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여 주인이 되어라
영화 '몽상가들'은 프랑스 68혁명을 그리고 있다. 당시 파리의 젊은이들은 영화라는 움직이는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세상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스스로 몽상가가 되기를 자처했으나 1968년 봄 그들이 탐닉했던 세계는 스크린을 뚫고 현실이 됐다.
젊은이들은
성과 인종과 국경을 넘어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 소통했고, 그러한 방식으로 2차 대전 이후 급속도로 보수화된 기성세대와
대립전선을 긋고 있었다. 기성세대들은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차에 랑글루아를 본보기 삼아 해임했다. 앙리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 원장으로 가치관이나 이념의 검열없이 모든 영화를 보여주려 했던 사람이다. 청년들이 거리로 나오자 기성세대는
몽둥이로 젊은이들을 제압하려 들었다. 파리에서 시작한 시위는 냉전과 베트남전 등의 시대적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 해 미국, 독일,
체코, 스페인, 일본 등 세계의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들끓게 했다. '금지함을 금지하라'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
'혁명을 생각할 때 섹스가 떠오른다'와 같은 구호에서 보이듯 성차별, 인종차별, 권위주의와 같은 기존 정치체제와 도덕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
우리는 최근 알맹이가 빠져버린 냉전이념의 어색함, 급속도로 성장한 자본주의가 만든 계층의
위화감, 도농, 세대, 그리고 교육수준의 갈등이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만들어낸 극도의 혼란과 무기력증을
앓아왔다. 그러한 무기력은 확신에 찼던 과거 개발세대의 향수를 자극했고, 두 차례의 보수정권을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도 박근혜
정권은 가장 극단적으로 기성세대의 표상이 됐으며, 젊은 세대와 대립각은 갈수록 첨예해졌다.
박근혜는 여러모로 독특한
인물이다. 그녀는 마치 갈라파고스와 같이 유신 독재시대의 환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200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1970년대
피와 땀이 난무하던 현실에서 동떨어져 독재권력으로 세탁된 무균상태로 유년을 보냈다. 청년기마저 종교적 도그마로 유폐됐으며, 이후
정치에 몸담고는 독재시절 향수에 도취된 기성세대의 맹신적인 환호에 다시 갇히고 말았다.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압축해서 가지고
있는 박근혜는 진정 우리가 폐기해야 할 시대의 표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지난 시대, 타협과 굴욕과 비인간적 시대의
표상이고, 그러한 표상을 통해 우리가 청산해야 할 과거를 분명하게 각인할 수 있었다.
우리의 상황은 긴박했다.
일류국가로 도약하거나 휘청거리다가 2류 3류 국가로 남느냐하는 줄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형적으로 세계 초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완성차를 만드는 5번째 대국이며, 반도체 생산 1위 등 많은 분야에서 초일류 그룹에 끼이게 됐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환경, 즉 권위적 정치문화와 기업문화, 경제 시스템,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자존감을
버리고 먹을 것을 구하던 예전 세대의 마음으로는 결코 그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끊임없이 눈치보고 스스로 옳아매는
어른들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젊은 세대에게 칼을 씌우기 십상이다.
도저히 대화가 불가능한 보수적 기성세대를 조롱하며
맞선 68혁명 세대가 거리로 나와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외쳤듯이 우리도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촛불의 열기가 광장에서 6개월이나
타올랐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변방의 성공을 보여줬으며, 2017년 광장의 촛불과 문재인 정부는 그 성공을 이어받아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혀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가진다. 젊은이들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소비하면서 그들의 시대를 만들어간다.
그것이 자신들만의 권력을 구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이 세계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시대의 주인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 몽상가들이 주인이 될 시대가 도래했으니 온갖 과거의 프레임을 떨치고
일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