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 창의하는 방법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좀 힘들었습니다. 진을 있는 대로 뺐다는 거죠. ‘총을 만드는 법’보다 ‘총 쏘는 법’이 더 힘들더군요. 제목은 ‘창의하는 방법’이라고 했지만 ‘구조론 총정리’라 할 수 있습니다. 구조론의 핵심내용 - 총을 만드는 방법 - 은 이전에 다 말했고, ‘창의하는 방법’은 이를 현실에 적용한 실전용입니다. 인생의 실전은 한 마디로 창의입니다. 구조론으로 무엇에 쓰느냐? ‘창의하는데 쓴다.’는 거죠. 마지막 하나가 남았습니다. 총을 얻었다면 쏘는 법을 익혀야 하고, 그 다음은 누구를 쏘느냐죠. 답은 철학입니다. ‘구조론으로 본 철학’에 대해 써 보겠습니다. 구조주의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구조론은 구조주의와 다릅니다. 구조주의 철학은 ‘세상을 구조로 봐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그런 말은 아직 구조를 보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말입니다. 당신이 진짜를 봤다면 다음 단계를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돈을 벌었다면 ‘돈은 전부가 아니야!’ 라고 말할 것입니다. ‘돈이 전부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구조를 돌리는 것은 에너지, 에너지가 가는 길은 완전성입니다. 구조론의 철학은 ‘완전성의 철학’입니다. 물론 구조주의와 차별화 할 의도가 있습니다.
◎ 서구 구조주의 - 약자의 전략, 상대성의 관점, 소승적 태도 서구 구조주의 철학과 구조론은 ‘세상을 구조로 본다.’는 큰 틀에서 같지만 나아가는 방향이 다릅니다. 구조주의 사상의 문제는 약자의 전략, 상대성의 관점, 소승적 태도에 있습니다. 강자의 전략, 절대성의 관점, 대승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구조주의는 본질에서 20세기의 과오에 대한 반성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 극복용이라는 거죠. 무엇이 문제입니까? 첫째 기독교의 일원성입니다. 둘째 마르크스주의 절대성입니다. 실존주의가 기독교의 독선에 대한 반성이라면, 구조주의는 공산주의 반성입니다. 대칭행동인 거죠. 양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월남전이 왜 일어났습니까? 기독교의 독선, 마르크스주의 광기입니다. 피로 피에 맞서고, 철로 철에 맞선 것입니다. 자기들만이 옳다는 확신이 문제인 거죠. 반성도 좋습니다. 실존주의든 구조주의든 그 시대에 필요한 사상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 인터넷 신대륙이 놓여있습니다. 반성만으로 앞서갈 수 없습니다. 20세기는 끊어야 합니다. 스마트 시대에 인류는 다시 한 번 일어서야 합니다. 상대방을 강자로 놓고 자기를 약자로 규정한다면? 이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정한 것입니다. 소극적 적응일 뿐 개척이 아닙니다. 지금 인류의 모습은 해방된 노예가 갈 곳을 몰라 주인의 농장 주변을 맴도는 형국입니다.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목매달려 숨이 넘어가려 합니다. 주변의 흑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의사결정 회피라는 거죠. 몇 년 전 이탈리아의 한 해변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집시 소년 두 명이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주검을 거적으로 덮어둔 채 태연하게 해수욕을 즐기는 이탈리아인들의 모습이 충격을 주었습니다. 집시는 인간도 아니라는 식입니다. 동물이 죽었어도 그건 아닙니다. 의사결정 회피입니다. 양차 세계대전의 폭주, 냉전의 광기,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들, 모두 능동적인 의사결정을 회피하는 비겁함이 사건의 본질입니다. 인류는 이다지도 비겁합니다. 왜일까요? 자신을 약자, 방어자 포지션에 두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일깨워준 군자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군자, 그러니까 결정하는 자가 아닌 거죠. 주인의식의 부재입니다. 21세기에 우리는 새로 문명을 설계해야 합니다. 자신을 결정하는 자 포지션에 두어야 합니다. 송두율의 내재적 관점을 떠올려도 좋습니다. 이게 구조주의입니다. 소극적 방관이라는 거죠. 송두율은 집시의 죽음을 방치하는 이탈리아인과 같습니다. 구조주의 철학은 문화 상대주의를 강조합니다. 한국인이 개잡아 먹는 것이나 프랑스인이 거위간 빼먹는 거나 같다는 식이죠. 이런 식으로는 우리가 세계시장을 다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개 먹을께 너희는 거위 먹어. 일본인은 고래 먹고.’ 우리는 우리대로, 너희는 너희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하다가 이꼴입니다. 구조주의 관점은 강자의 폭력에 대한 방어에만 쓸모가 있습니다. 20세기에 인류는 큰 재앙을 목격하고 주눅 든 나머지 지식인의 역할은 당연히 방어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나요? 지식인이 소극적인 자기방어에만 골몰할 때 자본은 권력을 휘두릅니다. 이건희와 정몽구가 다 먹습니다. 이 현실에 만족하겠습니까? 이것이 인류의 최선인가요? 지식의 역할은 자본과 권력에 대한 방어와 견제라는 약자의 논리는, 정권은 여당의 몫이고 야당은 비판과 견제만 하라는 조중동의 프레임에 속는 것입니다. 구조 다음에 에너지가 있고 완전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커 나가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구조만 보지 말고 구조의 성장을 보아야 하며 그 성장세의 치고나가는 방향성을 읽어야 합니다. 그냥 구조가 아니라 성장하는 구조, 진보하는 구조, 통짜덩어리 구조, 살아서 호흡하는 구조라는 거죠. 서구 구조주의 철학은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불완전한 구조입니다. 정리해 봅시다. 구조론은 총입니다. 총의 내부는? 이전에 다 말했습니다. 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총 만드는 공장에서 보급하면 되니까요. 여러분은 ‘이게 총이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구조론의 내부는 인류 중에 몇 사람만 알아도 됩니다. 구조론의 내부는 과학이고 수학입니다. 페렐만이 푸앙카레의 추측을 풀었다면 여러분은 ‘아 그렇구나.’ 하고 박수나 치면 됩니다. 구조론의 응용에 대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구조론의 내부를 몰라도 구조론으로 창의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래머 아니라도 웹페이지는 만들 수 있습니다. 웹디자인만 잘 해도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조론으로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구조론을 응용하여 창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의 일은? 구조론 세력의 방향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가는 거지요. 첫째는 문제를 내고, 다음 문제를 풀며, 다음은 답을 씁니다. 첫째는 총을 만들고, 다음 총쏘기를 익히며, 다음은 타겟을 정합니다. 구조론을 세우고, 이를 적용하고, 그 문화를 일굽니다. 새 책 ‘창의하는 방법’은 구조론의 외연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구조론이라는 도구를 어떻게 쓰는지 논하였습니다. 구조론은 완전성의 모형입니다. 다만 모형으로 사유하면 됩니다. 애플과 삼성의 차이는 뭘까요? 모듈이라는 관점이 있느냐입니다. 큰 것을 해결하면 작은 것은 저절로 따라오는데, 대개 작은 것을 자랑하려다가 큰 것을 망치는 패턴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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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게 꼭 필요한 책이군요
실전용 구조론
잘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사람에게 권하기에 더욱 좋은 책이 될 것 같습니다.
동렬님, 정말 감사합니다.
늘 창조자를 고생시키는 모방자의 입장이라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그동안 보아온 동렬님은 예수와 동급이상입니다.
어차피 구조론 세상이 될 것을 아니까 저는 학교에서 뭔가 해보는 중입니다.
매년 학교가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20년 바라보고 있으니 60이면 실컷 복제를 하겠지요.
그때까지 학교가 존재한다면...
반갑네요.
봄 그리고 봄 책.
출판기념회는 없나요?
또 하나의 자식을 낳으셨군요!! 축하 드립니다.
낳음이란 것이 잠깐 있다 사라져 갈 존재에 영원성을 부여해주는 것 같네요.
새로운 생각을 맞이하게 ,,,,,,책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이 기대됩니다,,,,,,,땡큐
[10%의 고도성장이나 OECD 최장 노동시간은 흥미롭지만 버려지는 데이터다.
최후에 남는 것은 한국의 역동적인 의사결정 모형이다.
시끄럽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고,
마주보고 충돌하여 교착되지도 않고,
비틀거리면서도 오류를 시정하며 계속가는 한국만의 의사결정 모형이다.
인류의 부름에 대한 대한민국의 응답은 독립적 의사결정 모형을 만들어 인류팀의 팀플레이 안에서
모든 패스가 한국을 거치게 한는 것이다. 이기는 팀에 들어야 한다. 의사결정을 쉬지 않아야 한다.
의미있는 데이터를 생산해야한다.]
92페이지,
한국의 지성모형/ '사건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에서
진짜 좋은 책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