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를 바라보는가, 대상을 바라보는가? 여기서 결정된다. 중국사 2천 년을 망친 것은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 한마디다. 반대편에는 유클리드의 원론이 있다. 각각 동양과 서양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노자는 대상을 바라보고 유클리드는 주체를 바라본다. 노자의 말이 아주 틀린건 아니다. 대상은 원래 관측자에 따라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도는 상도가 아니며 명은 상명이 아니다. 이 문제를 유클리드가 해결하고 있다. 상대적이므로 말을 똑바로 하기다. 관측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게 공리와 공준을 도입한다. 똑같은 코끼리를 앞에서 보거나 뒤에서 보므로 말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코끼리를 볼 때는 언제나 이 지점에서 봐야 한다고 규칙을 정해놓는다. 그는 열 개의 공리로 465개의 정리를 연역해냈다. 지식이 대량생산된 것이다. 거기서 인류는 희망을 봤다. 10개의 씨앗을 심었는데 465개의 열매를 수확하다니 대박이잖아. 서양은 부흥했다. 공자의 제자 안회도 하나를 배우면 10개를 알았는데 유클리드는 하나를 주면 46.5개를 돌려준다. 이거 수지맞는 장사잖아. 뭐하고들 있어. 얼른 이쪽에다 투자를 하라고. 물론 노자 혼자서 말아먹은 것은 아니다. 도교를 숭상하여 유가를 파묻어버린 진시황이 대거 말아먹었고 진시황의 법가를 계승한 조조가 더욱 말아먹었다. 더 고약한 것은 도교는 원래 각자 벌어먹는 구조라서 서로 비판과 검증을 하지 않았던 점이다. 이는 인도와 같다. 힌두교라는 종교는 없고 그냥 민간신앙의 집합이다. 관습법이다. 아랍도 이슬람교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관습법의 지배가 문제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도교의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도교가 원래 중국 민간신앙의 결집체라는게 문제다. 공자의 가르침은 명분과 의리다. 이는 유클리드의 원론과 같다. 근원을 탐색하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나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나 마찬가지다. 이데아는 원자의 다른 형태다. 원자가 작은 입자라면 공리와 같다. 원자를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면 공리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다. 공리는 쪼갤 수 없으므로 증명하지 않는다. 원자의 분해불가 성질과 공리의 증명불가 성질이 정확히 같은 것이다. 이데아도 분해할 수 없다. 공자의 명분과 의리도 더 이상 분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게임의 룰과 같다. 축구든 야구든 최초의 룰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분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대상은 분해할 수 있다. 주체는 분해할 수 없다. 주체와 대상을 연결하는 라인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분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구조다.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라인은 하나이며 그러므로 신은 하나여야 하는 것이며 신과의 일대일 관계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다. 데모크리토스와 플라톤, 유클리드, 공자의 아이디어가 같다. 대상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지만 주체는 하나다. 색깔은 수만 가지라도 빛은 하나다. 무게는 다양하지만 중력은 하나다. 인간은 다양하지만 권력은 하나다. 어디를 가든 우리는 주체가 되는 하나를 만난다. 음색은 다양하지만 소리는 하나의 파동이다. 냄새는 다양하지만 후각은 코 하나다. 맛은 다양하지만 미각은 하나다. 그 하나가 원자가 되고 이데아가 되고 신이 되고 명분과 의리가 되며 이 원자들이 화학적인 결합을 거쳐 다양한 세상을 연출하는 것이다. 주체는 언제나 하나고 대상은 무한대다. 중국 축구가 망하는 이유는 이러한 기본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축구는 일단 체격과 체력과 정신력이 기초가 된다. 개인전술과 팀전술은 그다음이다. 그러나 13억 중국인들은 98퍼센트 갖추어졌는데 2퍼센트가 부족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2퍼센트는 되어 있는데 98퍼센트가 부족하므로 히딩크도 두 손과 두 발을 들고 마는 것이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 일단 13억을 한 줄에 세워 체격과 체력과 정신력이 되는 사람을 추려서 100명을 뽑은 다음 실력 있는 선수과 감독을 데려오면 성공한다. 13억에서 100명을 추리는 절차가 중국에 없는 것이다. 기본은 언제나 마이너스로 작동한다. 유클리드는 추리고 추린 끝에 열 개의 공리를 찾아서 그것을 지지고 볶고 데치고 삶고 굽고 졸이고 다듬어서 465개의 정리를 만들어냈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원자론은 내가 원자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명분과 의리도 마찬가지다. 나의 시작점을 명확히 정하는 것이 주체의 관점이다. 세상이 어떻든 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중요하다. |
"명분과 의리도 마찬가지다. 나의 시작점을 명확히 정하는 것이 주체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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