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와 구조론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무신론자 이반은 종교의 본질이 기적과 신비와 권능이라는 점을 갈파하고 있다. 여기에 교묘한 트릭이 있다. 기적과 신비와 권능을 팔아먹는 타락한 카톨릭을 비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기독교를 옹호하는 내용이다. 혁명가였던 도스토옙스키는 사형대에 섰다가 전율의 2초를 체험하고 신실한 기독교도가 되었다. 이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언하자 다들 예수가 기적을 행사할 것인지를 궁금해했다. 십자가에 매달겠다고 하면 뭔가를 보여주지 않을까? 제 입으로 왕이라고 선언해놓고 설마 그냥 내빼기야 하겠어? 그는 끝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떠났다. 쇼는 싱겁게 끝났다. 예수가 가짜라면 ‘뻥이야’가 되겠고 진짜라면 그의 침묵에는 의미가 있다. 울림이 있다. 왜 그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을까? 소설은 그 답변이다. 기적이든 권능이든 신비든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인류의 이 여행은 의미가 있다. 문명의 역사는 최소 3만 년짜리 장편이다. 남이 대신해 준다면 가짜다. 어린이는 다르다. 아빠가 대신해주면 좋아한다. 예수가 기적을 연출해 주기를 바라는 어린이의 마음을 졸업해야 한다. 예수는 이 거대한 여행의 완성자를 원한다. 지겹게 따라붙는 추종자가 아니라. 누가 예수의 바톤을 이어받을 것인가? 양차 세계대전은 기적과 신비와 권능이 폭발한 결과다. 스탈린의 공산주의 기적, 무솔리니의 파시즘 권능, 히틀러의 인종주의 신비가 인류를 홀려버린 거다. 마르크스주의와 파시즘의 광기에 대한 반성으로 인류는 겸손해졌다. 서구 구조주의는 간단히 인간의 행동은 그 사람의 타고난 기질, 속성, 성품이나 노력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가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다. 맞는 말이다. 친구와 가족과 동료와의 관계가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그래서? 양의 피드백을 제어한다. 타고난 기질, 성품, 노력으로 가면 인간의 폭주가 시작된다. 영웅주의가 따라붙는다. 더 우월한 성품, 더 가열찬 노력, 더 눈부신 영웅으로 기적과 권능과 신비를 경쟁한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다. 체르노빌이 터진 것은 양의 되먹임 때문이다. 핵분열이 증가하면 자동으로 냉각수가 공급되어 원전이 안정된다. 체르노빌에서는 우연히 그 반대가 일어났다. 설계결함인데 안전장치를 작동시키자 흑연 제어봉이 들어가며 냉각수를 밀어내서 순간적으로 계산에 없는 양의 피드백이 일어났다. 7초 만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기술자들은 설계결함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고 과학자들은 설마 기술자들이 원전을 함부로 운전하겠나 싶어서 말해주지 않았다. 장시간 저출력 운전으로 원전을 예민하게 만든게 원인인데 자동차도 저속력으로 가면 좋지 않다. 시속 5킬로로 가다서다 하면 차에 무리가 간다. 원전을 테스트한답시고 안전장치를 끄고 수동으로 장시간 저출력으로 가다서다 해서 내부에 여러 가지 물질이 생성되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실험을 끝낸다고 안전장치를 가동하자 바로 터졌다. 제어봉이 바닥까지 들어가는 데 20초가 걸리는데 7초 만에 터져버린 거다. 어느 미친 넘이 원전을 그따위로 무리하게 운전하겠나 싶어서 결함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그 장본인 중의 한 명은 미드 체르노빌에서 홀로 분투하며 많은 생명을 구한 영웅으로 미화된 레가소프다. 그는 현장의 기술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살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인간의 폭주를 막으려면 서로 간격을 벌리고 개입하지 말고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구조주의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콘텐츠가 빈약하다. 200자 원고지 한 장 이내로 정리된다. 초딩이냐? 장난하냐? 인류의 지성은 여전히 천박하다. 21세기에 스마트 시대다.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인류는 여전히 기적과 권능과 신비를 추구한다. 인간들의 간격은 좁혀졌다. 미디어는 신비를 조장하고 스티브 잡스와 일론 머스크는 기적을 연출하고 시진핑과 트럼프는 권능을 행사한다. 중국과 미국의 폭주는 골칫거리다. 인류는 예수에게 요구한다. '좋은 것을 달라.' 예수는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좋은 것을 주면 너희들은 폭주할 것이 뻔하잖아. 총을 주면 노예사냥이나 하고, 자동차를 주면 지구를 온난화시키고, 미디어를 주면 일베짓이나 하고, 민주주의를 주면 태극기집회나 하고 말이야.' 답은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구조는 의사결정구조다. 인류는 기적과 권능과 신비에 집착해도 안 되고 거기서 도망쳐도 안 된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달한 후 문명은 전진을 멈출 수 없다. 여행은 계속된다. 스토리는 이어진다. 바톤을 넘겨받는다. 통제해야 한다. 말을 버려도 안 되고 폭주해도 안 되고 속도조절을 해야 한다. 인간은 기질과 성품과 노력에서 답을 찾는다. 그게 폭주의 원인이다. 그게 원자론적 사고다. 거기서 일어나는 양의 되먹임을 음의 되먹임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다. 음의 되먹임이다. 구조는 연결이다. 연결은 끊을 수 있다. 폭주하면 자동으로 연결이 끊어진다. 공세종말점에서 멈추게 되어 있다. 보급선이 늘어지면 롬멜도 전진하지 못한다. 길이 없으면 차가 갈 수 없다.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통제방법을 알고 통제기술을 익히면 된다. 통제가능성이 정답이다. 서구 구조주의나 탈근대는 본질에서 인간의 변화를 부정하는 허무주의다. 밀집해 있는 인간의 간격을 띄엄띄엄 떼어놓자는 아이디어만으로는 약하다. 인간은 시스템으로도 통제되지만 깨달음에 의해 통제된다. 종교와 철학의 역할이 거기에 있다.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 불충분하고 인간이 변해야 한다. 인간의 변화, 생산력의 변화, 제도의 변화가 3박자다. 극좌와 극우의 폭주를 막자는게 탈근대 담론이지만 소박하고 허무하다. 막자는 의도와 주장은 공허하고 막는 도구가 필요하다. 도구를 장악해야 핸들링 가능하다. 그것은 에너지를 통제하는 기술이며 그것이 구조론이다. 세상은 간단히 제도와 생산력과 미디어다. 제도는 권능이고 권능은 민주주의다. 생산력은 기적이고 기적은 산업이다. 미디어는 신비고 신비는 깨달음이다. 종교와 언론이 하던 미디어를 인간의 각성으로 바꿔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