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칭에서 비대칭으로 도약하라 세상은 대칭이다. 대칭에는 축이 있다. 축은 비대칭이다. 대칭되는 둘이 겹치는 부분을 공유하는 것이 축이다. 축은 대칭구조 안에서 비대칭이다. 세상은 대칭적으로 존재하지만 비대칭적으로 통제된다. 우리는 축을 이동시켜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 계 안에서 자체적으로 진행되는 자연계의 모든 사건은 축의 이동 형태로 일어난다. 문제는 축의 발견이다. 상대성은 축이 없고 절대성은 축이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대칭을 찾으려 하지만 자신이 대칭을 따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뇌 안에서의 알고리즘에 의해 깨닫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대칭에 매달리는 것이다. 상대성에 머무르며 관측자를 개입시키는 주관적 판단을 하게 된다. 그게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다. 들지 못하면 들린다. 밀지 못하면 밀린다. 먹지 못하면 먹힌다. 반작용의 법칙이다. 상대를 통제하려다가 거꾸로 통제당한다. 대상을 설명하려다가 반대로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만다. 축을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측자 자신이 판단기준이 되면 외부인이 볼 때 반대로 관측대상을 기준으로 관측자가 설명되는 역설이 일어난다. 절대성을 따라야 한다. 객관적 판단이 필요하다. 그것은 관측자를 배제하고 대상 내부에서 대칭구조를 찾는 것이다. 물건을 든다면 자신이 저울이 된다. 물체를 들어보고 무겁다고 말한다면 반대로 물체를 기준으로 자신이 가볍다는 사실을 들킨다. 짜장면이 맛있다거나 짬뽕이 맛없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판단기준이다. 외부에서 그 장면을 지켜본 사람은 반대로 해석한다. 저 사람이 배가 고팠나 보구나. 짜장면의 맛을 설명했는데 거꾸로 자신의 굶주림을 들켰다. 천칭저울을 보자. 천칭저울은 팔이 둘이고 가운데 축이 있다. 내부에 자체 질서가 있다. 내가 손으로 물체를 들면 반대로 물체의 무게에 내가 들리지만 천칭은 객관적이다. 절대성이다. 천칭은 축이 있기 때문이다. 축이 없으면 상대성이다. 절대성은 축을 중심으로 두 접시 사이의 대칭이고 상대성은 축이 없이 물체와 내가 직접 대칭된다. 짜장면과 내가 대칭된다. 내가 물체를 들어보고 무겁다고 말하면 내 체중의 가벼움을 들키게 되고 내가 짜장면이든 짬뽕이든 먹어보고 맛있다고 말하면 나의 배고픔을 들킨다. 대칭의 축을 찾지 못하면 대상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럴 때 화가 난다. 내가 화가 났으므로 아마도 네가 잘못한 게 틀림없다 하는 식의 억지를 쓰게 된다. 감성팔이에 신파로 흘러간다. 감정과잉이 되면 진리에서 멀어진다. 막연한 심리학적 접근, 감정에의 호소, 동정심의 자극은 잘못이다. 도구가 없는 자들의 좌절감이 분노로 나타난다. 태극기 할배들은 도구가 없다. 그래서 화가 난 것이다. 무엇인가? 도구야말로 나와 대상을 연결하는 축이다. 그러므로 대상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구조론은 도구다. 지식은 도구다. 과학은 도구다. 그 도구를 가져야 한다. 도구중심적 사유, 절대성의 사유, 객관적 사유를 익혀야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는 중재인이 필요하다. 변호사가 필요하다. 안내인이 필요하다. 도와줄 전문가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직접 대면하면 도구가 없으므로 분노하게 된다. 당황하게 된다, 더욱 나빠진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보통은 직접 대면하고 사과받기를 사람들은 원하지만 그게 위험한 감성팔이가 되기 쉽다. 더욱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상대를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에 흥분해서 될 일도 안 된다. 반드시 중간에 축을 끼워야 한다. 도구를 써야 한다. 변호사를 세워야 한다. 검증된 딜러 없이 중고차 사면 안 된다. 많은 경우 직거래는 위험하다. 도구가 필요하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업자가 중간에서 협잡하기도 하지만 시스템을 발달시켜 해결할 일이다. 대칭이 축을 가지면 도구다. 망치는 축이 없는 듯하지만 손목이 축의 역할을 한다. 축이 없으면 밖에서 겉돌게 된다. 그래서 화가 난다. 축을 박으려면 외부를 닫아걸고 닫힌계를 적용하여 내부에서 에너지를 통제해야 한다. 지렛대를 박아야 통제된다. 검사든 의사든 업자든 조중동이든 정부가 그들을 통제할 지렛대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대칭만 찾으면 다 안다고 여기지만 하나의 단서를 잡은 것이며 축을 장악해야 아는 것이다. 핸들을 장악해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아는 게 아니다. 말은 재갈을 물려야 통제되고 개는 목줄을 매야 산책시킬 수 있다. 둘이 공유하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대칭 안에서 비대칭이며 언제나 일방향으로 작동한다. 세상은 연결이고 연결하는 것은 도구이며 도구는 축이 있고 우리는 축을 움직여서 원하는 바를 얻는다. 시합에는 심판이 필요하고, 거래에는 중매인이 필요하고, 소개팅은 주선자가 필요하다.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을 두고 하릴없이 밥만 축내는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개혁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