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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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744 vote 0 2009.01.02 (02:28:19)

 

양자구조론

에너지란 무엇인가?

양자구조론은 구조론의 관점에서 양자론을 새롭게 해석한다. 양자론의 핵심은 물질의 기본인 입자의 존재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이다. 양자론의 입자는 다발 형태의 불연속적인 값을 가지는 에너지 보존의 한 가지 형태이다.

자연계에서 물질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가지 형태를 가진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물질은 이들 사이에서 변화, 환원 그리고 보존된다. 이 중에서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공간 상에서 위치를 가지는 입자 뿐이다.

나머지는 입자와의 상대적인 관계를 추론하여 인식할 수 있다. 이에 에너지라는 표현을 쓴다. 에너지는 이 다섯 중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지만 에너지 보존이 법칙에 따라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다는 의미다.

에너지 보존은 물질이 외부와 차단된 닫힌계 안에서 변화와 환원에 의해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의 어떤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있더라도 증가나 감소, 혹은 발생이 없이 전체적인 비례값이 보존된다는 법칙이다.

질, 입자, 힘, 운동은 양(量)과 일정한 비례식의 함수관계로 엮여있기 때문이다. 질, 입자, 힘, 운동은 양(量)이 구조적인 집적상태를 이룬 것이며 이를 수학적으로 해체하여 양으로 나타낼 수 있다.

● 에너지 보존은 닫힌계 안의 질, 입자, 힘, 운동, 량 사이에서 성립한다.

● 에너지는 인간이 관측하는 입자를 중심으로 형태가 변화, 환원, 보존된다.

● 질, 힘, 운동, 량은 관측되지 않고 추론될 뿐이므로 에너지로 표현한다.

입자는 에너지 보존의 다섯 가지 형태 중에서 두번 째 형태다. 어원으로 보면 에너지(energy)는 안(en)에서+일(ergy)한다는 뜻이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자이로스코프처럼 내부에 힘과 운동을 감추고 있다.

자연계에서 물질은 닫힌계 안에서 입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물질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여러 모습을 가지지만 입자일 때 외부에서 작용하여 그 반작용에 따른 힘과 운동과 양의 값을 파악하여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이 물질을 인식하는 방법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활용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접촉이다. 인간의 모든 인식은 힘의 작용으로 외부에서 접촉하여 그에 따른 반작용의 값을 분석하고 추론하여 얻어진다.

인식하기 위하여 외부에서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은 정해져 있다. 모든 작용은 궁극적으로 힘의 작용이므로 그 힘을 담는 그릇이라 할 입자 상태에서만 작용을 가할 수 있다. 질, 힘, 운동, 량의 상태일 때는 직접 작용할 수 없다.

양은 다른 어떤 대상의 내부로 침투하여 그 대상에 종속되어 나타날 뿐 양 그 자체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힘과 운동은 물질형태의 변화과정에서 순간적으로 성립하고 곧 사라진다.

힘과 운동과 양은 위치를 특정할 수 없으므로 외부에서 작용할 수 없다.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은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인식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오직 입자만이 작용하여 반작용된 값의 데이터를 구할 수 있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자연과 접촉하여 데이터를 얻는 것이다. 값을 구하는 것이며 그 값은 양(量)의 값이다. 양은 쪼개지는 것이다. 물질이 쪼개지므로 인간이 작용하여 데이터를 구할 수 있다.

바위를 인식하려면 바위의 표면을 긁어보아야 한다. 바위가 단단해서 조금도 쪼개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바위를 인식할 수 없다.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할이 필요하다. 양은 그 분할된 입자의 최소단위다.

무한히 쪼개면 무한히 쪼개진다. 데이터는 무한히 증가한다. 그러므로 양 그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 인간이 인식하는 모든 양은 입자와의 비례량이다. 양은 단지 입자와 관계된 데이터를 제공할 뿐이다.

지구에 모래알이 몇개인지는 알 수 없다. 모래입자의 크기를 1이라 할 때 그 비례량을 계산할 수는 있다. 인간에 의해 측정되는 모든 양(量)은 독립적인 양이 아니라 비례량이다. 그 비례는 입자와의 비례이다.

양과 입자와의 비례는 반드시 운동과 힘을 거쳐 구해진다. 양에서 바로 입자로 건너뛸 수는 없다. 운동과 힘은 양과 입자를 연결하는 징검다리다. 인식대상은 언제나 입자이며 인식내용은 언제나 양이다.

사과를 인식하는 것은 그 사과를 맛보고 만져보고 색을 보고 향을 보고 그림 속이 사과와 구분하여 아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사과라도 보면서 눈동자를 움직인 거리, 만지면서 손가락이 움직인 거리 등 운동을 담고 있다.

운동없이 인식은 불가능하다. 또 운동은 힘을 담고 있다. 힘 없이 인식은 불가능하다. 단지 눈으로 본 것만으로는 그림 속의 사과와 실제 사과를 구분할 수 없으므로 운동과 힘에 대한 비례값을 알아야 하다.

원(圓)을 중심점과 거리가 같은 점들의 집합으로 정의할 때 그 점의 수는 무한히 많다. 유의미한 값을 얻을 수 없다. ‘~이면 ~이다’의 작용 반작용 법칙을 적용하여 입자의 크기를 1로 할 때의 상대적인 값을 얻을 뿐이다.

인간이 수력의 힘이나 증기압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물이나 수증기라는 구체적인 입자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입자를 터빈이나 가마의 내부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힘을 용기에 가두는 구조 자체가 이미 입자다.

우리가 입자라 부르는 것은 에너지(energy)의 어원대로 안(en)에서+일(ergy)하도록 용기(容器)에 가둔 것이다. 가두었기 때문에 위치가 특정되고 위치가 특정되므로 비로소 작용 반작용을 적용하여 인식하고 이용할 수 있다.

가두지 않았을 때 양은 무한하므로 값을 특정할 수 없고, 힘과 운동은 위치를 특정할 수 없으므로 외부에서 작용할 수 없다. 힘과 운동과 량에 대한 정보는 모두 입자에 대한 상대적인 관계를 추론하여 얻어진 것이다.

힘과 운동과 양에 대한 정보는 입자가 1일 때 힘은 얼마, 힘이 1일 때 운동은 얼마, 운동이 1일 때 양은 얼마 하는 식의 비례값이며 절대적이고 고유한 값은 없다. 모든 값은 입자를 1로 놓았을 때의 상대적인 값이다.

물질은 상대성의 원리로 해명되는 관성계 안에서의 정지해 있는 입자일 경우에 한해서 인간이 측정하고 인식할 수 있다. 우주 안에서 모든 정지상태는 관성계 내에서의 상대적인 정지일 뿐 절대적인 정지상태는 없다.

관성계는 닫힌계 안의 밀도공간에 의해 성립한다. 측정이 가능한 것은 정지해 있는 입자이며 닫힌계 안의 밀도공간에 붙잡혀 있는 입자가 정지해 있다. 밀도공간은 곧 질이다. 질이 입자를 가두어 관측이 가능하게 한다.

질이라는 그릇에 가두어져 상대적인 정지상태의 입자를 인간이 관측하기 위해 외부에서 힘으로 작용하여 반작용되어 나타나는 힘과 운동과 양의 값을 측정한다. 이때 실제로 얻어진 값은 양(量)이며 나머지는 모두 추론이다.

● 외부 작용으로 측정이 가능한 것은 모두 입자다. 나머지는 추론된다.

● 작용의 결과로 실제로 측정된 값은 모두 양이다. 나머지는 추론된다.

우리가 실제로 인식하는 정보는 양이지만 양 자체는 인식할 수 없고 운동량을 인식한다. 운동은 힘에 의해 성립하므로 실제로는 힘을 인식한 것이며 힘은 입자가 가두므로 궁극적으로는 입자를 인식한 것이다.

입자 1이 힘 2를 가두고, 힘 2가 운동 4를 가두고, 운동 4가 양(量) 8을 가둘 때 작용 반작용 결과로 얻어진 양(量)의 값이 8이면 그곳에 입자 1개가 있다는 사실을 추론하여 인식할 수 있다. 모든 인식은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인간이 사과를 보았을 때 색과 향과 무게와 촉감의 양(量)을 인식한다. 사과 입자 1은 색깔 얼마, 향기 얼마, 무게 얼마, 촉감 얼마로 양의 비례값을 알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여 그것을 사과 입자 1로 판정하는 것이다.  

● 인식되는 것은 모두 양이다. 그러나 양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

● 양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운동시켜야 한다. 운동시키려면 힘이 필요하다.

● 힘을 이용하려면 입자의 그릇에 가두어야 한다. 입자는 질에 가두어진다.

● 입자가 질의 그릇에 가두어져 위치가 특정될 때 작용을 가할 수 있다.

● 질은 닫힌계, 장(場), 관성계로 밀도를 성립시켜 입자를 붙잡는다.

양자역학이 말하는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은 이러한 인식의 어려움을 해명하고 있다. 광속으로 움직이는 빛 입자는 질의 밀도공간, 곧 닫힌계 내에 가두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위치와 운동방향을 동시에 특정할 수 없다.   

질은 입자를 가두고, 입자는 힘을 가두고, 힘은 운동을 가두고, 운동은 양을 가둔다. 이들 사이에는 일정한 비례식의 함수관계가 있다. 질에 가두어져 정지된 입자에 작용하여 그 반작용된 양의 값으로 힘과 운동을 추론한다.

입자란 무엇인가?

물질의 기본은 입자다. 입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양자구조론은 계의 평형원리로 입자를 설명한다. 낮은 단계에서 성립하는 작용 반작용의 대칭이 평형에 이를 때 높은 단계가 개입한다는 것이 계의 평형원리다.

량의 평형에서 운동, 운동의 평형에서 힘, 힘의 평형에서 입자, 입자의 평형에서 질이 개입한다. 거꾸로 질이 입자를, 입자가 힘을, 힘이 운동을, 운동이 양을 가두며 그 잠금장치의 빗장을 열어 인식할 수 있다.   

존재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단계로 집적되어 질적인 고도화에 도달한다. 가장 높은 질의 단계에서 밀도가 성립한다. 밀도가 모든 물질 형태 변화의 원인이다. 집적도가 낮은 양에서는 해체되어 무한소에 도달한다.

● 질은 밀도(집적도)가 높다.

● 입자, 힘, 운동의 순으로 점차 집적도가 낮아진다.

● 양에서 완전히 해체되어 물질은 무한소가 된다.

양자구조론은 자연계의 모든 현상을 밀도차 하나로 모두 설명한다. 모든 힘은 미는 힘이며 인력은 원래 없다. 닫힌계 안에서 밀도가 척력을 유발하며 이것이 모든 변화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우리가 인력이라 일컫는 것은 입자상태를 말함이며 이는 척력의 평형에 따른 에너지의 갇힘 현상이다. 계의 중심부가 주변부 보다 밀도가 낮을 때 척력은 작용 반작용의 평형을 이루어 계를 성립시키고 그 안에 갇힌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 단계에서 질로 갈수록 집적도가 높고 양으로 갈수록 집적도가 낮다. 집적도 곧 밀도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의 일방향으로만 척력의 힘이 작용한다. 그러한 일방향성이 힘과 운동의 원인이다.

량의 원인은 운동이고, 운동의 원인은 힘이며, 힘의 원인은 입자다. 힘은 에너지다. 에너지 보존을 성립시키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모두 에너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힘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흔히 힘을 에너지라 한다.

● 모든 힘은 척력이다.

● 인력은 두 척력의 맞섬에 의한 평형계의 성립이다.

● 계 바깥의 밀도가 더 높을 때 척력은 계 내부에 갇혀 입자를 이룬다.

위치에너지라는 표현은 모호하다. 구조론으로 보면 위치에너지는 그 자체로 입자다. 모든 입자는 위치에너지를 가진다. 모든 입자는 바깥쪽 밀도가 안쪽보다 높으므로 붕괴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나온다.

핵 주위에 성립하고 있는 전자가 에너지를 잃으면 핵 가까이로 추락하면서 위치에너지를 방출하여 손실된 값을 보상한다. 반대로 에너지를 얻으면 핵에서 멀어져 들뜬상태가 된다. 들뜬 정도에 비례하여 에너지를 축적한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라 모든 운동은 밀도가 낮은 쪽의 일방향으로만 성립하므로 안쪽 밀도가 바깥쪽보다 낮을 때 척력이 계 내에 갇힌다. 그것이 인력이다. 두 척력이 마주보고 교착을 이룬 것이 인력이며 곧 입자다.

양자구조론에서 인력은 ‘갇힌 척력’이다. 힘은 밀도가 낮은 쪽으로만 작용하므로 척력이 바깥보다 밀도가 낮은 안쪽을 향해 마주보고 교착되어 평형을 이룸에 따라 외부에서 관측되지 않는 숨은 척력이 인력이다.

파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각하여 인식할 수 있는 물질은 모두 입자다. 입자는 눌려진 용수철처럼 척력을 안으로 감추고 있다. 자이로스코프처럼 내부에 힘과 운동과 량이 숨어 있다. 내부(en)에서 몰래 일(ergy)하고 있으므로 energy다.

● 가두는 것은 질이다.

● 가두어진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입자다.

● 빗장이 열려서 밖으로 터져나오는 것은 힘이다.

● 터져나오면서 시간과 거리로 전개하는 것은 운동이다.

● 전개가 막힐 때 가로막는 대상에 침투하는 것은 양이다.

입자가 붕괴할 때 그 감추어진 힘이, 운동으로 전개하고, 양으로 대상에 침투하여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그 중에서 입자만 접촉하여 인식할 수 있고 실제로 얻어낸 정보는 오직 양(量)의 정보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논리로 추론한 것이다.

힘과 운동과 양은 그 자체로는 인식할 수 없다. 우리가 힘을 인식하는 것은 둘이 충돌했을 때 둘 중 한쪽만 부서지고 나머지 하나는 멀쩡한 것을 보고 논리로 추론하여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운동은 시간과 거리가 걸리므로 그 존재가 인정된다. 모든 운동은 절대로 시간이 걸리며 우리는 변화가 일어날 때 시간의 흐름을 보고 추론하여 운동의 존재를 인정할 뿐 운동 그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

양도 마찬가지다. 양은 작용 어떤 대상의 운동을 정지시키는데 필요한 값이다. 사과의 무게가 100이라고 양을 인식함은 작용 반작용에 따라 사과에 작용할 때 100으로 작용해야 그 사과의 현재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양은 변화가 일어났을 때 변화된 사실을 토대로 추론하여 양의 존재를 인정할 뿐 양 자체는 인식되지 않는다. 인간이 실제로 얻는 정보는 입자, 힘, 운동이 얼마일 때 량의 값이 얼마라는 비례량 뿐이다.

● 비반복성이 발견되었을 때 추론하여 양을 인식한다.

● 불연속성이 발견되었을 때 추론하여 운동을 인식한다.

● 비가역성이 발견되었을 때 추론하여 힘을 인식한다.

● 비분할성이 발견되었을 때 추론하여 입자를 인식한다.  

● 비순환성이 발견되었을 대 추론하여 질을 인식한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실제로 고객이 받은 것은 밥이 아니라 그릇이다. 비유하면 그 그릇이 입자다. 음식을 먹을 때 실제로 먹는 것은 그릇이 아니라 밥이다. 비유하면 그 밥이 양이다.

입자만 인식하기 위하여 통제할 수 있고 그 통제의 결과로 얻어지는 값은 양 뿐이며, 나머지는 논리구조 안에서 추상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곤란을 피하기 위해 물리학은 에너지라는 편리한 용어로 환원시켜 설명한다.

소립자만 입자가 아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맞섬에 의한 평형 자체가 입자다. 주먹으로 벽을 치면 그 힘의 작용 반작용의 평형계가 입자다. 그 경우 입자는 순간적으로 성립하였다가 곧 붕괴되므로 입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입자는 밀도공간에서 보존된다. 주먹으로 벽을 치는 순간 성립한 입자가 보존되려면 다수의 입자가 주변에 공존하여 밀도를 성립시켜야 한다. 파동은 일시적으로 그러한 보존을 성립시켜서 입자와 같은 효과를 낸다.

빛은 진행함으로써 입자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진행이 중지될 때 관성계의 보호를 받지 못하므로 외부와의 밀도차가 없어져서 내부 척력의 평형계가 해체된다. 빛은 정지상태에서 입자의 성질을 보존할 수 없는 불안정한 입자다.

빛의 진행이 관성계를 성립시킬 때 상대성 원리에 따라 관성계는 정지상태로 볼 수 있으므로 빛도 입자다. 광속으로 움직이는 빛을 빛의 속도로 추적하면 추적자의 관점으로 볼 때 빛은 확실히 정지해 있는 입자다.

빛은 같은 속도로 나란히 진행하는 빛에 대해서만 완벽하게 입자다. 파동 역시 진행하는 동안 입자와 유사한 상태를 성립시킨다. 파동은 진행하면서 순간적으로 척력을 가두지만 외부와 밀도차이가 유지되지 않으므로 곧 해체된다.

호이겐스의 원리에 따라 파동은 작용 반작용의 평형에 의해 둥근 구면파를 만든다. 문제는 파동이 전진할 뿐 후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작용 반작용 원리에 따라 전진과 동시에 후진해야 한다.

구면파는 사방으로 동일한 세기의 파동을 만들므로 진행방향과 반대방향인 파동도 생겨야 하는데 그러한 파동이 관측되지 않는 점이 호이겐스의 원리가 가진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왔다.

프레넬은 2차파의 간섭효과에 의해 상쇄된 것으로 이를 해명한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한 설명이다. 2차파가 없는 1회의 파동도 존재한다. 밧줄을 위 아래로 힘차게 흔들면 단 하나의 파동이 전진할 뿐이다.

파동은 왜 전진할 뿐인가? 파동이 전진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밀도차를 성립시킨다는 말이다. 주위가 중심보다 밀도가 높은 닫힌계를 성립시키며 닫힌계 안에서 내부척력의 맞섬에 의한 평형 곧 인력을 성립시킨다는 말이다.

구면파가 둥근 이유는 전진에 의해 바깥쪽 밀도가 안쪽보다 높은 척력의 평형을 성립시켰기 때문이다. 이때 외부와의 밀도차에 의해 가두어진 척력이 외부에서 보면 인력이다. 구면파가 둥근 이유는 인력이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동이 외부와의 밀도차를 만드는 힘은 파동의 진행에 의해 얻어진다. 파동은 진행방향으로만 척력의 갇힘에 의한 인력을 성립시킨다. 파동은 진행방향으로만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반대방향으로는 진행하지 않는다.

입자는 인력을 가져야 한다. 해안의 파도는 물을 수직으로 끌어올린다. 쓰나미가 덮치기 전에 해안의 바닷물은 바다쪽으로 썰물처럼 빠진다. 인력의 작용이다. 엄밀히 말하면 당기는 힘이 아니라 진공의 흡인력이다.

우리가 인력이라 믿는 것은 모두 흡인력이다. 주위보다 밀도가 낮아 쏠림현상이 일어난다. 당기지는 않는다. 미는 힘이 밀도가 낮은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원리에 따라 밀도차에 의해 갇혀 있다가 방향을 바꾸어 풀려나온 것이다.

파도는 진행에 의해 밀도차를 만들므로 파면의 진행방향으로 인력이 작용한다. 파동이 모퉁이에서 회절하는 이유는 모든 방향으로 내부 척력의 평형계, 곧 인력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모퉁이 뒷쪽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파동의 인력이 작용하여 모퉁이를 넘어서면서 주변의 공기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파동이 간섭하여 맥놀이를 이루며 더 큰 파동을 만드는 이유도 역시 인력 때문이다.

기존의 파동이론은 실험을 통해 파동이 회절, 간섭한다는 결과를 얻었을 뿐 그 원인은 해명하지 못했다. 양자구조론에 따르면 입자는 척력을 가두어 척력의 평형계인 인력을 성립시킴으로써 파동은 굴절, 간섭, 회절한다.

프레넬-호이겐스 이론은 불완전한 설명이다. 이는 아픈 사람에게 ‘왜 아프냐? 맞았기 때문에 아프다’로 설명함과 같다. ‘왜 사과가 떨어지지? 무겁기 때문에 사과가 떨어진다’로 대답함과 같다.

‘왜 사과는 무거운가? 외부에서 지구가 인력으로 당겼기 때문에 무겁다’고 설명해야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충족시키는 바른 설명이 된다. 작용과 반작용의 양쪽 측면을 동시에 해명해야 하는 것이다.

‘왜 맞았냐? 외부에서 때렸기 때문에 맞았다.’ 왜 때렸는지 설명해야 완전하다. 모든 변화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지배된다. 작용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반작용의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설명해야 한다.

모든 힘은 미는 힘이다

부메랑이 되돌아오더라도 그 부메랑을 던지는 힘은 미는 힘이지 당기는 힘은 아니다. 모든 힘은 척력이며 인력은 본질적 의미로 볼 때 없다. 인력은 작용 반작용에 따른 내부척력의 평형계다. 인력은 그 자체로 이미 입자다.  

지구가 달을 당기는 힘은 배구공이 물을 채운 수조 바닥에서 떠오르는 것과 같다. 수조의 바닥쪽이 더 밀도가 높기 때문에 공은 밀도가 낮은 위로 움직인다. 모든 인력은 당겨지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떠오름이다.

지구 바깥쪽으로 갈수록, 지구 중심에서 멀수록 입자들의 자유도가 크다. 지구바깥이 지구중심보다 입자들의 자유도가 높으므로 척력이 작용하여 자유도의 밀도가 높은 바깥쪽에서 낮은 안쪽으로 밀리는 것이다.

인력은 척력을 발생시키는 조건이다. 인력이 계 내부에 유지하고 있는 평형계가 해체될 때 척력이 나타난다. 투수가 공을 던지더라도 그 공을 던지는 근육은 수축되며 그 수축은 척력이 아니라 인력인 것이다.

● (밀도 높음)▷(밀도 낮음)◁(밀도 높음) - 인력은 ▷와 ◁가 밀도가 낮은 평형계의 중심을 향하고 있다는 힘의 방향성이다. 인력이 곧 입자다.

대포알이 발사되더라도 화약의 폭발은 질산염이 산화할 때 이온 단위로 결합하며 끌어당기는 인력이다. 그 인력은 외부와의 밀도차에 의한 척력의 갇힘이며 그것이 곧 입자다. 힘은 오직 척력이며 입자의 붕괴로 성립한다.

어떤 형태이든 인력이 작용하면 곧 입자다. 두 개의 자석이 서로 끌어당기고 있다면 자기장이 입자를 성립시키고 있다. 입자가 단단하다는 생각은 인간의 관념일 뿐이고 계(界)나 장(場) 안에는 반드시 입자가 있다.

구조론의 입자는 고도의 추상개념이다. 전자는 원자의 핵을 그대로 뚫고 지나간다. 입자는 평형계를 중심으로 밀도의 층위를 가질 뿐 단단하지 않다. 외부에서 작용을 가하여 그 반작용의 값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입자다.  

● 질 - 모든 힘은 밀도차에 의해 유도된다.

● 입자 - 입자는 계 내부에 척력의 평형에 의한 갇힘으로 인력을 이룬다.

● 힘 - 모든 힘의 작용은 입자의 붕괴에 따른 척력으로 성립한다.

● 운동 - 모든 운동은 밀도가 낮은 쪽으로 일어난다.

● 량 - 양은 운동의 상태변화에 필요한 값이다.

인력이라 부를 수 있는 힘의 상태가 있다. 그러나 양자구조론에서는 입자는 곧 소립자라는 착각에 따른 혼선을 피하기 위해 인력을 힘과 구분한다. 힘은 운동의 원인으로 존재할 때만 힘으로 표현해야 한다.

인과관계를 분명히 하자. 척력이 운동의 원인이다. 인력은 척력의 원인이며 인력에서 운동으로 가려면 인력의 빗장을 푸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손에 들고 있는 사과도 놓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존재의 최소단위는 무엇인가?

오랫동안 존재의 최소 단위는 입자로 생각되었다. 빛이 입자와 파동 사이에서 이중성을 나타내자 양자(量子)개념이 새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이론물리학은 여전히 입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구조론으로 보면 존재의 최소 단위는 입자가 아니다. 모든 입자는 내부에 힘을 가두고 있고, 힘은 운동을 가두고 있고, 운동은 양을 가두고 있다. 양이 존재의 최소단위다. 양은 방향에 대한 정보다.

존재의 최소단위는 입자가 아니라 정보다. 그리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함은 그 사물의 양을 인식하는 것이다. 입자, 힘, 운동은 직접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양의 데이터를 힘과 운동 사이의 함수관계로 추론하여 인식한다.

양은 곧 정보다. 인간은 정보를 입수하여 인식한다. 양은 운동에 의해 노출되며, 운동은 입자의 운동이고, 입자를 운동시키는 것은 외부에서 작용된 힘이므로 힘 곧 에너지를 물질의 최소단위로 보기도 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물질이 질, 입자, 운동, 양의 상태일 때도 에너지라는 표현을 쓴다. 에너지 개념은 터무니없이 확대되어 근래에는 모든 것이 에너지로 표현된다. 이는 편의적인 방법일 뿐이다.

입자인지 힘인지 운동인지 양인지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에너지는 정수배로 나타나는 특정한 값일 때 한하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에너지가 불연속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므로 이를 양자(量子)라 한다.

왜 에너지는 일정한 값일 때 한하여 모습을 나타내는가? 양과 운동과 힘과 입자와 질 사이에 일정한 비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양이 2일 때 운동 1, 운동이 2일 때 힘 1, 힘이 2일 때 입자 1, 입자가 2일 때 질 1이다.

양자구조론이 그 함수관계를 해명한다. 양은 정보다. 존재의 최소단위는 정보다. 그 정보는 방향에 대한 정보다. 이를 ▷로 나타낼 수 있다. 양의 방향이 둘 모이면 순서가 생긴다. 순서가 생기면 방향이 바뀔 수 있다.

양자역학의 불연속성은 에너지가 다발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에너지는 어떻게 다발을 이루는가? 양이 2일 때 운동 1, 운동 2일 때 힘 1, 힘 2일 때 입자 1, 입자 2일 때 질 1로 다발이 만들어진다.

왜 양이 2일 때 운동은 1인가? 양은 비반복성을 나타내고 운동은 불연속성을 나타낸다. 불연속이 성립하려면 양이 2여야 한다. 혼자서는 불연속일 수 없다. 불연속은 순서의 끊김이다. 순서는 2일 때 얻어진다.

스위치가 전원의 켜짐과 끊김을 결정하려면 선이 2여야 한다. 선이 1이면 스위치는 자신의 포지션을 얻지 못한다.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극이 2여야 비로소 스위치의 위치가 특정될 수 있다.

양이 ▷이면 운동은 ▷▷다. 양은 한 가닥 선이므로 앞과 뒤의 방향이 특정되어 있지 않다. 어느 쪽이 앞인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운동은 선이 두가닥이므로 순서를 가진다. 비로소 앞과 뒤가 특정된다.

존재의 최소단위인 정보가 방향에 대한 정보인 이유는 방향의 전환에서 운동을 성립시키고, 방향의 충돌에서 힘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양은 방향이고 그 방향은 일정한 조건에서 운동과 힘을 성립시킨다.

운동은 전개한다. 두 운동이 마주보고 전개하여 충돌하면 ▷◁로 힘을 성립시킨다. 두 힘이 마주보고 충돌하여 교착상태를 유지하며 평형에 도달하면 인력이 성립하며  ▷(▷◁)◁로 곧 입자가 된다.

입자는 위치를 가지고 정지해 있거나 혹은 관성계 안에서의 상대적인 정지상태를 성립시킨다. 입자가 외부작용에 의해 붕괴되면 힘과 운동을 노출시킨다. 양, 운동, 힘, 입자, 질은 정보 ▷의 집적도에 따라 결정된다.

● 량 - 방향, 정보 ▷ - 최종 인식되는 정보

● 운동 - 순서, 변화 ▷▷ - 양을 성립시키는 조건

● 힘 - 순서와 방향의 제어 ▷◁ - 운동을 유도하는 척력

● 입자 - 양자(量子)의 다발 ▷(▷◁)◁ - 힘을 유도하는 인력

● 질 - 밀도차의 성립 (▷◁)(▷◁) - 입자를 붕괴시키는 조건

인간은 언제라도 입자에 작용하여 양을 인식할 따름이다. 질과 힘과 운동과 질은 단지 추론으로 미루어 알 수 있을 뿐이다. 운동은 시간과 거리의 비를 재서 파악하고 힘은 대결하여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입자에 작용하여 얻어진 양의 값을 보고 추론하여 아는 것이다. 입자의 힘, 입자의 운동, 입자의 량을 재는 것이다. 입자만이 분할되므로 인간에 의해 자유자재로 통제될 수 있다.

인간은 입자를 통제하여 양을 얻는다. 거기에 시간과 거리를 셈하여 운동을 얻고 작용 반작용 구조를 파악하여 힘을 얻고, 입자가 붕괴된 원인을 추론하여 질을 구한다. 질은 무게다. 무게는 입자를 저울에 재서 얻는 것이다.  

불연속성의 의미

양자역학은 에너지의 불연속성에 주목한다. 양자구조론은 이를 정보의 해체와 집적으로 표현한다. 존재는 집적도를 가진다. 집적도는 제한된 용기에 최대한 담을 수 있는 정도다. 질이 가장 많이 담긴 에너지 보존 형태이다.

질은 최대한 담은 것이며 입자, 힘, 운동, 량으로 갈수록 해체된다. 양은 궁극적으로 무한소에 도달한다. 계가 해체될 때는 연속성, 반복성을 나타내고 집적될 때는 불연속성, 비반복성을 나타낸다.

플랑크의 흑체복사는 에너지를 집적하여 빛 입자를 구축할 때 관측된다. 반대로 입자가 붕괴되어 에너지가 방출될 때는 연속성이 나타난다. 에너지가 불연속된다는 것은 내부에 평형계가 있으며 방향의 대칭성 ▷◁이 있다는 것이다.

● 양의 비반복성과 반복성

● 운동의 불연속성과 연속성

● 힘의 비가역성과 가역성

● 입자의 비분할성과 분할성

● 질의 비순환성과 순환성

양자역학은 단지 에너지는 불연속성을 말할 뿐이지만 에너지 보존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형태 사이에서의 변화와 환원으로 성립하므로 비반복, 불연속, 비가역, 비분할, 비순환의 다섯 단계로 에너지는 다발을 이룬다.

에너지 보존을 성립시키는 에너지의 변화와 환원은 정보 ▷의 집적과 해체 사이에서 성립하며 질이 가장 큰 정보의 다발이며 양은 그 정보의 다발이 완전히 해체된 것이다. 양은 최소한의 정보다.

● 양 - 해체된 정보

● 운동 - 모이는 정보

● 힘 - 모이다 마주친 정보

● 입자 - 특정 위치에 질서있게 모인 정보

● 질 - 엮여서 결합된 최대한의 정보

비반복, 불연속, 비가역, 비분할, 비순환성은 에너지가 조립되는 과정의 성질이다. 광자가 새로 만들어질 때의 상황이다. 반대로 반복, 연속, 가역, 분할, 순환성은 에너지가 해체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불연속성을 나타내는 이유는 양에서 운동, 운동에서 힘, 힘에서 입자, 입자에서 질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를 ◁와 교착시켜 평형을 유도하기 위한 방향전환을 하기 때문이다. 인력을 성립시키는 평형계가 불연속성이다.

물질은 양의 반복/비반복, 운동의 연속/불연속, 힘의 가역/비가역, 입자의 분할/비분할, 질의 순환/비순환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공유한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은 결합과 해체에 따라 상반되게 나타나는 성질 때문이다.

모든 물질은 집적될 때와 해체될 때 상반되게 행동한다. 양자역학은 그 점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양과 운동과 힘과 입자와 질을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에너지로 나타내기 때문에 빚어진 혼란이다.

구조는 어떻게 제어하는가?

구조론의 핵심은 제어다. 제어한다는 것은 장악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통제하려면 먼저 상대방을 붙잡아야 한다. 그 다음 힘을 가하여 작용해야 한다. 작용하여 반작용의 값을 얻을 수 있다.

먼저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붙잡을 수 있는 조건은 질의 밀도공간이다. 입자는 질에 잡혀서 정지상태 혹은 관성계를 이룬다. 질의 밀도가 없다면 입자는 순간적으로 해체되어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통제하기 위하여 가두어야 한다. 가두어 붙잡는 것이 인력의 입자다. 붙잡은 다음 밀어서 작용하는 것이 척력의 힘이다. 그 힘의 작용이 전달됨이 운동이다. 기존의 만유인력 개념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만유인력 혹은 인력 개념은 입자 내부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물질은 밀도차에 의한 척력을 가질 뿐이다. 당기려고 붙잡으면 이미 입자이지 힘이 아니므로 이를 인력이라 표현한다면 틀렸다.

서로 미는 둘을 일정한 거리 이상으로 접근시키면 미는 힘의 교착에 의해 갇혀 버린다. 이때 당기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난다. 그것이 입자다. 만원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내부압력 때문에 버스 문을 열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공중을 날아가는 여객기는 내부의 기압이 바깥보다 높으므로 비행기 안에서 문을 열 수 없다. 여객기의 창문이 열리지 않는 이유를 두고 외부에서 인력이 작용하여 누가 밖에서 창문을 세게 잡아당기기 때문이라 설명하면 틀렸다.  

서로 밀기 때문에 적대적 의존으로 도리어 붙어버린 것이 입자다. 양성자와 중성자가 중간자를 교환하여 강력을 성립시키는 이치와 같다. 이때 중성자와 양성자가 중간자를 교환함은 권투선수가 펀치를 교환함과 같다.

권투선수는 주먹을 내밀어 서로 밀기 때문에 서로의 자유도를 제한한 결과 저절로 붙어서 클린치가 된다. 서로를 밀어내려는 권투선수가 일정한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오히려 달라붙어서 씨름이 되는 것이다.  

인력은 스모선수 둘이 끙끙대며 교착된 것이다. 이때 두 스모선수의 미는 힘이 강할수록 큰 인력을 성립시켜 입자를 이룬다. 입자가 붕괴되면 척력이 겉으로 나타나서 한 사람이 금 밖으로 밀려나가며 승부가 결정된다.

서로 밀어내기 위해서는 미는 동작을 취할 수 있는 일정한 정도의 거리와 공간이 있어야 한다. 자유도가 있어야 한다. 입자는 서로 상대방을 밀다가 각자 상대방의 자유도를 제한한 결과로 자유도를 잃어서 갇혀버린 것이다.

질은 어떻게 입자를 가두는가?

질은 공존이 불가능한 두 마리 호랑이가 한 우리에 공존하여 밀도가 유발된 상태다. 두 마리는 공존할 수 없으므로 질이 성립하여 있다면 곧 입자, 힘, 운동, 량으로의 전개가 진행되며 그 전개가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은 질≫입자≫힘≫운동≫량의 순서로 진행된다. 량에서 밀도가 제로에 도달하면 사건은 종결된다. 질은 밀도의 성립, 입자는 밀도의 평형, 힘은 평형계의 해체, 운동은 해체의 진행, 량은 해체된 결과다.

정확히 말하면 각 단계의 결정이다. 질은 밀도여부의 결정이며 입자는 평형여부의 결정이고 힘은 해체여부의 결정, 운동은 진행여부의 결정, 양은 최종 해체된 결과의 결정이다. YES와 NO 중에서 하나를 결정한다.

공의 밀도가 배트보다 높으면 파울볼이고 배트의 밀도가 공보다 높으면 홈런볼이다. 그 순간에 결정된다. 공이 유리창과 충돌할 때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유리창에 튕겨 되돌아나올 것인지가 결정된다.

결정이므로 집적과 해체에 따라 상반된 성질이 나타난다. 닫힌계 안에서는 해체로만 진행하고 열린계에서 일정한 갇힘의 조건이 주어지면 집적으로 진행된다. 상반되게 나타나므로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 된다.  

대통령 선거에 비유할 수 있다. 한 마리만 들어갈 수 있는 우리에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들어가려고 다투듯이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청와대에 두 사람이 들어가려고 해서 생겨난 사건이 대통령 선거다.

자연계에서 모든 변화는 오직 이 하나의 원리에 의해 일어난다. 소설이나 드라마도 결국 한 사람의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성춘향의 방에 이몽룡과 변학도 두 사람이 서로 들어가려 해서 생겨난 사건이다.

예외는 없다. 자연계 내의 모든 존재는 닫힌계 내부에서 밀도차에 의한 계의 해체라는 하나의 원리를 따른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과학, 기술, 생물 등 모든 분야가 결국은 이 하나의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  

밀도가 높은 쪽과 낮은 쪽을 적절히 배치하며 반복, 연속, 가역, 분할, 순환의 각 단계에서 YES와 NO 여부를 결정시켜 인간은 이로움을 얻는다. 밀도가 높은 쪽을 위에 두고 낮은 쪽을 아래에 두면 수력발전을 얻는다.

질량이란 무엇인가?

질량이란 표현은 질과 양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입자와 힘과 운동이라는 다섯 가지 물질형태의 복잡성을 함의한다. 모이면 질이고 흩어지면 양인데 그 모이고 흩어지는 절차가 입자와 힘과 운동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해 모이나 흩어지나 값은 불변이므로 질량이라 표현한다. 에너지라는 표현과 같다. 다른 점은 에너지는 다섯 형태의 변화과정을 설명하고 질량은 변화가 종결된 후의 안정된 상태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댐에 물이 고여 있으면 수력이다. 수력은 위치에너지다. 위치에너지는 힘이다. 그러나 양자구조론으로 보면 물이 댐에 고여있는 상태 그 자체로 입자다. 엄밀한 의미에서 에너지는 댐의 수문을 열어야 성립한다.

수소 원자나 혹은 그 내부의 원자핵이나 혹은 그 주변의 전자나 혹은 소립자의 존재가 모두 댐에 물이 고여있는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원자핵의 구성소들이 원자의 인력에 잡혀있는 그 자체로 입자다.

입자란 곧 운동에 스핀이 걸려 붙잡힌 것이다. 정보 ▷가 추가적인 에너지 투입에 의해 가속될 때 ▷▷에서 진행방향의 밀도가 높아지면 방향이 전환되어 스핀이 일어난다. 일정 이상으로 가속되면 진행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전자를 광속 이상으로 가속하면 광속 이상으로 추가되는 에너지는 전자의 스핀에 의해 갇혀버린다. 그렇게 갇힌 에너지는 질량의 증가로 확인된다. 질량은 스핀에 의한 에너지의 갇힘을 설명하고 있다.

정지해 있는 자동차에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추가된 에너지는 높아진 RPM 속에 숨는다. 불완전한 입자인 전자가 광속 이상으로 추가되는 에너지를 가지면 높은 스핀이 걸려 그 만큼 강력한 입자가 된다.  

상자 속에 진흙을 넣고 흔들면 가운데에서 둥글게 뭉쳐진다. 진흙을 뭉치게 하는 힘은 인력이 아니라 진흙들이 서로 충돌한데 따른 척력이다. 입자들의 자유운동이 척력을 유발한다. 상자가 척력에 스핀을 걸어 인력으로 나타나게 한다.

상자는 진흙보다 단단하다. 더 밀도가 높다. 그러므로 가둔다. 힘은 항상 밀도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수학에서 2가 1+1로 될 수는 있어도 1이 2가 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2는 1+1로 풀어서 1이 될 수 있지만 1은 절대로 2가 될 수 없다. 큰 그릇에 작은 그릇을 담을 수는 있어도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는 없다. 닫힌계 안에서 밀도는 항상 낮은 쪽으로만 작용한다.

양자란 무엇인가?

계에 밀도가 걸려있으면 척력이 성립한다. 척력에 의해 작용 반작용의 원리가 성립한다. 이때 반작용에 의해 척력의 작용이 복제된다. 그 복제되어 증가된 것이 애초의 것과 짝을 지어 높은 포지션으로 상승하여 집적된다.

반작용은 작용을 복제한다. 요철(凹凸)의 원리다. 요(凹)와 철(凸), 인풋과 아웃풋, 입력과 출력, 작용과 반작용은 정보의 전달과정에서 서로를 복제한다. 복제하면서 정보를 생산한다. 생산된 정보를 집적한다.

상자가 있다. 상자에 ☆를 던져넣으면 ☆가 튀어나온다. 두 개의 ☆가 얻어진다. 둘은 짝을 지어 세트를 이룬다. 그것이 양자다. 음(音)에 비유할 수 있다. 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음원에서 귀까지 전달하면서 무수하게 복제되었기 때문이다.

음(音)은 공명한다. 한 마리 개구리가 울면 일제히 개구리들이 운다. 음은 메아리를 만들어 반복적으로 자신을 복제한다. 그렇게 증폭되어 다발을 이룬다. 숟가락과 입술의 곡선은 닮아있다. 정보 전달의 인풋과 아웃풋은 복제된다.

연필은 손가락을 닮아있다. 정보의 전달과정은 서로를 복제한다. 내 컴퓨터에 깔린 한글파일과 완전히 닮은 한글파일이 당신의 컴퓨터에도 있다. 둘이 닮아있어야 정보는 전달된다. 그렇게 존재는 다발을 이룬다.

양자는 에너지 다발이다. 에너지가 다발을 이유는 작용 반작용에 의해 복제된 양이 운동으로 변해 숨기 때문이다. 운동이 복제되어 힘으로 숨기 때문이다. 힘이 복제되어 입자로 숨기 때문이다. 입자가 복제되어 질로 숨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유전인자가 복제되어 아기를 탄생시킨다. 복제된 아기에 의해 입자의 밀도가 증가한다. 그 밀도의 증가에 의해 힘이 얻어지고 그것이 사회의 진보를 낳는 궁극적인 원동력이 된다.

양자이론의 불연속성은 양, 운동, 힘, 입자, 질의 집적구조 안에서 밀도가 증가할 때 일부가 높은 포지션으로 이동한 결과다. 양에서 운동으로, 운동에서 힘으로, 힘에서 입자로, 입자에서 질로 포지션 이동이 일어난다.

동일한 레벨, 같은 층위의 포지션에서는 변화가 촉발되지 않는다. 동일 포지션에서는 에너지가 작용하지 않는다. 포지션의 이동에서 에너지 작용이 있다. 구조론은 포지션들 사이에서 에너지 작용의 연쇄적인 고리를 추적한다.

닫힌계란 무엇인가?

계는 장(場)이다. 상대성이론에서의 관성계다. 계는 밀도차가 성립하는 영역이다. 계를 중심으로 ‘밀도≫척력≫반작용≫복제≫집적’이 연쇄적인 고리로 이어지며 구조화를 이루어 물질을 탄생시킨다.

세포분열 과정에서 인간의 유전자가 반복적으로 복제됨이나 에밀레종이 울어서 소리를 토해냄이나 수백억년 전 우주가 빅뱅으로 인플레이션 상태를 유발함이나 같다. 모든 존재는 이 하나의 원리로 궁극적인 동력원을 삼는다.

만유는 밀도를 가진다. 밀도는 척력을 낳고 척력의 작용이 반작용으로 복제되고 둘의 대칭이 평형일 때 높은 포지션으로 이동하여 집적된다. 만유는 집적에 의해 탄생하며 집적된 정도에 따라 양, 운동, 힘, 입자, 질의 포지션이 있다.

어떤 영역이 있다. 곧 장(場)이다. ▶◀▷◇▼★■●의 요소들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다. 계 안에서 밀도가 증가하면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척력이 작용한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정보가 복제된다.

정보가 복제되면 인플레이션에 의해 정보는 높은 밀도에 가두어진다. 즉 붙잡혀서 통제되는 것이다. 그 정보의 통제가 곧 이치다. 진리요 법칙이다. 정보가 통제되는 공간이 장(場)이다. 외부의 영향이 없는 닫힌계다.

장 안에서 밀도의 미는 힘에 의해 짝짓기 현상이 일어나 △▲ ◇◆ ▽▼ ☆★로 둘씩 대칭과 평형을 이룬다. 가지런해진다. 가지런해진 만큼 밀도가 줄어든다. 이렇게 짝을 찾아 다발을 이루어 교착된 것을 우리는 물질이라 부른다.

양은 짝지어져 운동이 된다. 운동이 다발을 이루어 힘이 된다. 힘은 짝지어져 입자가 된다. 입자가 다발을 이루어 질이 된다. 짝을 지어 더 높은 포지션으로 이동한다. 더 높은 밀도로 압축된다. 더 많은 에너지가 응축된다.

이러한 작용 반작용의 짝짓기 원리에 의해 에너지는 다발을 이루고 양자이론의 핵심이 되는 불연속성이 생겨난다. 물질은 존재가 다섯 단계의 점진적인 짯짓기로 다발을 이루어 밀도가 높은 상태를 유지한 것이다.

밀도가 높으면 깨진다. 긴장이 높아지면 전쟁이 일어난다. 갈등이 높아지면 투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가두어져 있다면 그러한 투쟁이 통제된다. 그러다가 외부에서의 영향에 의해 닫힌계가 해체되면 숨은 에너지가 폭발한다.

양력의 원리

두 남녀가 결혼을 하면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다. 한 채의 집을 두 사람이 공유할 수 있으므로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그 방법이 밀도를 낮추어 상태를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주 탄생의 근본 원리다.

이때 계 안에서 하나가 짝을 지으면 밀도가 낮아져 빈 공간이 생기므로 다른 요소들의 짝짓기가 편해진다. 그러므로 짝짓기 현상은 가속적으로 일어난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현상을 이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짝짓기가 자물통과 열쇠의 역할을 한다. 세상은 다섯 개의 열쇠와 자물쇠로 되어 있다. 다섯 열쇠들 사이에서 순서와 방향, 열고 잠그는 원리, 정보를 집적하고 거기서 에너지를 꺼내는 원리를 해명한 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다섯 단계의 작용 반작용이 성립하는 짝짓기 원리를 해명한다. 수학은 등호 하나로 해결을 보지만 구조론은 낮고 높은 포지션으로 다섯 등호가 있다. 양, 운동, 힘, 입자, 질이 각각 짝짓기의 등호를 이룬다.

도로에 100대의 자동차가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다. 자동차들은 각각 50미터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있다. 이때 자동차의 숫자가 증가할수록 한 대의 자동차에 주어지는 전방의 안전거리가 좁아진다.

이때 자동차들은 일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자동차들이 속도를 내면 차간거리는 늘어난다. 전체적으로 자동차들의 밀도가 낮아진다. 밀도가 낮으므로 더 속도를 낼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가속적으로 전개된다.

시골사람은 느릿느릿 걷는다. 도시 사람은 빠르게 걷는다. 번잡한 도시의 거리에서 행인의 숫자가 많을수록 사람들의 발걸음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즉 인구가 늘면 밀도가 감소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밀도는 높아졌지만 상대밀도는 낮아졌다. 행인들이 속도를 얻을 수록 상대밀도는 저하된다. 더 많은 행인들이 모여든다. 도시 사람들이 빨리 걷는 것은 이유가 있다. 자유도를 확보하려 하기 때문이다.

종이 윗부분을 입으로 불면 종이 윗부분의 공기 흐름이 빨라진다. 공기의 절대밀도는 증가하지만 상대밀도는 낮아진다. 종이 윗부분에 진공이 생기므로 양력을 받아 윗부분으로 말려올라간다. 비행기가 나는 원리다.

날씨가 더워지면 기온이 올라가서 공기가 팽창한다. 이때 공기들은 자유도를 확보하기 위하여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속도가 나면 진공이 만들어진다. 공기 입자들의 상대밀도가 낮아져서 강력한 저기압이 생겨난다.

낮은 포지션에서 밀도가 임계치를 넘으면 높은 포지션으로 이동한다. 양은 속도 속에 숨고, 속도는 힘 속에 숨고, 힘은 입자 속에 숨고, 입자는 질 속에 숨는다. 위로 한 단계씩 포지션이 상승할 때 마다 상대밀도는 낮아진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

양자역학은 전자의 운동방향과 위치를 동시에 확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이는 전자가 파동과 같이 특수한 조건 하에서만 입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불완전한 입자 상태임을 의미한다.

입자이기 위해서는 인력을 가져야 한다. 인력을 가지려면 내부에 척력을 가두어야 하고 척력을 가두려면 중심부가 주변부보다 밀도가 낮아야 하다. 그 조건에서 내부에 척력의 작용 반작용의 대칭이 평형계를 성립시킨다.

전자의 위치를 결정하려면 접촉해야 하고 그것은 밀도를 검사하는 것이다. 어떤 존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곳이 주변부보다 밀도가 높아야 한다. 존재는 곧 밀도차다.

만약 밀도가 완전히 균일하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진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완전히 균일한 반응을 나타낸다는 의미다. 진공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는 기존의 개념은 완전히 틀렸다.

전자는 진행에 의해서만 밀도차를 얻어 입자처럼 행동한다. 관측하기 위해 외부에서 간섭하면 그 간섭에 의해 밀도차를 얻으므로 순간적으로 위치가 확정되면서 진행방향이 바뀐다.

모든 존재는 밀도가 낮은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관측하기 위하여 간섭하는 순간 제대로 된 입자가 발생한 것이다. 관측이 입자를 탄생시켰다. 새로 탄생한 전자의 운동방향은 그 간섭이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전자의 위치와 운동방향의 불확정성은 단지 진행방향을 가질 뿐 확실한 위치를 가지지 못한 불완전한 입자인 전자가 관측의 순간 제대로 된 입자로 탄생하면서 진행방향이 왜곡되는 현상으로 정리될 수 있다.

입자의 위치는 특정한 시점에서의 위치다. 그런데 파동의 경우 진행에 의해서만 밀도차를 얻고 그 진행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특정시점에는 밀도차를 가지지 못한다. 이러한 성질은 파장이 넓을수록 심하다.

매우 넓은 파장을 가진다면 ▷에서 밀도차를 얻어 ◁로 방향이 바꾸는 데 10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면 그 10에 도달하기 전에는 위치를 가지지 못한다. 파장이 좁은 경우는 쉽게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위치를 쉽게 확정할 수 있다.

파장이 넓은 전자파는 ‘10’이라는 시간 동안 ‘10’이라는 거리를 진행해야 밀도차가 유발되고 스핀이 걸려서 ▷와 ◁의 평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진행을 멈추면 평형계가 해체되어 파동은 곧 사라져버린다.

진자운동과 같다. 시계의 진자는 시계추가 한 번 왕복하는 시간과 거리 곧 1초 동안 180도를 움직여야 최고점에서 스핀이 걸려 ▷와 ◁의 평형이 성립한다. 이때 시계추 입자의 존재는 시계추가 방향을 바꾸는 지점에서 잘 관찰된다.

전자는 시계추가 진행하는 것과 같다. 파장이 큰 시계추라면 방향을 바꾸는 양쪽 끝단에서 존재가 잘 관찰되고 파장이 짧은 시계추라면 어디서라도 잘 관찰된다. 파장이 짧으면 관측시점에 그 지점에 시계추가 있을 확률이 높다.

세상은 둘로 되어 있다

‘▷▷’와 ‘▷◁’가 있다. ‘▷▷’는 질서고  ‘▷◁’는 가치다.  ‘▷▷’는 에너지고 ‘▷◁’는 정보다. ‘▷▷’는 둘이 한 방향을 보고 있고 ‘▷◁’는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구조는 ‘▷◁’의 세계다.

우리가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은 모두 ‘▷▷’다. 놀랍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의 절반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머지 절반의 세계에도 눈을 떠야 한다. ‘▷◁’를 알아야 한다.

‘▷▷’는 모을수록 힘이 커진다. 1+1=2가 된다. 우리가 아는 상식의 세계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의 전부일까? 아니다. 참된 것은 ‘▷◁’다. ‘▷◁’는 둘의 밸런스다.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큰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큰 것이 작은 것을 이긴다고 배워왔다. 큰 것이 좋다고 배워왔다. 천만에! 구조는 일치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하늘과 땅, 밤과 낮, 여름과 겨울, 여자와 남자,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모두 ‘▷◁’다. 소통하고 공명하는 것은 모두 ‘▷◁’다. 예쁜 것, 사랑스러운 것, 아름다운 것, 가치있는 것은 모두 ‘▷◁’로 되어 있다.

자유는 ▷◁다. 사랑은 ▷◁다. 진리는 ▷◁다. 존엄은 ▷◁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훌륭한 것은 모두 ▷◁다. 내부에 에너지를 가두고 있는 것이다. 구조론은 ‘▷◁’의 세계를 탐구한다.

● ▷▷ - 큰 것이 작은 것을 이긴다.

● ▷◁ - 완전한 것이 불완전한 것을 이긴다.

‘▷◁’의 의미는 ‘▷▷’가 모을수록 힘이 커지는 것과 달리 둘의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둘 다 함께 쓰러진다는데 있다. 부부 중에 하나가 역할을 잃으면 나머지 한쪽도 쓸모가 없어진다.

젓가락은 왜 젓가락 모양인가?  젓가락 ‘▷’와 손가락 ‘◁’와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젓가락 속에는 손가락에 대한 정보가 숨어 있다. 마찬가지로 숟가락 끝의 타원형 모양은 입술의 모양을 닮고 있다.

컵이 ⊂모양인 이유는 사람의 목구멍이 ⊃모양이기 때문이다. 둘은 마주보고 대칭된다. 컵에는 그 컵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와 그 컵에 담겨지는 물에 대한 정보가 숨어 있다.

모든 관절부분, 모든 힘의 전달부분, 모든 만나고 접촉하고 소통하는 부분에는 ‘▷◁’의 원리가 숨어 있다. 세상은 온통 ‘▷◁’의 사슬이다. 꽃잎 두 장도 ‘▷◁’이고 다리의 두 교각도 ‘▷◁’이다.

‘▷◁’은 마주보고 있다. 마주보아야 이루어진다. 마주보아야 통한다. 사랑이 이루어지고 미(美)가 이루어지고 선(善)이 이루어진다. 구조론은 마주보기다. 마주보며 손 잡고 함께 일어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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