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단순하다. 그냥 하나의 기계다. 메커니즘이다. 입력과 출력이 전부다. 인간은 기계적으로 환경에 반응하는 동물이다. 개보다 나은 게 없다. 개를 길들이는 강형욱 훈련사의 방법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간의 인간됨을 규정하는 야망, 목적, 희망, 야심, 탐욕, 지성, 사랑, 애국 따위는 그냥 지어낸 말이다. 인간은 그저 했던 짓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동물이다. 로또를 사는 이유는 대단한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난번에 샀기 때문에 사는 거다. 정선 카지노에 가서 죽치는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어제도 카지노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있는 거다. 거창한 희망과 야심을 발표하지만 이는 남들이 물어보니까 하는 소리다. 폼잡느라 꾸며낸 언어에 불과하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되는 단세포적인 동물이며 구체적으로는 호르몬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단 하나 인간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인간은 기계처럼 환경에 반응하는데 그 기준선은 나와 타자의 경계다. 피아구분 하는 선이다. 그 선을 경계로 인간은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환경이 장군하면 인간은 멍군한다. 야망, 목적, 희망, 야심, 탐욕, 지성은 뻥이고 환경이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저렇게 대응하는 것이다. 날씨가 추우면 옷을 입는다. 왜? 추우니까.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왜? 배가 고프니까. 살기 위해서 먹는다? 거짓말이다. 위하는 것은 없다. 먹기 위해서 산다? 거짓말이다.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는 것이고 밥을 먹다가 보니 결과적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살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살아져 있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짐을 당한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았군'이 아니라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더니 오늘 하루도 살아져 버렸구만'이 맞다. 한 게 아니라 당한 거다. 삶을 사는 게 아니라 환경과 상호작용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살아진 거다. 계획, 희망, 야심, 욕망 따위는 외부로부터 주입된 말일 뿐이다. 가짜다. 단 환경과 나의 경계선이 어디냐를 정하는 것이 각별하다. 엄마곰 입장에서 나와 타자의 경계는 어디인가? 새끼곰부터 챙긴다. 엄마곰이 나로 규정하는 영역은 수컷보다 넓다. 철학자가 나라고 규정하는 범위는 일반인보다 넓다. 엄마는 자녀를 나에 포함시키고, 가장은 가족을 나에 포함시키고, 사장은 직원을 나에 포함시키고, 지도자는 국가를 나에 포함시키고, 지성인은 인류를 나에 포함시켜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너무 일찍 경계를 정하면 작게 정하게 되는 점이 문제다. 자기가 보고 듣고 아는 것을 나로 규정하기 마련이다. 너무 일찍 독립하는 고아 소년은 자기를 작게 규정하게 된다. 보육원에서 19세에 500만 원 받아쥐고 사회에 나가라고 한다. 더 이상 케어해주지 않으면 자신이 작아져 있다. 내 몸뚱이 외에는 모두 타자다. 천하에 내 편은 하나도 없다. 에너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이 나인가? 내게 에너지를 주는 것이 나다. 누가 내게 에너지를 주는가? 작가는 독자가 나다. 스타는 시청자가 나다. 가수는 청중이 나다. 배우는 관객이 나다. 정치인은 지지자가 나다. 나의 의사결정 범위 안에 있으면 모두 나다. 내 몸뚱이가 나라는 근거는 없다. 뱃속에 든 배설물은 금방 빠져나가니 나가 아니다. 근육과 뼈도 10년이 지나면 대부분 교체되니 나가 아니다. 머리카락은 이발할 테니 당연히 나가 아니다. 나라는 것은 나의 의사결정범위다. 그것은 클수록 좋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자신을 작게 규정하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다. 변희재나 지만원처럼 자신을 작게 규정하면 빨리 뜬다. 내가 작은 만큼 적이 많은 것이다. 적이 많으면 싸우게 되고 싸우면 유명해진다. 안철수들은 자신을 작게 규정하므로 큰 인물이 못 되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적이라고 선언하면 된다. 북한은 적이다. 다문화는 적이다. 이슬람은 적이다. 성소수자는 적이다. 여성은 적이다. 전라도는 적이다. 이러다가 남성연대처럼 장가도 못 들고 망한다. 사방이 다 적이니. 반대로 우리편을 크게 하면 의사결정권을 잃는다. 리더에게 결정을 위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은 나와 타자의 경계선에서 일어나는데 그 경계선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영역을 가장 크게 하면 신과 인간 사이에 경계가 설정된다. 휴전선이 너무 멀어서 전쟁을 할 수 없다. 신에게 대들어야 하는데 만만치가 않다. 어린이는 당연히 자신을 작게 규정한다. 아는 게 없고, 본 것이 없고, 가진 게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원이 없기 때문이다. 나를 키우는 것은 에너지를 획득하기 위한 것인데 부모가 에너지를 공급하므로 나를 키울 이유가 없다. 문제는 어린이의 작게 규정하는 습관을 어른이 되어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철이 들지 않았다. 일본에 히키코모리가 많은 이유는 너무 일찍 사회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사회가 마을 정도로 작았으므로 일찍 투입해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사회가 국가단위로 커졌으니 사회진입 시기를 늦추어야 한다. 볼 것을 보고, 알 것을 알고, 가질 밑천과 무기를 획득한 다음에 사회에 투입되어야 나의 범위를 키울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정신차리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총합이다. 작가를 쳐다보는 독자, 가수를 쳐다보는 청중, 배우를 쳐다보는 관객, 당신을 쳐다보는 동료와 식구들과 더 많은 사람이 당신의 존재를 규정한다. 나는 나를 쳐다보는 시선들의 총합이다. 환경과 긴밀하게 얽혀 에너지를 조달한다. 신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삶은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변화하는 환경과의 밀당을 즐기게도 된다. 우주가 모두 나와 연결되어 현악기의 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비로소 당신의 삶을 아름답게 연주해낼 수 있다. 세상을 툭 건드려서 큰 한 소리를 끌어낼 수 있다. 그것이 나의 존재다. |
이런 글은 교과서에 넣어서 암기하게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나는 나를 쳐다보는 시선들의 총합이다. 신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삶은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