도라면 천금의 가치가 있는 보배라 할지라도 아무 것도 아닌 셈으로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것은 오히려 추상 속에 있다. 현찰은 오히려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사랑이 오히려 믿을만 하다.

자유가 오히려 믿을만 하다. 인권이 오히려 믿을만 하고 이성이 오히려 믿을만 하다. 진정 믿을 수 있는 것은 이성 뿐이다. 이성이 뒤에서 보증을 서 주어서 비로소 그 지폐에 기록된 액면이 제 값을 하는 것이다.

소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명목을 주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바’를 가진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 제 이름을 주고, 제 역할을 주고, 제 자리를 주는 것이 명목이다. 그러나 우리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러할 수 있다면 터럭 하나 소유하지 않더라도 이미 천하를 소유한 것이며 반면 그러하지 못하다면, 제 이름을 주지 못한다면, 살아나게 하지 못하고, 꽃 피게 하지 못하고, 노래하게 하지 못한다면 허무 뿐이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 준다면, 미인을 웃게 하지 못한다면, 만유로 하여금 제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하지 못한다면 천하를 소유해도 허무 뿐이다. 천금을 소유한다 해도 실상 그 재산의 관리인으로 고용된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천하에 제 이름을 주고 천하로 부터 제 소리를 끌어내는 것이 진짜다. 그것이 소유의 진정한 의미다. 그 사람이 가진 가능성의 백프로를 끌어내는 것이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과연 소유할 수 있을까?

진정한 소유는 오히려 무소유에 가깝다. 개입하지 않고, 조종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고도, 작위하지 않고도 온전히 제 이름을 주고, 스스로 춤 추게 하고 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게 하는 것이 참된 소유다.

100억짜리 바이얼린에서 100억어치 소리를 끌어내는데 성공한 자가 그 바이얼린을 소유한 자다. 그렇지 못하다면 소유가 아니다. 그런 사람의 주장하는 소유란 그저 그 사람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이미 우리가 저 산과 저 강과 저 하늘과 부는 바람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그 자연으로부터 아무 것도 끌어낼 수 없어서 그만 부족함을 느낀다면, 그래서 소유가 부족하다면, 천금을 가지고 있다해도 역시 부족할 것이다.

 

● 자아

인체에는 약 10조개의 세포가 존재하며 그 중 4조개 정도가 인간 종(種)에 속하고 나머지는 인체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들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내 몸뚱이 안에서 최대 다수파에 불과한 것이다.

7년이 지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부분의 세포들이 교체된다고 한다. 7년 전의 나는 이미 분해되어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없다. 그렇다면 7년 전의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일까? 도무지 나란 무엇인가?

우리는 ‘나’라는 것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고 믿지만 실로 거품 같고 지푸라기 같고 이슬 같은 것이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내게 역할을 주고, 일거리를 주고, 칭찬해주고, 인정해 주므로 내가 이곳에 있다고 느낄 뿐이다.

한자어 아(我)는 손(手)+창(戈)으로 손에 창을 쥐고 적을 막는 모습을 형상하고 있다. 나는 너에 대해서 나인 것이다. 너와 관계를 맺으므로 나인 것이다. 너는 세상이다. 세상과 맞서는 나가 나다.

나는 그 아(我)의 손(手)에 창(戈)을 쥐고 싸우는 즉 세상과 나 사이의 투쟁관계 속에서 나의 결정권이 미치는 범위다. 그 쟁투 속에서 내가 점령한 영역 만큼이 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 밖에도 내가 있다.

나의 명성, 나의 지위, 나의 평판, 나의 업적은 내 몸뚱이 안에 있지 않다. 내 밖에도 내가 파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란 내 몸뚱이와 무관하게 세상과 맞서 싸우는 나의 정치적 의사결정이 미치는 영역 전부다.

나는 그렇게 성장한다. 내 밖에도 나의 거점을 확보해 두고 점차 나를 넓혀 나간다. 그것이 자아의 성숙이다. 반대로 나의 몸뚱이 조차도 나의 의지대로 못하고 노예처럼 타인의 지배와 감시를 받는다면 그것이 자아의 미성숙이다.

내 몸뚱이 정도는 확실히 내가 지배할 수 있다 싶겠지만 의미없다. 다이어트를 하면 작아지고 밥을 먹으면 커지는 나는 진짜가 아니다. 생물학적인 몸뚱이의 나는 의미없다. 진정한 나는 따로 있다.

나는 나의 계속성, 나의 일관성, 나의 정체성을 책임짐으로써 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그것이다.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의 나 말이다. 만약 내가 나의 본능에 지배된다면 감정에 지배된다면 누군가가 나를 조종할 수 있다.

타인은 나를 약올리는 방법으로 나를 화나게 할 수 있다. 타인이 나를 웃고 울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진정 나의 의지로 제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나를 뺏긴 것이다. 나의 일부를 내준 것이다. 내가 점령당한 것이다.

생존의 본능을 넘어, 죽음의 공포를 넘어, 타인의 시선을 넘어, 사회가 준 역할을 넘어 온전한 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진짜 나는 따로 있다. 과거의 체험에서도 해방되어야 한다. 습관과 타성에서도 해방되어야 한다.

타인에 의해 평가된 나는 가짜다. 사회로 부터 인정된 나도 가짜다. 본능의 나도 가짜다. 그 모든 것을 끊어내고 신 앞에서의 단독자로 선 나가 나다. 세계정신과 대면한 나가 나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미처 나를 찾지 못한 것이다.

진리의 편, 세계의 편, 진보의 편, 역사의 편, 문명의 편에 선 나가 진짜 나다. 일찌기 나는 그곳으로부터 유래하여 이곳에 파견되어 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떨치고 일어나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저 높은 곳에서 왔으며 타고난 나의 본능, 과거의 경험한 추억, 지켜보는 이웃의 시선, 가족의 보호, 사회에서의 역할은 임시로 맡아 나를 키우는 인큐베이터에 불과하다. 잠시 거쳐가는 하나의 정거장에 불과하다.

그 본능의, 그 경험의, 그 이웃의, 그 가족의, 그 사회의 나로부터 떠나 본래의 나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으로, 생명으로 그리고 신의 완전성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온 곳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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