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445 vote 0 2019.12.23 (21:46:09)


    중국의 도교나 인도의 힌두교나 일본의 신토나 마찬가지다. 종교의 교리 이전에 봉건 관습이다. 근대주의는 원리원칙을 따지고 밑바닥에서부터 기초를 쌓으며 하나씩 건설해가는 것이다. 전체를 한 줄에 꿰는 일원론적 관점이다. 봉건주의는 포기하는 거다. 중국은 인구가 많고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포기한다. 기초를 세울 수 없다.


    중국이 언어적으로 통일된 것은 모택동 이후다. 인도는 민족이 800개라서 통일되지 않는다. 포기한다. 한국의 기독교 세력도 그러하다. 한국의 기독교는 특이한데 개신교의 여러 교파가 모두 수입되어 있다. 서로 감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포기한다. 한국에는 자칭 예수가 무려 열네 명이나 되고 자칭 하느님이 셋이나 된다고 한다.


    포기한다. 문체부에 등록된 개신교 교단이 118개라고 한다. 언어가 118개면 바벨탑을 쌓다가도 포기한다. 한의사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서로 비판하지 않고 검증하지 않는다. 왜?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음양오행 어쩌고 사상의설이 어쩌고 하는건 근래에 지어낸 말이고 한의학은 경험방일 뿐 이론이 없다. 그러므로 비판할 수도 없다.


    기독교 목사 중에 누가 헛소리를 해도 교단이 다르므로 간섭할 수 없고 한의사 중의 한 사람이 엉뚱한 짓을 해도 이를 견제하는 동료 한의사가 없다. 이론이 없으므로 비판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점점 플러스가 된다. 뭔가 점점 많아진다. 신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문제는 거기서 안전함을 느낀다는 점이다. 잘못된 방향의 설정이다.


    부족민은 마을마다 언어가 다르다. 그것이 외부인의 침입을 막아 부족의 생존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소통보다 단절이 낫다. 외부와 소통하면 전염병이 들어와서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몰살당한다. 사바나에서는 몸집이 커야 살아남고 섬이면 몸집이 작아야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섬 왜소화 현상이 일어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게 된다.


    서구가 진보한 것은 일신교의 일원론적 특성 때문이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유태인은 원래 숫자가 적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소수를 설득하기는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도 작다. 유럽 도시의 시의회도 규모가 작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시민권자의 숫자가 몇만 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부유한 시민에게만 시민권을 줘서 3천인 의회를 소집한 적도 있다. 스파르타도 시민권자의 숫자가 9천 명으로 시작해서 막판에는 1000명까지 줄어들었다. 카톨릭은 공의회를 소집해서 일원적인 구조를 유지했다. 일원론이나 일신교는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가 될 때까지 마이너스를 계속한다. 추려내다 보면 끝까지 남아있는 것이 정답이다.


    한국은 영토가 작고 산맥으로 나눠어서 의사결정단위가 작다. 그래서 의사결정 속도가 빠르다. 대신 변덕이 많다. 고려공사 3일이라는 말이 있다. 3일만 지나면 정책이 바뀐다는 말이다. 한국의 제사에 참여하는 인원은 많아봤자 10여 명인데 일본이라면 마쓰리 축제는 수백 명이 참여한다. 인도의 부족축제라면 수십만 명이나 몰려든다.


    중국인은 수천 명이 광장에 모여서 태극권을 한다. 이들을 모두 설득할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다. 영화 으랏차차 스모부에 나오는 장면인데 스모선수들은 샅바를 세탁하지 않는다. 스모부에 가입하면 고참이 쓰던 샅바를 물려주는데 빨아서 쓰면 안 된다. 왜 빨지 않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그냥 하던 대로 한다. 포기하는 것이다.


    혼자서 관습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으니까. 일본인들은 집단적이거나 개인적이다. 집단의 일은 포기하지만 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차대전이 절망적이라도 아무도 종전을 말하지 않는다. 포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다 설득하기는 무리다. 게다가 보스의 결정권도 없다. 원로들의 의견을 듣고 만장일치를 끌어내기는 매우 어렵다.


    소수의 극단적인 세력에게 쩔쩔매며 끌려다니게 된다. 2차대전 때는 군부 소장파들에게 끌려다녔고 지금은 혐한세력에게 끌려다닌다. 반면 개인적으로 노벨상에 도전할 때는 포기하지 않는다. 반면 한국은 의사결정 참여자 숫자가 적고 보스의 결정권이 있어서 의사결정을 잘하지만 성질이 급해서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곧 포기한다.


    서울대 출신은 실력이 없어서 안 되고 비서울대 출신은 자존감이 없어서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의사결정을 잘하지만 밀어붙이지 않고 변덕이 심한게 한국인이다. 반면 중국인은 의사결정을 못 하지만 한번 결정하면 백 년씩 밀어붙인다. 문화혁명이 그렇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러는 중에 10년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러나 4인방은 신속하게 해치웠는데 원로들의 만장일치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10억 중국인 중에 사인방을 지지하는 반대파는 하나도 없었다고. 4인방 위주로 보도하고 있던 서구의 언론들이 크게 놀랐음은 물론이다. 사실은 모택동의 생전부터 지도부는 4인방 처단을 꾸준히 논의해왔던 것이다.


    결론은 일원론이냐 다원론이냐. 원리원칙부터냐 포기하기냐. 소통에 따른 진보냐 단절에 따른 안전이냐. 여기서 커다란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며 근대주의와 봉건주의는 가는 방향이 다른 것이며 근대주의로 가면 사바나처럼 덩치가 커지고 봉건주의로 가면 섬왜소화 현상이 일어나며 큰 틀에서의 방향성 결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중의 권력화 현상이다. 인구가 많으면 숫자로 밀어붙인다. 일본인들은 열 명 이상이 떼를 지어 무단횡단을 한다. 개인은 규칙을 잘 지키는데 집단을 이루면 혐한세력처럼 오만불손해진다. 대중의 권력에 아부하다 보니 모든 종교나 사상이 점차 쉬워진다. 왜 한국에는 좁은 나라에 예수가 열넷이나 되고 하느님이 셋이나 되는가?


    신도들의 요구를 전광훈 같은 사이비가 이용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눈앞에 있다니 가깝고 좋잖아. 불교도 마찬가지다. 점점 쉬워진다. 스님들은 원래 고기를 먹었다. 육식을 금지한 것은 양무제 때다. 석가는 온갖 계율을 다 반대했는데 신도들이 우겨서 뒤로 갈수록 엄격해졌다. 이것도 반대하고 저것도 반대하면서 점점 규칙이 늘어난다.


    왜일까? 처음에는 교단이 엘리트 위주였으므로 사건사고가 없었다. 숫자가 늘수록 사건사고가 증가해서 술을 먹고 석가를 발로 걷어차는 자가 나타났다. 석가도 어쩔 수 없이 술을 제한하게 되었다. 한 신도가 마늘을 시주했는데 한 사람당 5개씩 가져가라고 했더니 마늘밭을 통째로 털어갔다. 결국 마늘도 금지되어 스님들은 먹지 않는다.


    대중을 통제하려다 보면 이런 식으로 하향평준화되는 것이다. 점점 꼴이 우습게 되어간다. 엘리트들은 자유롭다. 마약을 먹어도 살롱에서 먹을 뿐 대문을 나설 때는 넥타이를 고쳐맨다. 사건사고가 접수되지 않는다. 대중은 자유롭지 않다. 반드시 사고 치는 자가 나타나고 점차 이것도 금지 저것도 금지하여 동성애 반대로 되는 것이다.


    왜 한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개신교가 특별히 꼴통짓을 하는 것일까? 대중이 권력화되었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아부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 나중에는 금주법까지 막무가내로 치달았다. 대중은 대중을 불신한다. 엘리트는 엘리트를 신뢰하므로 쓸데없이 금지하지 않는다. 대중은 자존감이 없어서 자기를 불신하므로 억압을 원하는 것이다.
   

    필자의 구조론 관심은 아홉 살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뒤늦게 시작했다면 포기했을 것이다.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아이디어는 대부분 20대 때 시작된다. 호르몬 때문이다. 압도적인 기득권과 관습과 대중의 3중 성벽을 무너뜨리려면 에너지가 있을 때 시작해야 한다. 어렸을 때 철모르고 시작해야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끝까지 가는 거다.


    엘리트의 편협함도 대중의 폭주만큼 문제다. 환빠들은 그런다. 사실 여부 상관없고 내가 기분이 좋으면 그만. 마음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정신승리 좋잖아. 그 반대편에 진중권병 있다. '니들은 떠들어라. 나는 마이웨이다.' 대중을 엿먹이고 즐거워하는 엘리트의 병적인 태도다. 엘리트와 대중이 일원적으로 힘을 합쳐야 역사는 이루어진다.


    맞는 의사결정구조가 세팅되어야 한다. 엘리트와 대중이 한 방향을 바라봐야 한다. 의사결정 참여자 숫자가 너무 많으면 안 된다. 리더에게 상당한 권력이 주어지고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외부와 단절하여 안전을 꾀하기보다 외부와 소통하여 승리를 꾀하는 노선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자신감을 가지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19.12.24 (05:20:33)

"대중은 대중을 불신한다. 엘리트는 엘리트를 신뢰하므로 쓸데없이 금지하지 않는다. 대중은 자존감이 없어서 자기를 불신하므로 억압을 원하는 것이다."

http://gujoron.com/xe/1151662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4667 구조론과 범신론 3 김동렬 2019-12-27 3959
4666 거대한 전복의 시작 1 김동렬 2019-12-26 3674
4665 아킬레스와 거북이 1 김동렬 2019-12-25 5010
4664 맨 처음 이야기 한 번 더 1 김동렬 2019-12-25 5391
4663 구조론과 원자론의 차이 1 김동렬 2019-12-24 3210
4662 맨 처음 이야기 2 김동렬 2019-12-23 3626
» 대중의 권력화가 문제다 1 김동렬 2019-12-23 3445
4660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image 1 김동렬 2019-12-22 4563
4659 도교의 위험성 6 김동렬 2019-12-21 4581
4658 진정한 세계로 초대하다 1 김동렬 2019-12-20 3882
4657 진짜의 시대는 온다 image 3 김동렬 2019-12-20 3982
4656 예술의 본령 2 김동렬 2019-12-20 3628
4655 주체냐, 대상이냐? 1 김동렬 2019-12-19 5458
4654 언어는 맥락이 필요하다 1 김동렬 2019-12-18 5734
4653 방향성으로 모두 설명한다 1 김동렬 2019-12-17 3470
4652 지식을 구하는 자세 1 김동렬 2019-12-16 3748
4651 모든 지식의 어머니 1 김동렬 2019-12-15 3657
4650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식 2 김동렬 2019-12-15 3790
4649 육갑병신의 유래 2 김동렬 2019-12-13 6244
4648 구조론의 유래 2 김동렬 2019-12-13 3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