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최종이론이 ‘나온다/안나온다’ ‘된다/안된다’는 식의 선언적인 주장이라면 논할 가치가 없다. 최종이론의 의미와 논의의 맥락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이론이란 무엇인가? 비유하자면 언어의 문법과 같다. 새들의 지저귐이나 광인의 고함소리나 아기의 울음소리나 늑대의 울부짖음에도 문법이 있다. 문법이 없는 언어는 없다. 단지 세련된 문법과 어설픈 문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단순한 문법과 고도화된 문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 어설픈 문법 - 자기감정 표현 반투어처럼 단어인지 문장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문법도 있고 부시맨의 경우처럼 발성과 동작(보디랭귀지)이 뒤섞여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귀로 듣기만 해서는 의미를 알 수 없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봐야 이해가 된다. 문법은 진화하는 것이며 미학적 완성도의 수준에 따라 최종적인 문법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문에는 반드시 이론이 있으며 최종이론도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이론(理論, theory) 사물에 관한 지식을 논리적인 연관에 의하여 하나의 체계로 이루어 놓은 것. 따라서 학문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론이 있다.(하략)’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학문이라면 반드시 이론이 있다’는 전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론이 없는 학문은 없다. 왜인가? 이론이 없으면 그 학문에 다른 사람이 연구실적을 보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나 교주 혼자서 뚝딱 만들어 낼 수 있지만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기존의 학문에 보태어 가지를 치게 하려면 이론이 있어야 한다. 뒤에온 사람이 앞서간 사람의 성과에 추가하여 연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체계다. 즉 이론은 체계를 위한 이론인 것이다. 학문은 공동작업이므로 체계가 있어야 하고 체계가 있어야 하므로 이론이 있어야 한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언어는 공용이다. 자기 혼자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듣고 말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문법이 없다면 전파되지 않는다. 소통하지 못한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이다. 언어는 무한정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단계에서 진화를 멈춘다. 한국어의 문법은 이미 언어의 최종적인 진화단계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서 일사이클의 주기를 완결시킨다. 동물 역시 생로병사의 한살이를 가진다. 완결된다. 언어는 의사소통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도달할 때 언어의 진화는 끝난다. 마찬가지다. 최종이론이 필요한 이유는 기존의 학문이 소통의 단계까지 도달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체계가 부실한 것이다. 종교와 정치와 경제와 과학과 문화가 제각기 따로 노는데서 최종이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결론적으로 완전한 이론은 완전한 체계, 완전한 시스템이며 완전한 시스템은 선구자가 와서 이룩해놓은 베이스 위에 후학들이 얼마든지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시스템구조의 완성인 것이다. 뉴튼이 고전역학을 이룩했을 때 이는 단순히 하나의 개별적인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다른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보태어 심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동양에는 이것이 없었다. 뉴튼의 역학은 정치에도 경제에도 문화에도 두루 적용된다. 뉴튼은 하나의 비례식을 만들었다. 어떤 학문이든 그 학문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비례식이 숨어 있다. 그것이 없는 학문은 없다. 뉴튼에 의해 인류는 통합적인 시야로 세상을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연금술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뉴튼이 최종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인시타인이 뉴튼을 깨버렸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계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성리학의 주희가 형이상학을 열어 형이하학의 정통 유교를 깨버렸다고 볼 수 있지만 반면 계승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성리학은 유교가 아니라 이단이라는 설이 있었다.) 즉 뉴튼이 이미 일차적인 의미에서 최종이론을 완성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점차 발전하고 인지가 개발되어 뉴튼의 수준에서는 문제되지 않았던 복잡한 현안이 대두됨에 따라 한차원 높은 수준의 재통합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지금 서양의 철학과 동양의 사상은 접점이 없다. 완전히 별개의 시스템에 의해 별도로 작동한다. 이것이 이론의 한계이다.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뉴튼이 크고 느린 세계를 규명했다면 아인시타인은 크고 빠른 세계를 분석하고 있다. 양자역학이 작고 느린 세계를 연구하고 있다면 양자전기역학은 작고 빠른 세계다. 이처럼 서로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포메이션 안에서 포지션들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맞물려 있는 한 벌에서 한 짝이 결정되면 다른 짝도 이에 연동되어 자동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구조론이다. 마찬가지로 맞물려 있는 기존 이론들의 포지션들을 분석하여 새로운 이론의 포메이션을 찾아낼 수 있다. ● 뉴튼 - 크고 느린 세계 이렇게 포지션이 정립되면 다음 포지션은 어디쯤일지 추론할 수 있다.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김이 없다. 이러한 맞물림의 구조는 무한정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포메이션 안에서 정해져 있는 자기 포지션을 하나씩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턴분석을 적용하면 뉴튼과 아인시타인의 상호관계를 보고 양자역학과 양자전기역학의 상호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양자전기역학은 양자역학에 상대성이론을 적용하여 놓은 것이다. 뉴튼에서 아인시타인으로의 전개에서 양자역학에서 양자전기역학으로의 전개를 자동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패턴을 적용할 때 최종이론의 위치 또한 분명해진다. 원시인들은 명사만으로 의사소통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기들은 엄마 찌찌 맘마 응가 쉬야 등 명사만을 발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사만으로는 충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당연히 동사가 따른다. 명사와 동사가 결합하여 주어와 술어, 체언과 용언의 구조로 문장이 만들어진다. 명사를 발음할 때 동사가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허기를 느끼는 것이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 욕구불만이 있다. 왜인가? 둘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맞물려 쌍의 한 짝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아서 채워넣으려는 본능의 끌림이 작동하는 것이다. 뉴튼과 아인시타인이 느린세계와 빠른세계로 맞물리듯 뉴튼-아인시타인 대 양자-양자전기역학도 큰 세계와 작은 세계로 맞물린다. ● 1과 2의 맞물림 천칭저울은 두 접시가 맞물려 있다. 수평의 두 접시의 맞물림에 연동되어 수평의 두 팔도 맞물려 있다. 두 팔에서 두 접시로 가는 수직적인 맞물림에서 천칭저울의 중심추가 찾아진다. 두 개의 수평적인 맞물림이 하나의 수직적인 맞물림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구조론이다. 그렇다면 양자전기역학 다음에는 무엇이 와야 하는지가 자명해진다. ● 양과 운동의 맞물림 물질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단위가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 이는 건물의 구조에서 두 개의 수평으로 가로지른 보가 그 맞물림으로 하여 하나의 수직으로 곧추 선 기둥과의 맞물림을 끌어내는 것과 같다. 나라마다 품사가 다르지만 주어와 술어, 체언과 용언의 기본구조는 다르지 않다. 단어들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어는 독립적으로 의미를 완결시키지 않는다. 뒤에 어떤 용언이 따르는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단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의 맞물림이 의미를 2차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도와 대응의 구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의미는 단어 자체에 고유하게 내재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유도되는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다. 일상적인 생활의 소소한 불편함을 느끼는 데서 발명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느끼는 데서 완전한 이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둘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종이론을 논한다는 것은 지금 무엇이 불편한가를 논하는 것이다. 어디가 불편한가?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조사가 없고 전치사가 없다. 관절이 없고 소통이 없고 연결이 없고 사이가 없고 링크가 없고 닫힌계가 없다. 필요가 드러났으니 이론 또한 드러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