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근본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사건 안에서 계의 통제가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사회적 에너지다. 사회적인 통제가능성이다. 에너지는 결대로 간다. 자연은 통제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물은 흐를 수 있는 곳으로 흐르고 불은 옮겨붙을 수 있는 방향으로 번진다. 사회에도 그러한 결이 있다. 통제가능한 순방향이 있고 통제가 불가능한 역방향이 있다. 둘 이상 연결되어 있으면서 에너지 회로의 방향이 맞을 때 앞에서 에너지를 주는 쪽이 뒤에서 에너지를 받는 쪽을 지배한다. 사회의 조직이라면 명령계통에서 앞서는 자가 따르는 자를 지배한다. 명령하는 자가 명령받는 자를 지배한다. 필자는 그것을 권력이라 부른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은 명명되어 있지 않다. 집단에서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한국인들이 주로 분위기라고 말하는 그것을 일본인들은 공기空氣라고 말한다. ‘공기를 읽는다.’거나 혹은 ‘공기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식이다. 일본에는 항공기죄抗空氣罪라는 말도 있다. 집단 특유의 분위기를 따르지 않은 죄다. 집단 내부의 보이지 않는 위력을 평판이라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분위기나 일본의 공기가 개인에게 가해지면 평판이다. 집단은 평판을 무기로 개인을 지배한다. 권력은 보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강자의 폭력이나 미인의 매력이나 부자의 금력도 권력의 변종이며 사회적 에너지를 구성한다. 모든 형태의 영향력이 권력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러한 내막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당부분 무의식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에게 익숙한 공기가 외국인에게는 낯선 것일 수 있다. 관동의 공기와 관서의 공기가 다를 수 있다. 일본인 자신도 모를 수 있다. 일본이 다른 나라에 없는 이상한 공기에 지배된다는 사실을. ‘공기의 연구’라는 책도 있다. 저자는 야마모토 시치헤이다. 부제는 ‘일본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하여’라고. 이 정도면 알 만한 거다. 누구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서구인이든 마찬가지다. 무의식을 조종하므로 포착하기 힘들다. 예컨대 이런 거다. 지하철에서 많은 사람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다. 역주행하기 힘들다.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들과 계속 부딪히게 된다. 꽃 피는 애로사항을 피하려면 조금 돌아서 가더라도 군중이 몰려가는 방향으로 함께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게 더 편하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길들여져 간다. 보이지 않게 집단의 권력에 조종당한다. 폭력과 매력과 금력이 있는가 하면 윤리와 도덕도 있다. 윤리와 도덕도 역시 집단의 의지가 개인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에너지가 된다. 유행의 변화도 있다. 개그맨의 유행어가 뜨면 그 말을 따라하게 된다. 어떤 패션이 유행하면 그 옷을 따라입고 어떤 영화가 입소문이 뜨면 자기 취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보러가게 된다. 그래야 또래들 사이의 대화에 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어폐가 있지만 달리 적절한 용어가 없으므로 필자는 그 사회적 에너지를 권력이라고 명명한다. 사건의 진행단계에 따라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가지 권력이 있다. 평판권력과 정치권력, 경제권력, 문화권력, 도덕권력이 그것이다. 평판권력은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공기와 같이 집단이 공유하는 사회적 에너지다. 기세가 있다. 정치권력은 집단의 구성원으로부터 지도자에게 의사결정권이 위임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 권력이다. 처음에는 사회적 에너지가 공기로 존재하지만 어떤 사건이 발발하면 구체적인 정치권력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대중의 분노라는 공기로 있다가 조정에서 안찰사가 파견되고 관군이 내려오면 녹두장군 전봉준에게 위임된다. 경제권력은 다른 조건이 같을 때 의사결정은 에너지의 효율성을 따르기 마련이며 보통은 돈이다. 인간은 그저 하기 쉬운 것을 결정한다. 그것이 결이다. 결대로 간다. 입으로는 고상한 이상을 떠들지만 막상 현실의 문제가 닥치면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은 돈이다. 의사결정의 효율성이다. 문화권력은 바이럴 마케팅의 입소문처럼 먼저 정보를 얻은 자가 누리는 권력이다. 신상을 먼저 써보고 후기를 올리는 사람이 권력을 쥔다. 또래들 사이에 유행을 퍼뜨리는 사람이 권력을 누린다. 도덕권력은 개인들 간의 차별성이다. 사회는 진보하며 그 진보에는 방향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그 반대는 악이다. 집단의 움직여가는 방향과 맞는 사람, 곧 선한 사람은 그 방향이 어긋난 사람, 곧 악한 사람에 비해 보다 유리한 위치에 선다. 군중이 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갈 때 순방향에 있는 사람이 역방향에 있는 사람보다 유리하다. 평판권력과 헷갈릴 수 있다. 평판권력이 집단의 힘인데 비해 도덕권력은 개인의 우월성이라는 점이 다르다. 산골에 사는 샌님이 도덕적이라 해도 집단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면 권력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에너지는 사건의 통제가능성이다. 권력은 언제라도 사건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이 각별하다. 매력이든 금력이든 폭력이든 모두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 안에서 사건의 통제가능성이다. 우리는 보통 이성을 논하고 감성을 논하고 또 도덕과 윤리를 찾지만 그것은 파편화된 것이며 개별적인 부스러기들이다. 실제로 한국을 움직이는 것이 분위기라면 일본을 움직이는 것은 공기다. 집단의 평판권력이다. 다수가 같은 생각을 하면 그것이 권력이다. 흔히 이상을 말하지만 개인은 힘이 없다. 여럿이 어울려야 힘이 생긴다. 사람을 어울리게 하는 것은 감성이다. 서로 어울리려면 코드를 맞춰야 한다. 상대방에게 맞추다 보면 낮아진다. 어린이와 어울리려면 어린이처럼 낮아져야 한다. 에너지 손실이 일어난다. 핵이 분열해도 에너지는 손실되고 융합해도 에너지는 손실된다. 이성은 혼자라서 약하고 감성은 타인과 어울리려고 비위 맞추다가 약해진다. 언제나 강한 것은 권력이다. 이성과 감성이 인간을 구하지 못한다. 윤리와 도덕도 인간을 구하지 못한다. 도덕은 개인의 우월성이며 윤리는 그것을 일반화한 것이다. 그런 식의 약간의 비교우위로는 2차대전의 재앙을 막지 못한다. 지식인의 이성도 히틀러의 폭주를 막지 못하였고 예술가의 감성도 히틀러의 야만을 막지 못하였다. 다만 조직화된 집단의 권력이 히틀러를 막는다. 권력을 제어하는 기술을 발달시킨다면 또 그러한 제도와 문화를 일구어 간다면, 그렇게 사회의 진보를 이루어낸다면 그래서 사회적 에너지가 독재자보다 위에 있다면 이길 수 있다. 그것이 진보다. 진정한 진보주의는 권력적이어야 한다. 깨어있는 시민이 연결된 권력이라야 한다. 이성이 못하고 감성이 못하고 도덕이 못하고 윤리가 못한 것을 사회적 에너지가 해낸다. 분위기를 조직하고 공기를 다룰 줄 아는 자가 나서준다면 우리는 대단한 힘을 가질 수 있다. 그 힘은 좋은 힘이어야 한다. 강자의 폭력도 부자의 금력도 미인의 매력도 지식인의 학력도 당신의 능력도 힘이겠지만 그 위에 무의식의 힘이 있다. 무의식의 힘을 조직하려면 그 사회는 열린사회여야 한다. 구조적으로 닫힌 사회라면 강자의 폭력을 당해낼 수 없다. 고립된 공간에서는 부자의 금력을 당해낼 수 없다. 그러나 열리면 널리 연결된다. 망라된다. 열린사회에서 만인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사회적 에너지는 막강한 힘을 가진다. 그 힘을 획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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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가 해야할 일을 공동의 목표를 향한 집단적 무의식을 조직하는 것이고, 그러한 목표는 인위적인게 아니라 이미 벌어진 사건의 결과 연결된다고 생각됩니다. 정치판에서는 그러한 집단적 무의식과 결이 맞는 것을 코드가 맞다라고 표현하고 기업에서는 기업문화에 쉽게 융화된다고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