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와 홍준표의 딜레마 ‘샤이 트럼프’가 있었듯이 ‘샤이 홍준표’도 있을 터이다. 홍준표를 지지한다고 어디 가서 말을 할 수가 없다. 쪽팔려서다. 아니 정확히는 홍준표를 지지하지 않는다.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물으면 안철수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게 사실일 수 있다. 그래놓고 막상 투표장 가면 홍준표 찍는다. 왜? 선거가 반드시 지지자를 고르는 인물 콘테스트는 아니다. 세력≫인물≫정책이다. 안철수 지지한다고 안철수 찍을 이유는 없다. 예컨대 이런 거다. 내가 내자식 욕하는데 누가 거든다. “준표가 내 자식이지만 정말 나빠!” “그래! 준표 걔는 정말 나쁜 사람이야.“ 이러면 화난다. 내가 내 자식 욕하는건 괜찮은데 남이 내자식 욕하면 곤란하다. TK도 더는 박근혜 지지하지 않지만 남이 박근혜 비난하면 열받는 거다. 홍준표 싫지만 작금의 정국구도에 실망하여 오기로 홍준표 찍는 사람 분명히 있다. 이런 식의 정치공학에 기댄 투표는 반드시 뒷탈을 일으킨다. TK가 지지하지 않으면서 홍준표 찍어도 문제지만, 세력화 되어 있지 않으면서 안철수를 찍어도 문제가 된다. 역시 세력≫인물≫정책이다. 누구를 지지한다고 해서 곧 찍어주면 곤란하다. 왜? AS 때문이다. 유권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찍어야 하며 찍고, 난 다음에 애프터서비스를 해줘야 한다. 찍어놓고 바로 등돌리는 나쁜 투표가 문제다. 경상도에서 나오는 안철수 표는 투표장 나오면서 바로 등돌리는 표다. 욕하려고 찍는 표다.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려는 표다. 바로 지지철회하여 촛불 만난 이명박 된다. 남의 힘으로 당선되면 댓가를 지불하게 된다. 어부지리는 곤란하다. 지지자의 배신으로 혼란이 계속된다. 그런 혼란을 즐기는 자들이 이명박근혜를 찍었다. 이명박근혜 지지하지 않으면서 ‘어쩌나 보자’ 하고 호기심으로 찍은 사람 제법 된다. 나쁜 후보도 문제지만 나쁜 유권자도 문제다. 정답을 말하자. 세력≫인물≫정책이다. 인물을 지지한다고 찍을게 아니라 세력화되어 있는 사람을 찍어야 한다. 그래서 정당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 찍어주면 끝이 아니라 찍어준 다음에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권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후보를 찍고 그 정당에 압력을 넣어서 당선자를 통제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당선자에게 계속 지지를 몰아줘야 한다. 내 손으로 찍은 당선자를 내가 지켜줘야 한다. 당선자가 삐딱선을 못 타도록 통제도 해줘야 한다. 내가 찍은 대통령을 끝까지 책임져야 옳은 유권자다. 그런데 무리다. 경상도 사람이 안철수를 찍을 수는 있지만 통제할 수는 없다. 박지원이 뒤에 있는데 안철수가 경상도유권자 말을 들을 리가 없잖은가 말이다. 이때 통제권을 얻기 위해 난폭한 행동을 한다. 노무현을 찍어놓고 바로 등돌린 사람들 많다. 노무현을 자기 입맛대로 주무르기 위해서였다. 오죽하면 노무현당선을 축하하는 논객모임에 가서 필자가 ‘최후의 만찬’이라고 선언했겠는가? 광화문 어딘가 중국음식점이었다. 그 자리에 이인영도 있었고 천호선도 있었다. 노무현 당선을 진심으로 반긴 논객은 거기에 한 명도 없더라. 얼마후 변희재가 노무현이 관리하는 논객모임이 있다고 폭로했지만 사실은 첫 번째 모임이 최후의 모임 된 것이다. 그들은 온갖 악랄한 조건을 내걸어 노무현을 핍박했다. 비겁한 한겨레, 경향, 오마이들 말이다. 그들이 배신자다. 유권자가 먼저 배신했다. 정치인만 배신하는게 아니다. 대중이 더 배신을 잘한다. 특히 '국민' 어쩌구 하는 정치인은 배신이 공약이다. 왜 국민팔이 할까? 국민여론이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당명에 '국민' 박아놓으면 언제든지 배신해도 된다. 왜? 국민여론이 변하니까 맞춰간다고 하면 되잖아. 당명부터 배신당임을 알 수 있다. 경상도에서 나오는 안철수표는 투표용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배신할 표다. 경상도는 홍준표 찍어놓고 포기하든가, 안철수 찍어놓고 욕하든가다. 어느 쪽이든 배신이다. 비극은 예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패권세력을 형성해야 민주주의다. 패권은 간단히 말해서 문재인 찍어주고 애프터서비스까지 할 사람들을 말한다. 문재인이 잘못하면 공론을 일으켜 바로잡고, 문재인이 어려우면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줄 사람들이다. 그게 되어야 민주주의가 작동한다. TK 일부는 지지하지 않으면서 오기로 홍준표 찍고, 일부는 안철수를 지지하고 안철수에게 투표하지만 AS가 안 되어 결국 배신한다. 그런 유권자를 나무랄 필요는 없다. 정당정치가 발전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당이라는게 기관지도 없고, 그 정당이 운영하는 방송국도 없고, 그 정당이 운영하는 팟캐스트도 없고, 여론수렴 방법이 없는데 배신하지 않고 어쩔 것인가? 배신은 사람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구조문제다. 시스템의 문제다. 패권세력이 SNS로 중심잡지 않으면 답이 없다. 노무현 찍어놓고 노무현 지지하면서도 입만 열면 노무현 욕하는 사람 많이 봤다. 그들은 대북송금이니, 이라크파병이니, 미국에서의 친미발언을 들먹이지만 거짓말이다. 이유는 세력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무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데 행사할 방법이 없어서 구조론의 마이너스에 따라 NO를 구사하는 것이다. YES는 기술적으로 어렵다. 남자가 고백한다. 여자는 NO를 한다. YES를 하려면 호응해야 하는데 호응하려면 호응방법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이런 거다. ‘포장마차를 하자.’ ‘그래 넌 리어카를 구해와. 나는 상품을 구해올게.’ 이렇게 역할분담이 되어야 호응이 된다. 구조론의 정답은 호응이다. 호응하려면 토대의 공유라는 상부구조를 작동시켜야 한다. 그것이 쉽지가 않다. ‘포장마차를 하자.’ ‘NO.’ 이건 가능하다. ‘포장마차를 하자.’ ‘YES.’ 이건 불가능하다. ‘YES 다음에 추가로 호응할 내용이 따라붙어야 한다. 고백하려거든 마음의 대비를 하도록 미리 힌트를 줘야 한다. 노무현을 통제할 방법이 없으니 노무현을 지지하지만 그래서 노무현을 찍었지만 바로 등돌린다. 그게 보통 소인배 행동이다. 대부분 그렇게 망가진다. 투표는 YES다. YES는 결코 YES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조치가 따라붙어야 한다. 기승전결로 계속 가야 한다. 버스가 도착했다. ‘NO.’는 쉽다. 그 버스를 타지 않으면 된다. YES는 어렵다. 그 버스에 올라타야 한다. 그리고 버스는 출발한다. 달리는 버스에서 중간에 내리지 못한다.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YES 하기 전에 많이 생각해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안철수 버스를 타버렸다면? 혼란이 계속되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이명박근혜 버스를 타버린 경상도 YES맨들 때문에 나라가 이모양 이꼴 되었다. 먼저 '패권세력'이라는 핸들을 조직한 다음에 버스를 타더라도 타야 한다. 여차하면 자신이 핸들잡을 각오를 하고 투표장 가기다. 우리는 문재인 찍고 문재인 지키고 문재인 AS까지 다 한다.
한국이 이모양 이꼴인 것은 정치인과 대중의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판이 그들만의 리그가 된 거죠. 한겨레, 경향, 오마이도 예외가 아닙니다. 노무현이 처음으로 시민세력을 정치에 끌어들였습니다만, 그 시민세력은 지도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와해되었고 열린우리당의 '열림'은 시민이 들어오도록 열어두는 문이었습니다만, 시민은 진입하지 못했고 열린우리당은 정동영쿠데타 이래 궁물당으로 퇴행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SNS가 그 역할을 합니다. 팟캐스트가 한경오를 제압하고 정치권과 대중을 잇는 고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조적인 해결책입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오늘도 여기서 배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