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노자 뱀은 머리와 꼬리가 있다. 공자는 뱀의 머리를 잡으라고 했다. 머리를 해결하면 꼬리는 자연히 따라온다. 노자는 뱀의 꼬리를 잡지 마라고 했다. 그러다가 물리는 수가 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어디를 보느냐다. 뱀의 머리에 주목하느냐 꼬리에 주목하느냐. 사건의 원인에 주목하느냐 결과에 주목하느냐? 시간의 미래를 바라보느냐 현재에 매몰되느냐? 엄마곰을 잡으면 새끼곰은 자연히 따라온다. 공자의 관심은 엄마곰이다. 새끼곰 잡다가 엄마곰한테 물린다. 노자의 관심은 만만한 새끼곰이다. 관점의 차이가 있다. 사건 전체를 보느냐 부분을 보느냐. 봄에 파종하면 가을의 수확은 자동이다. 가을의 수확에만 집착하면 그게 수박서리다. 감옥에 갇힌다. 결과에 매몰되면 안 된다. 노자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마라고 했다. 공자는 해야 할 것을 하라고 했다.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은 원래 하는 동물이다. 어쩔 수 없다. 호르몬 때문이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진보할 수밖에 없다. 문명할 수밖에 없다. 개혁할 수밖에 없다. 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라고 태어났으므로 그렇게 해야 한다. 인간은 원래 하는 동물이므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선순위 때문이다. 해야 하는 것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 삼갈 것을 삼가고 시급하지 않은 것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그냥 막연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게 죽음이다. 그렇다면 당장 해야 할 급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의 디자인이다. 문제는 거짓 권력이다. 재벌 3세의 세습권력은 가짜다. 제도가 정밀하지 못해서 시스템이 꼬인 것이다. 진짜 권력은 에너지 효율성의 자연법칙이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권력은 가짜다. 무형의 권력이 진짜다. 권력은 공의 것이다. 사유화된 권력은 가짜 권력이다. 깨달음은 호르몬이다 깨달음은 태권도 단증과 같은 것이다. 필요가 없다. 권투는 단이 없는데 태권도는 왜 단이 있지? 바둑은 왜 단이 있지? 시인과 작가는 왜 등단을 하지? 미친 짓이다. 언론사 신춘문예는 혁파되어야 할 적폐다. 바둑은 승단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협회 전시행정이다. 태권도 단증팔이는 애들 코 묻은 돈이나 빼먹는 비겁한 상술이다. 해동검도 칼장사는 차라리 납득이 된다. 사실 도복도 필요가 없다. 츄리닝이면 완벽하잖아. 프로야구도 선수협에서 승단제도 만들어 1군에 올라오면 프로 1단이라고 써서 단증을 발급하지 그러셔? 가수도 협회에서 ‘가수협회장 김흥국’이라고 써서 도장 하나 박아주고 그러지 그러셔? 그러면 아마 제대로 웃길 수 있을건데. 개콘이 살아날 판이다. 깨달음은 하나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으로 얻는 것은 호르몬밖에 없다. 사랑하면 호르몬이 나와준다. 깨달으면 호르몬이 나온다. 그뿐이다. 거짓 깨달음도 호르몬이 나온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체험이다. 그래봤자 별수 없다. 대부분 도로 원위치 된다. 그러나 미션을 가진 사람에게는 중요하다. 운명의 갈림길에 선 사람에게 중요하다. 당신이 깨달아봤자 사흘 안에 도로아미타불 되는 것은 당신이 여태 진리의 미션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운명의 갈림길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임무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호르몬이 나와야 한다. 윤봉길 의사가 백범 김구에게 폭탄 두 발 건네받을 때다. 깨달음의 의미는 그런 거다. 천하에 대한 자세의 변화다. 태세전환이라야 한다. 뱀의 머리를 쥔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뱀의 꼬리를 쥔 자는 손등을 물린다. 깨달음은 그저 뱀의 대가리를 쥐는 것이다. 용감한 자가 뱀의 대가리를 쥔다. 호르몬이 나오면 가능하다. 기독교라도 마찬가지다. 구원도 천국도 내세도 부활도 은혜도 영광도 그저 호르몬의 변화 체험에 불과하다. 그냥 단어다. 좋은 소식은 그것이다. 호르몬이 바뀌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 하나를 전달하려고 온갖 단어가 소용된다. 호르몬이 바뀌면 원수라도 사랑한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와 무리가 체험한 것은 호르몬의 변화뿐이다. 미션을 받으면 호르몬이 바뀐다. 당신은 진리 안에서 미션을 받지 못했으므로 의미 없다. 철학은 권력의 디자인이다 철학은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의 모색이다. 그게 전부다. 철학의 적은 허무주의다. 무신론은 허무주의로 직행한다는 병폐가 있다. 허무주의는 삶의 부정이요, 인간의 부정이요, 문명의 부정이요, 모든 것의 부정이다. 그렇다면 언어도 부정되어야 하므로 닥쳐! 언어를 부정하면 말이 필요 없으니 닥쳐야 하는 거다. 허무하다면 인간과 바퀴벌레의 차이는 없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없다. 사이코패스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없다. 사람을 죽이든 살리든 그 차이는 없다. 모든 것은 뇌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전기신호에 불과하다. 그냥 칼라다. 사랑도, 행복도, 고통도, 희망도 그저 눈앞을 스쳐 가는 색깔에 불과하다. 허무의 반대편에 무엇이 있나? 의미가 있다. 의미는 무엇인가? 권력이다. 인생에 답이 있다는 것은 권력이 있다는 거다. 권력이 있고 그 권력의 권력이 있다. 권력들의 최종보스가 있다. 그게 있으면 된다. 나를 개입시키면 안 된다. 권력은 자연법칙으로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원시인은 동굴에서 가만히 생각한다. 내일도 해가 뜰까? 내일 해가 뜬다는 보장이 있나? 믿을 수는 있는가? 확실한가? 그런데 해가 뜬다. 법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행동할 수 있다. 서열이 있는 거다. 먼저 자연법칙이 있고, 그래서 내일 해가 뜨고, 그러므로 내가 앞날을 계획할 수 있다. 이들 사이에 작동하는 의사결정 서열이 권력이다. 그게 있기만 하면 된다. 우주 안에 권력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우리가 단단히 매달려야 하는 진리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내가 사랑하는 이유, 내가 성공하려는 이유, 내가 도전하는 권력게임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합이 열렸기 때문이다. 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엔진이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담할 수 있다. 시합이 열렸으므로 그라운드에 진입하여 선수로 뛸 수 있다. 권력의 사유화는 안 된다. 누군가의 권력이 아니라 자연법칙의 힘이다. 내일도 해가 뜬다. 해가 뜨면 기온이 올라간다. 새싹이 나고 수풀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 그 순서가 중요하다. 일단 해가 떠야 한다. 그런데 과연 해가 뜨는가? 소행성이 충돌하면 3년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는데. 해가 뜨기만 하면 줄줄이 사탕으로 사건은 이어지는가? 해가 뜨면 기온은 오르는가? 기온이 오르면 새싹이 나는가? 새싹이 나면 황폐해진 수풀이 복원되는가? 꽃이 피고 기어이 열매가 맺는가? 강남 갔던 제비가 때맞춰 돌아오는가? 약속이 지켜지는가? 사건이 연결되는가? 나의 작은 외침이 커다란 메아리로 돌아오는가? 그렇다면 우리 행할 수 있다. 철학은 주체와 타자의 대결이다. 51 대 49로 주체가 우위에 서면 세상은 비로소 작동한다. 호흡은 시작된다. 호르몬이 나와준다. 사람이 사랑한다. 아기는 태어난다. 사건은 연결된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반대로 타자가 힘의 우위에 서면 당한다. 치인다. 종속된다. 길들여진다. 바보된다. 세상은 허무해진다. 철학은 사건에 뛰어들어 주체를 51로 만드는 게임이다. 사건은 연결되고 우리는 다음 스테이지로 전진할 수 있다. 대표성이 중요하다. 한 명이 깨달으면 모두 깨달은 것이며 예수가 대표로 속죄하면 모두 죄가 없어진다. 신이 있고 방향성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연의 집합이라면 허무주의다. 세상은 우연의 집합이 아니라 권력에 의한 연결이다. 예정된 길로 가는 것이다. 설계한 대로 가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성공도, 사랑도, 행복도 무의미한 스쳐감이 아니고 목적지가 있다. 완전성이 있다. 방향성이 있다.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서열이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연결되어 커다란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이면 충돌하여 상쇄되지만, 연결되면 양의 피드백이다. 호자 나스레딘의 추억 어떤 이웃이 호자 나스레딘의 집에 당나귀를 빌리러 왔다. 이웃은 "선생님, 이웃마을로 물건을 운반하려는데 선생님의 당나귀를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나스레딘은 당나귀를 빌려주고 싶지 않아서 "이미 다른 사람이 빌려갔소."라고 둘러댔다. 그때 당나귀가 벽 뒤에서 울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님, 당나귀가 벽 뒤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나스레딘은 화를 내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 당나귀를 믿습니까?" 그때 기레기가 말했다. "범죄자 김봉현 말을 믿겠습니까 범죄자에게 술 얻어먹은 개검사 말을 믿겠습니까?" |
자연의 위계서열을 깨닫고 애쓰는 자에게,
허무는 없다
그는 대표성을 가지고 선수로 뛴다
그의 수고는 공公적인 것이다
스스로 우리가 애쓰는 철학이,
공적인 권력서열을 디자인하고 구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