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2.do/xSZLWCRd ‘대통령을 왜 욕하는가. 좌파는 반성하라.’ [서민, 경향신문] 이 좌파가 글은 재미있게 써놨지만 한참 헛다리 짚은 거다. 박근혜의 유아어는 모든 단어가 오직 한 가지 뜻을 가질 뿐이다. "울어버릴거야!" 이런 문제를 논할 때는 강아지말 번역기나 고양이말 번역기 혹은 닭꼬대 번역기 따위를 들이밀면 안 된다. 다른건 소용없고 딱 하나 되는 거.. 유아어 번역기를 돌려보자. ‘증세는 아니다.’ -> ‘증세 맞지만 그래도 변명하는 성의 보였으니까 니가 참아. 안 참으면 울어버릴테야.’ ‘공약파기 아니다.’ -> ‘공약파기 맞지만 그래도 변명하는 성의 보였으니까 니가 참아. 안 참으면 울어버릴테야.’ ‘민영화는 아니다.’ -> ‘민영화 맞지만 그래도 변명하는 성의 보였으니까 니가 참아. 안 참으면 울어버릴테야.’ 보시라. 이렇게 나왔다. ‘니들도 니들이 뽑은 댓통령이 질질 짜고 우는 꼴 보고 싶지 않지? 그지? 그러니까 니들이 참아. 니들이 뽑았잖아. 이런 전개 니들도 다 예상했던거 아냐?’ 이거다. ‘애 울면 집안만 시끄러운 거 니들도 다 경험했잖아.’ 이 전략이 먹히는건 딱 하나의 이유. 그네가 졸라리 귀엽고, 측은하고, 뭉클하고, 애틋하다는 유권자가 아직도 한국의 반이나 되기 때문. 이뻐죽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이 정도로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대견하다는데 어쩌겠는가? 정서에 호소하는 방법. 이 방법은 원래 후진국에서 먹힌다. 이걸 차가운 논리로 격파하는건 의미없다. 그렇다면? 정서는 정서로 타격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변호인이 뜨는 거다. 일전에 말한 러셀의 찻주전자와 같다. 종교인은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집단에 판단을 위임한다. 이미 판단을 위임해버린 사람에게 ‘네 판단이 틀렸어.’ 하고 충고해주는 것은 의미없다. 그들이 원하는건 천국이나 내세가 아니다. 그들은 본능에 충실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본능은 사회를 꾸릴 가족을 요구한다. 그러나 가족과는 기어코 싸움이 나고 만다. 가족은 가족이되 싸우지 않는 가족은? 그런 가족은 없다. 대타로 해볼만한 것이 종교 공동체다. 가족 분위기만 내면 된다. 나름대로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이성으로 덤비는건 허무하다. 그들은 진정 무엇을 믿는가? 본심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종교인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을 믿지 말라는 충고는 어리석다. 그들은 ‘신을 시켜주는데’ 관심이 있다. 일본왕과 영국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왕을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왕이 진짜 왕이면 얼굴을 찌푸린다. 왕이 아니기 때문에 왕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에 나온 궤변이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에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개소리도 안 되는 헛소리다. 통치하지 않으면 군림하지 않는 거다. 반대로 해석해야 한다. ‘귀여우나 부담주지 않는다’가 맞다. 중국인들은 어항에 금붕어를 기르거나, 혹은 새장에 새를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서 핵심은 좁은 공간에 가둬놓고 흐뭇해하며 지켜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여자도 가둬놓는다. 전족이다. 그들은 왕을 가둬놓고 섬기기를 좋아한다. 인류학자들은 이와 유사한 풍속을 여러 가지로 보고한다. 네팔의 쿠마리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다. 만만하고 힘없고 착한 여아를 잡아다놓고 지극정성으로 섬기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내팽개친다. 무엇인가? 영국인들은 킹놀이보다 킹메이커놀이가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일본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네팔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왕을 시켜주는데 관심이 있다. 신을 시켜주는데 관심이 있다. 원래 신은 부족의 할배였다. 혹은 할매이기도 하다. 할배할매가 부족의 구심점이다. 할배가 돌아가시는 즉시 부족은 전쟁상태에 돌입한다. 모든 부족민 사회는 심리적으로 잠재적인 전쟁상태에 머물러 있다는건 인류학자의 보고다. 전쟁을 멈추게 하려면? 돌아가신 할배가 와서 지켜보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종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시다시피 여호와도 원래는 부족장이었다. 예수가 재림한다면 피곤한 일이다. 돌아가신 예수 형님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돌아가신 할배는 제삿밥이나 얻어먹고 조용히 떠나주는게 예의다. 할배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신은 존재하되 신이지 말아야 한다. 왕은 존재하되 왕질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신의 두 발을 잘라서 신궁에 가둬놓고 ‘신 시켜주기’ 좋아한다. 중국인들이 전족으로 부인의 행동반경을 묶어놓고, 정성껏 요리를 해주며 좋아하는 것과 같다. 새모이 주기보다 더 즐겁다고 한다. http://tarnatos.tistory.com/11 “중국인들의 생활을 지켜본 한국 여자들은, 중국여자들은 남자를 어떻게 이다지도 훌륭하게 훈련시켰는지를 매우 궁금해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내에게 차와 아침을 대접한 후, 돈벌어오러 출근하고 열심히 일한 다음 퇴근해서는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투정하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아내가 먹을 저녁요리를 준비하는 중국 남자... 여자들끼리 모여 마작이라도 할라치면 집주인 되는 남편은 정성을 다해 웨이터 노릇을 자처한다.(원전은 딴지일보)” 중국인들이 가둬놓고 지켜보며 흐뭇해하기 좋아하듯이 그들 종교인들은 신을 때려죽여놓고 ‘신 시켜주기놀이’를 좋아한다. 그들은 박근혜의 두 발을 잘라 청와대에 유폐시켜 놓고 측은해 하며, 애틋해 하며, 불쌍해 하며, 눈물을 지으며, 섬기기놀이 좋아한다. 이면에 권력의 함수관계가 작동함은 물론이다. 만약 박근혜가 자신을 대통령으로 착각하여 진지하게 일이라도 하겠다고 덤비면? 애국이라도 하겠다고 설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대족이 아닌가. 대족은 시집도 못 간다. 인간 심리의 깊은 곳을 흘낏 들여다보기로 하자. 그들은 신을, 그들은 왕을, 그들은 근혜를.. 타자로 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어항 속을 들여다보는 중국인들처럼, 본자이를 한다며 가위를 들이대는 일본인처럼. 그 시선은 공원에서 놀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며 딴생각을 하는 성추행범의 시선과도 같은 것이다. 주체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구경꾼이 아니라. 신에 대해서도, 왕에 대해서도,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번도 창조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수구꼴통에게는 무리. 누드크로키를 할 때 남의 강의실에 몰래 들어와서 그리는 척 하는 가짜를 모델은 곧바로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시선이 다른 거다. 당신은 어떤 시선을 가졌는가? 주인의 시선인가 노예의 시선인가? 시선이 권력이다. 어떤 경우에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야 진짜다. |
와, 전족, 쿠마리, 왕정, 종교 이것들을 한큐에 꿰는구려,
의사결정을 집단에 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