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왕 1년, 불혹에 처음 술을 배운 순한 계집이 살았다 어느 한 날
누구에게 한 번도 등을 내보인 적 없다는 하루 덜 찬 보름달이
누구에게 한 번도 속을 내비친 적 없다는 저 닮은 계집을
동리 밖 개울가 유채밭으로 끌고 들어가더란다
바람도 물도 흙도 오지게 착한 오월의 밤인 데다
달도 계집도 저마다 속에 셈을 하나씩은 숨기고 있던 터라
멀리 샛별도 근처를 지나던 물오리도 숨은 죽이고 귀는 세우고
곱게 빗어넘긴 유채밭 가름마길에 흘려놓은 가락지라도 있는지
애저녁 살짝 베어 문 잔술에 취한 계집 가다 서다를 네댓 번
뒤쫓던 하루 모자란 보름달 애간장이 다 녹을 판이다
검지 중지 두 손가락을 쭉 당겨 올라치면 철 지난 코스모스 모가지가
제 손끝에 알맞게 딱 걸리는데도 차마 따지 못했던 순한 계집
아까 낮에 땜통한 아이 쥐불놀이 깡통 신세가 된 유채꽃을
공갈 반 애원 반 빼앗아 여기 어디다 몰래 심어둔 터였다
돌부리에 발이 걸렸나 꽃뱀한테 발목이 물렸나 거기 무슨 일인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봉숭아 아린 물 채 들기도 전에 깨져버린 손톱
물어뜯고 있는 계집 어깨너머 밭이랑에
허리가 꺾이고 목이 부러진 유채꽃 한 송이
안 그래도 흰 얼굴 하얀 달빛에 남은 핏기마저 다 씻기우고
밭고랑에 눈물 망태기로 보태고 어디 남은 눈물 또 있었는지
밤새 베갯잇 적시우니 그러게 불혹에 술이 다 무어냐 저 순한 계집
세상은 노다지 밭이다
왜요
너보다 무지한 사람이
아직도 이렇게 많으니
네게 세상은 온통 노다지 밭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