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의 작품들과 그 원본을 부분적으로 손을 댄 것에서...
그 시대의 미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원본과, 현재의 미를 대입시켜본 것에서...
원본에 손을 댈려면 부분만 고쳐서는 의미가 없다.
한번 손을 대면 전체 다 손을 대어야 하고, 그러다보면 새로 그려야 한다.
이것이 미학이 가지는 특성에서 ' 전복 ' 개념이다.
<보티첼리 원본>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미의 기준이 있고 관점이 있다.
미란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미란 조화와 조율과 균형, 통일성이다.
더구나 조화와 조율, 균형과 통일성의 기준이 되는 곳을 손을 보게되면 더욱 더 그렇다.
한 귀퉁이를 조금 손본다 하여 어색할지언정 그렇게 크게 변화가 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핵심이 되는 부분을 건드리면 반드시 탈이 난다.
이 핵심에 모든 것이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하나를 건드리면 전체가 다 따라서 움직이고 반응하게 된다.
현 시대를 보아도 그렇다.
현 시대에도 간혹 전복이 일어나기도 한다.
문화의 변화가 그렇다.
세상도 그렇게 계속하여 전복되어 왔다. 지금도 진행중이다.
현 시대에서 보자면 과거는 낡은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의 관점에서 그 시대를 보고 그 시대의 결을 보고 대화를 해야 한다.
현 시대의 관점으로 그 시대를 얘기하면 오류날 확률이 높다.
반면에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것에 있어서는, 연속성과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죽은 것이 아닌 살아 있는 것이 되려면 말이다.
현 시대에 맞게 살아 갈려면 현 시대가 요구하는 개념을 이식해줘야 한다.
그러나 부분적 이식만으로는 괴물이 될 확률이 높다. 절름발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부분적인 것만을 차용하려 하다가는 오히려 낭패를 보기 쉽상이다.
한번 손을 대면 전체를 다 손 보아야 하는 이유가 그래서 생겨난다.
전체를 새로 그리는 것이 나은 이유 역시 그러한 연유 때문이다.
그래서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한다.
그러나 현 시대와 맞지 않으면 자꾸 뭔가 어긋나기 때문에,
외면한다 해도 기어이 손을 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어느날 갑자기 손을 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되어 오고, 변화하지 못하고,
현 시대에 맞게 능동적으로 변신하지 못하는 이유들에 의해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과 같다.
터져 나오는데 손을 안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손을 대게 되면 다 고쳐야 하기 때문에, 다시 그리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일 뿐이다.
부분적 이식은 딱 봐도 부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통일성을 깨고 있으며, 이질적인 느낌을 주게 된다.
요즘 통합진보당을 보아도 그렇다.
주사파란 개념이 오늘날 다시 재 판단을 요구받고 있다.
주사파란 개념이 오늘날의 관점과 공존할 수 있는가?
주사파들이 이정희란 대중정치인을 키워 대중의 열망을 부분적으로 이식했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뭔가 한꺼풀 벗겨내자 어정쩡한 태도와 애매한 포지션만이 돌출되어 버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 버렸다.
변화한 척, 변신한 척 하였지만, 부분적 이식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입증하여 버렸다.
결국 부분적 이식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단계에서 멈추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과거의 시대에 소중했던 것들까지 현 시대에서 변화하지 못하면 매몰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런 점이라고 생각된다.
현재에서 소중하지 않다고 하여 과거의 시점에서 마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소중하고 현재에도 간직하게 기억해야 될 것들이 있다.
이런 기억들의 연속성을 차단하지 않으려면 현재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그것이 과거의 소중했던 것들은 다시 현재에서 이어 나가는 방식이라고볼 수 있다.
그러나 부조화가 일어나고, 균형과 통일성이 상실되면 과거의 것은 한 순간에 그저 낡은 것이 되어 버려야만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더이상 소중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마음을 갖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현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과거에 소중했던 기억들을 현재에도 기억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미란 한번 손을 대면 전체를 전부 손을 대어야만 완전해지는 것처럼,
미라는 것이 조화와 조율 및 균형과 통일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번 손을 대게 되면 새로 그리는 것이 훨씬 효율성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옷을 만들어도 수선하는 것보다 새로 만드는 것이 더 쉽다.
그리고 디자인이나 소재의 측면에서 본다해도 자연스러운 형태가 된다.
또한 새로 그리는 것이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응집하여 집어 넣기가 더 용이하고, 창의하기에도 훨씬 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현 시대에서 미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이유들은 너무나 많다.
요즘 시대는 더욱 더 그러한 관점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부분적으로 접근해서는 답이 없다.
계속해서 문제를 만들어낼 뿐이다.
답을 주지 못하고 ' 답은 없어 ' 라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답은 언제든지 있다.
미학적 관점을 얻으려면 그 밑바탕에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이념은 대체로 고정관념화 되기 싶다.
미학적 관점을 얻으려면 이 철학적 각성을 요구하는 깨달음이 요구된다.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시선 바꾸기, 자기 관점 얻기, 더 높은 정신적 레벨로의 상승이 요구된다.
위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을 얻어야 한다.
미학이란 하나를 건드려서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주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 전체가 반응하게 하는 것이다.
이번 통합진보당 일련의 상황들도 그와 같다고 보인다.
하나가 건드려지면 민주주의가 반응하고, 반응이 되는 것들은 연결되어 있고,
그만큼 그 부분이 민감한 부분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모두를 움직이고 반응하게 하였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주사파는 맞지 않는 개념이다.
그동안 진보세력에서 건드려지지 못했던 부분이 민주주의라는 틀이 건드려짐으로 인해서
그 대립이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주사파가 성립한 이유들은 시대에서 보자면 아픈 기억들속에서 파생된 것과 같다.
아픈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 주사파를 차용했을 수도 있다고 보인다.
결국 시대가 낳은 모순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주사파가 양립한다는 그 모순의 충돌이
지금 새롭게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역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과 같다.
부분적으로 고친다는 것은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전체를 새로 그려야 할 시점이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도덕성이 아닌 합리성이 자리잡아야 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합리성 안에 도덕성이 포함되는 것이지, 도덕성 안에 합리성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합리성의 다른 이름은 원칙과 상식이다.
이 원칙과 상식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합리성을 제대로 실현 시키려면 미학적 관점인 조화와 조율, 균형, 통일성이 요구되므로,
통일성을 얻으려면 부분적 접근이 아닌 전체를 새로 그려야 하는 관점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전모를 보는 시선을 얻어야 그것이 가능해진다고 보인다.
과거의 것은 과거의 것으로 놓아 두어야 얘기가 될 때가 많다.
그리고 과거의 것은 그 나름의 연속성을 가지고 현재와 소통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민감한 부분이 건드려졌고, 이 기준점이 건드려지면 조용하게 지나가지 않게 된다.
반드시 뭔가를 해야만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 보티첼리작품을 비너스만 현대적 미를 대입시킨 것>
아래 그림들은 위쪽이 원본이고, 아랫쪽이 현대적 미를 대입해 놓은 것임.
명화속 여자들이 뚱뚱한것에 대한 의문점이 해소가 되는 듯 하네요.
그런데 아는척 하는 어떤 사람에 예전에 그림속 여자가 뚱뚱한 이유에 대한 설명을
옛날에는 미의 기준이 뚱뚱한 여자를 선호했고 어쩌고 마른 여자는 인기가 없었고
어쩌고 저쩌고 그랬는데 그 사람이 '아는척'한것입니까? 아니면 실제 제대로 알고 있던것입니까?
인간의 눈은 원래 촛점이 맞는 일부만
선명하게 볼 수 있고 그 주변은 흐릿하게 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인간이 모른다는거.
인간은 맹점이 있어서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근데 그림은 이 문제에 딱 걸리게 됩니다.
인간의 눈은 자동으로 촛점이 맞지만 그림에는 촛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을 감상하는 인간은 불편해 집니다.
그림에 촛점을 주려면 미학적 통일성을 주는 방법 밖에 없고
그것은 강력한 에너지를 태우는 방법입니다.
십여명의 애들이 우르르 몰려가는데 갑자기 담탱이가 뜨면 누가 일진인지 드러납니다.
강한 에너지로 때리면 촛점이 만들어 집니다.
이는 그림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러합니다.
허벌창나게 때려야 해요.
그 방법은 전쟁을 일으키는 겁니다.
전쟁나면 가케무샤 가고 경기동부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아직도 실체가 안드러났다면 더욱 강하게 때려버려야 합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에너지로 타격하여 촛점을 만들어 주는 것이며
소실점을 드러내는 것이며
코어를 확인하는 것이며
주제를 부각시키는 것이며
선이 굵은 그림,
오동통한 내너구리 그림을 그리는 거지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순위대로 꼽아보면 대개 강렬한 에너지를 실은 그림입니다.
강렬한 에너지를 실어야 한다는 것....
통합진보당도 그 방향으로 가야 할텐데...^^;
이 그림은 기준이 되는 비너스를 손대지 않았기에...전달의 의미나 그림으로서의 어떤 매력을 잃지는 않았다고 보여집니다.^^
이 그림을 보고 미처 적지 못한 부분들이 보여서 내용을 조금 수정및 첨가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림의 딜렘마는
입체가 아니라 평면이라는 한계이오.
평면에 그리면 가벼워 보여서 느낌이 오지 않소.
선이 가늘어지면서 만화가 되어버리는 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뚱뚱하게 그리는 수 밖에 없소.
꽤 많은 화가들이 실물보다 과장하여 뚱뚱하게 그리고 있소.
이를 현대적인 취향의 날씬함으로 되돌려 놓으면 역시 볼품이 없소.
양감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