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해마다 새해 첫날을 가톨릭교회에선 ‘세계 평화의 날’로 기린다. 지난 12일 바티칸은 ‘2014년 평화의 메시지’를 공개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내놓은 첫 ‘평화의 메시지’다.(한겨레) 영화 ‘변호인’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정곡을 찔러서 말해주는 평론가나 기자는 아직 없다. 변호인은 ‘부산영화’다. 부산을 배경으로 해서 영화가 히트한 경우는 많다. 부산이 영화의 메카로 떠오른게 우연은 아니다. 의사결정구조로 보아야 한다. 반드시 부산이어야 하는 공간의 구조가 있다. 송강호가 연기를 잘했지만 그것은 곁가지 이야기다. 연기가 잘 될 수 밖에 없는 영화가 있다. 천하의 송강호라도 다른 영화였다면 이 정도의 연기는 불가능했다. 송강호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시니컬한 연기로는 안 된다. 변호인 전반부의 냉소가 송강호 스타일이다. 후반부의 열정은 송강호의 재발견이다. 이건 다른 거다. 감독의 재능도 아니고, 노무현의 후광도 아니다. 한국인의 어떤 원형이 있다. 하나의 원본이 여럿으로 복제된다면 한국인의 원본이 발견된 것이다. ‘카인아, 너의 형제는 어디에 있느냐?’ 딱 걸린 거다. 왜? 그곳에 인구가 두 명 뿐이었기 때문이다. 세 명만 되었어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쟤한테 물어보세요. 아까 쟤하고 같이 있는거 봤걸랑요. 난 몰라요.’ 그곳에 인류가 두 명 뿐이었기 때문에 분명한 대칭구도가 드러난다. 의사결정구조가 세팅된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뒤뚱대는 공간’이다. 딱 걸린 거다. 부산은 산복도로와 바다로 되어 있다. 그 공간은 닫힌 공간이다. 그렇다면 긴장타야 한다. 부산바닥에서 이쪽 아니면 저쪽이다. 풍선효과와 같다. 풍선의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튀어나온다. 반응이 와준다. 의사결정 할 수 있다. 서울이라면? 이쪽을 누르건 저쪽을 누르건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익명의 군중 속에서 카인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부산은? 이쪽을 누르면 반드시 저쪽이 나온다. 바다와 산복도로 뿐. 카인과 아벨 뿐. 딱 걸렸다. 활의 시위는 한껏 당겨졌다. 건드리면 날아가는 수 있다. 화살이 그대의 심장에 날아와 콱 박히는 수 있다. 조심해야 한다. 비좁은 범내골 골목길은 그 팽팽한 효과를 극대화 한다. 노무현은 아우를 챙기는 형의 캐릭터다. 아벨을 버리지 않는 카인. 한국의 가족주의는 그런 딱걸린 상황을 만든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의 핵심은 준석이 두 친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동수를 선택할 것인가 상택을 선택할 것인가? 동수는 시다바리가 되고 상택은 미래를 대비한 보험이 된다. 상택은 모범생이다. 나중에 택시라도 한 대 뽑아줄 힘이 있다. 동수는? 나와바리가 겹친다. 죽어야 한다. 닫힌 부산에서 준석의 출구는 상택이다. 이는 뒤뚱대는 공간의 풍경이다. 선택의 구조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슴 밑바닥에서 저릿하게 느낌 와준다.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송우석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안락한 길을 갈 것인가 고난의 길을 갈 것인가? 팽팽하게 날이 서 있는 긴장된 공기는 부산바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극대화 된다. 메아리가 되돌아오는 거리가 있다. 타코마다리가 공진에 의해 붕괴된 것은 다리폭과 교각간격의 비례가 만드는 주파수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타코마다리의 진동수는 36헤르쯔, 14헤르쯔까지 느려졌을 때 다리는 무너졌다. 풍속이 시속 190킬로까지 견디게 설계된 다리가 70킬로에 무너진 것이다. 교각 사이의 거리와 다리폭의 비가 달랐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관객의 눈물은 공분에 의한 것이며, 공분은 공진에 의한 것이고, 공진은 주파수에 의한 것이고, 주파수는 비례에 의한 것이다. 그 비례가 황금비례로 딱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다. 의사결정을 낳는 대칭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람이 걷듯이 두 다리를 교차하는 것이고, 둘은 벌새가 날개를 떨 듯이 공진을 일으키는 것이다. 진동을 주면 주파수가 몸통역할을 한다. 이때 시간축이 생긴다. 공간의 대칭이 시간의 대칭으로 바뀌면서 대칭≫비대칭의 도약이 일어난다. 영화는 먼저 가족이라는 공진의 울타리를 보이고, 다시 확대된 가족이라는 공진의 울타리를 보여준다. 송변호사는 부인과 자녀라는 가족이 있다. 또 사무실의 미스문과 사무장 및 부산상고 동창들이라는 확대된 가족이 있다. 두 가족을 직선으로 연결하면 세 번째 가족이 나타난다. 그 가족은 국가다. 그런데 국가는 너무 크다. 공진이 안 된다. 가운데 교각이 하나 더 있는 셈이다. 범위를 좁히면 부산바닥이다. 부산바닥은 공간이 좁아서 공진이 일어난다. 변호인은 노무현 영화이면서 한편으로 우리 모두의 영화다. 한국인들은 대한민국 모두를 가족으로 여긴다. 여자건 남자건 가족이다. 전라도건 경상도건 가족이다. 빨갱이든 어버이연합이든 가족이다. 낮에는 티격태격 하고 다투다가 저녁에는 한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가 내일 낮에 또 툭탁거린다. 그러한 한국인의 원형으로 볼때는 심지어 건희나 몽구도 가족이다. 한국인들은 몽구나 건희를 동네형님 정도로 여긴다. 그런데 몽구나 건희는 우리를 종으로 여긴다면? 새누리 애들이나 풀어서 노동자들 때리라고 뒤에서 시키고 그런다면? 가족이라면 그들도 눈물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국가를 가족으로 여기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국가를 정글의 생태계로 여긴다. 정글에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된다. 생태계 단위로 생각하면 사람들은 국가 안에는 빨갱이도 있어야 하고, 빨갱이 잡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국가 안에 의사결정을 위한 대칭을 만드는 것이다. 가족 안에 엄마는 빨갱이고 아빠는 국정원요원일 수는 없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노무현의 진짜 의미는 한 인물 안에 노가다 시절의 고단한 과거와 잘 나가던 변호사 시절의 찬란한 미래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누려 하지만, 노무현 안에는 부자와 빈자가 공존하고,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공존한다. 그리고 여기서 공진이 일어난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사람은 왜 눈물을 흘릴까? 엄마를 놓쳐버린 아기가 혼자 고생을 하는데 그건 우는 이유가 안 된다. 부모를 잃은 아이는 눈물도 잃어버린다. 아이가 진짜 우는 이유는 그 고통스런 순간에 엄마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데 있다.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남이 아니라 나의 일부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의사결정을 위해 적을 만든다. 내부결속을 위해 반미, 반일, 반중, 반북, 반러로 가다가 이렇게 고립되었다. 서로의 살을 깎아먹기 시작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아벨이 카인을 겨눈다. 무엇인가? 공간의 대칭을 시간의 대칭으로 바꿀 때 공진이 일어난다. 타코마다리가 붕괴된다. 막노동하던 과거의 노무현과 변호사가 된 미래의 노무현이 만나서 이루는 대칭은, 공간이 아닌 시간의 대칭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원형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국인으로 하여금 한국인이도록 하는 동기부여는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고생하다가 마침내 성과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나이드신 부모와 얼싸안고 뺨을 부비는 그런 모습이다. 고향을 지키는 사람과 떠난 사람,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가 만나서 그리는 커다란 동그라미다. 그것은 공간이 아닌 시간의 대칭이다. 사건은 기승전결의 구조를 그린다. 기승과 전결이 만나 대칭이 완성된다. 동그라미가 완성된다. 그 동그라미는 아름답다. 그렇다면 의사결정할 수 있다. 남편과 부인의 대칭은 공간의 대칭이다. 부부싸움 일어난다. 공간은 교착될 뿐 돌파구가 없다. 부모와 자식의 대칭은 시간의 대칭이다. 그렇다면 싸울 수 없다. 사납게 다투던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의식해서 싸움을 멈추듯 한국인들은 공간에서 교착된 것을 시간에서 풀었다. 노무현 캐릭터 안에 그것이 있다. 국밥집 아줌마를 좁디만 실제로는 부모와 만나고 자신의 과거와 만나는 것이다. 국밥집 아줌마와 진우는 타인이 아니라 구석에 밀어둔 과거의 나다.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만나서 진정한 나를 완성한다. 입체적인 인물 캐릭터 완성이다. 동수와 준석의 대칭은 공간의 대칭이다. 칠성파와 21세기파가 영도다리에서 만났다. 당연히 싸움이 난다. 반면 준석과 상택의 대칭은 시간의 대칭이다. 공간의 교착은 시간으로 풀어야 한다. 계란이 바위를 깨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있는 계란은 죽은 바위를 넘는다. 화장실은 하나다. 똥쌀 넘은 둘이다. 당연히 쌈난다. 이는 공간의 대칭이다. 둘이 교대로 화장실을 이용한다. 시간차로 해결한다. 가족은 공간의 대칭으로 인한 긴장된 공기를 시간의 교대로 넘는 장치다. 국가는 확대된 가족이라는 한국인의 믿음과 그것을 부정하는 세력간의 싸움이다. 시간은 약속이고 약속은 신뢰이며 신뢰는 살아있음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싸움이다. 시간으로 약속해서 풀어갈 일을 공간에서 교착시킨 사람은 박근혜다. 북한에는 7경원의 희토류와 7천조원의 광물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탐사되지 않은 석유는 논외다. 러시아와 몽골로 진출하는 교통로의 가치는 셈할 수 없다. 북한은 그대에게 죽여야할 동수인가 아니면 나중에 택시 뽑아줄 상택인가? 공간의 대칭인가 시간의 대칭인가? 가족은 시간으로 뭉친 결사체다. 어린이는 부모의 미래를 대비한 보험이다. 그래서 약속이 지켜진다. 그래서 가족은 살아있다. 우리는 공간에서 교착된 것은 시간으로 풀 수 있다. 그 시간을 버티게 하는 것은 약속이다. 그 약속을 끌어내는 것은 눈물이다. 공분이다. 프란치스코는 묻는다. 너의 형제는 어디에 있느냐? 형제는 시간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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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대칭을 시간의 비대칭으로 풀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