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세상을 사건의 구조로 바라본다. 구조는 변화를 일으키는 둘 이상의 관계와 메커니즘과 시스템이다. 시스템 내부에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그 안에서 구조가 결정하고, 그 구조 안에서 관계가 전달하고, 그 관계 안에서 변화로 나타난다. 곧 세상은 시스템, 메커니즘, 구조, 관계, 변화다. 구조는 다자 간의 의사결정구조다. 구조론은 주어진 대상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자체의 질서를 추적한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의사결정구조다. 대상 내부에 대칭을 중심으로 게임을 해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방식으로 의사결정하는 구조가 있다. 의사결정은 그러한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를 소모한다는 것이 엔트로피다. 계 내부에서 자원들이 51대 49로 가르고 싸워서 49가 지고 배제되면 나머지 51에서 다시 51과 49를 가르므로 단계마다 자원들이 지속적으로 의사결정에서 배제된다. 토너먼트처럼 사건이 진행될수록 지속적으로 자원들이 의사결정에서 배제되므로 마지막에는 대칭구도가 사라져서 의사결정이 불가능해지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인간의 이념, 도덕적 당위, 사회적 윤리와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구조가 있으며 우리는 그 자체의 구조를 존중해야 한다. 정신병자를 말로 설득할 수 없듯이, 호르몬에 의해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을 도덕적 감화나 논리적 설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시장은 시장의 논리로 해결하고, 전쟁은 힘의 논리로 결판내듯이, 인간의 사회적 본능에 따른 호르몬 문제는 호르몬의 논리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며 이렇듯 어느 분야든 그 바닥의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논리가 있으며 우리는 그 논리를 따라가야 한다. 모든 사건이 공유하는 하나의 자체 논리는 원인에서 결과까지, 머리에서 꼬리까지, 시작에서 종결까지, 닫힌계를 중심으로 내부에 대칭을 조직하여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단계를 거치며 에너지 모순을 해결하는 형태로 사건이 진행된다는 법칙이다. 계의 본래 상태는 안정상태이며 어떤 계기로 계 내부에 모순이 발생하면 그 모순이 해소되어 계가 안정될 때까지 사건은 진행된다. 그 과정은 동시에 맞물려 돌아가는 매개변수의 숫자에 따라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다. 안정된 상태는 계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제거되어 무질서도가 증가한 즉 자체의 통제가 불가능한 죽은 상태다. 사건은 산 것에서 게임이 촉발되어 죽을 때까지 진행하고 죽으면 멈춘다. 변화한다는 것은 동시에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계 내부에서 제거되어 사라진다는 의미가 되므로 무질서도 증가는 계 내부에서 더 이상 변화를 일으킬 수 없게 한다. 우리는 복잡 곧 같은 것의 반복인 중복과 이질적인 것이 섞인 혼잡을 구분하지 않으므로 사건이 복잡해져서 이차효과, 후방효과, 연쇄효과로 뒤섞여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다고 여기지만 닫힌계를 지정하고 보면 명백히 사건은 한 방향으로 진행함을 알 수 있다.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전체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계 내부에서 진행되는 변화는 모순의 해소방향으로 진행하며 모순이 해소되면 변화의 동력이 소멸되므로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개입하면 변하지만 계 내부의 자체적인 변화는 완벽하게 추적할 수 있다. 무한동력의 속임수와 같이 외부에서 개입하는 방법으로 일시적인 눈속임은 가능하지만 닫힌계의 지정 곧 사건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선을 긋고 보면 속일 수 없다. 도구를 가진 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다르다. 대개 극단으로 쏠려서 자기편을 끌어모아 숫자에 의지하는 감성팔이 수법을 쓰지만 이는 약자의 포지셔닝이므로 불리하게 시작한다. 도구가 없으면 먼저 대상을 통제하는 지렛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변죽을 올려서 상대가 먼저 나를 공격하게 유도하는 기술을 써야 하므로 스스로 매를 버는 즉 불리한 포지션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 얕은 수법을 쓰지 않고 묵묵히 계를 장악하고 내부를 통제하는 강자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도구를 가져야 강자의 시선을 얻는다. 구조론이 도구다. 도구가 없는 약자는 멀리서 깐죽대다가 한 대 줘터지고 난 다음 '동네방네 사람들아 이내 말씀 들어보소' 하고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서 다수의 이목을 끌고 거기서 에너지를 조달하여 그것으로 도구를 삼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강자는 도구를 쥐고 있으므로 언제든 선제대응할 수 있다. 그냥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구조론연구소의 목적은 도구를 가지게 하고, 도구를 가진 자의 눈을 얻게 하고, 도구를 가진 자의 방법을 쓰게 하는 것이다. 패거리에 연연하지 않고 집단에 아부하지 않고 의연하게 천하인의 길을 가야 한다. 구조론을 배우지 못한 소인배들은 그들에게 아부하지 않는 구조론의 당당한 태도가 불편하겠지만 개의치 않는다. 구조론연구소는 정치 사이트가 아니며, 그러므로 집단에 아부하지 않으며, 진리는 신성한 것이며, 도구를 쥔 자는 굴복하는 법이 없다. |
지극히 효율적인 장치를 만들면
100의 힘으로 시작해서 99를 타깃에 전달하는
중간 손실을 최소화 하는 좋은 기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100의 힘이 51 대 49로 나눠지지만
51이 방향을 정하면 49가 따라오므로
중간손실이 0에 근접하는
즉 진공 속에서의 무한운동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에너지를 빼먹으려고 하면 손실이 많아집니다.
1회의 사건에 5회 방향전환이 일어나므로
그때마다 조금씩 손실이 누적되는 거지요.
100에서 51>26>14>8로 가는건 설명하기 좋게 하려고 하는 말이고
반드시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대선에 이긴 문재인을 국민이 다 지지해야 하지만
즉 홍준표 한 명 빼고 모두 문재인 지지로 가야하지만
사실은 구조적 결함 때문에 그렇게 안 되지요.
특히 공무원이 하는 일은 단계를 거칠때마다 반토막이 납니다.
하청업체가 재하청을 줄때마다 반토막이 납니다.
100>51>26>14>8로 가는건 현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일이고
이상적인 보일러를 만든다면 90퍼센트 효율이 가능하지만
고작 50퍼센트에서 근래 80퍼센트까지 올라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결론은 숫자에 집착하면 안 되고
효율 100퍼센트는 이론적으로 절대 없습니다.
에너지를 빼먹지 않고 영구운동을 시킬 수는 있습니다.
원인이 결과보다 크다는 말은 에너지가 크다기 보다는 일이 크다는 말입니다.
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일은 물리학에서 물체에 힘을 가했을 때 힘이 가해진 방향으로 움직인 거리를 뜻한다.
그런데 물체에 어떻게 힘을 가하지요?
여기서 수학적인 고민이 나오는데 방향을 정하려면 둘로 나눠야 하는데
둘로 나눌 수 없습니다.
1명이 있는데 둘로 나누는 방법은 없지요.
두명은 나눌 수 있습니다.
3명은?
99명을 정확히 둘로 나눌 수 없습니다.
수학적으로 절대 50 대 50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자투리는 생길 수 밖에 없으며
그 자투리가 코어가 되고 코어를 움직이는 형태로 일이 진행되므로
에너지 손실은 수학적 필연인 것입니다.
지구가 돈다고 해도 지구의 중심점은 돌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적 모순은 수학과의 충돌에 따른 존재의 필연입니다.
'물체+힘'이 질이고 99명이다. 자연에는 딱 떨어지는 100명 같이 짝수형태의 모임은 잘 없을 뿐더러(100.0001) 딱 떨어진 대칭상태는 모순이 없으므로 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이 벌어진 것은 분명 모순이라는 연료가 작용한 것이다. 이는 사건의 출발이란 딱 떨어지는 대칭이 아닌 자투리 모순이 촉발된 비대칭 상태라는 뜻이다.
'원인이 결과보다 크다는 말은 에너지가 크다기 보다는 일이 크다는 말입니다. 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대목.
->외부로부터 추가적인 연료 공급이 없을 시 내부역량으로만 일은 진행한다. 연료인 중간손실은 아무리 작더라도 무조건 필요하긴 하다. 중간손실이 크면 이어지는 다음 일의 규모가 작아진다. 중간손실이 연료지만 소모되는 연료가 크다고 좋은 건 아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다음단계로 한번 진행하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중간손실을 연료로 표현하긴 했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중간손실이 에너지인 건 아니다. 중간손실은 그냥 한 번 쓰고 버리는 막대기일 뿐이므로 도구의 크기는 작을수록 효율적이다. 숫자를 지우고 정리해보긴 했는데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득 노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도올이 노자사상이 자연철학이라는 개소리는 집어쳐라. 노자는 정치철학이고 아나키스트였다며..겁나 떠들던 장면과 더불어....존엄 의연 당당으로 가는 구조론의 도구화를 열열히 응원합니다. 꾸우뻑
상부구조에서 '100->51' 판정이 이뤄지면 이 비율이 유지된 채 하부구조에서 '51->26(대략)'판정으로 복제된다. 판정에 동원되는 계의 자원이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보다 더 크므로 원인이 결과보다 크다.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은 판정 원인 100이 판정 결과 49,51보다 크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사실 49,51 중에서 49는 버려진 쪽이므로 에너지가 남아있는 51만을 100과 비교해야 맞기 때문이다.
즉 원인인 전체가 결과인 부분보다 크다는 말은 원본 100이 복제본 51보다 크다는 쉬운 말이다. '100+ -> 51+49'을 더 단순화시키면 '100+ -> 51+'이다. 이런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