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이 = 철이 들지 않았다. 자아가 없거나 동물적 본능 수준의 미성숙한 것이다. personality는 대개 환경에 지배된다. 모든 가치판단을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만 판단한다. 예컨대.. 좋은 것은? 맛있는 것이다.(이는 생물학적 본능) 또 좋은 것은? 칭찬받는 것이다.(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판단) 위험이 닥치면? 울어버리면 된다.(의존적인 태도.) 이 단계는 자아가 미성숙하다. 여기서 ‘맛’이든 ‘타인의 칭찬’이든 ‘울어버리는 방법’이든 주체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다. 즉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바깥에서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맛의 미각 역시 타자의 일부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열살 어린이가 조립식 장난감을 기어코 완성시키려는 태도는 비교적 자아가 성숙한 것이다. 좋은 것은 타인에게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결정한 목표를 달성하고 그 즈음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본다면 자아가 성숙하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2) 어른 = 철이 들었다.(물론 신의 관점으로 보는 즉 제대로 철 든 인간은 세상에 거의 없겠지만 후하게 쳐서 철이 든걸로 쳐주자고.) 일관성 있는 의미판단의 척도가 존재한다. 이때 personality는 환경에서 독립하여 주체적으로 결정하며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자기다움’이다. 그것이 자신의 의미와 가치로 된다. 남들이 쳐주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답다’고 판단한 것을 원하게 된다. 자기완성의 관점에서 그 완성상에 근접한 역할모델이 자신의 personality가 된다. 각자가 자기 완성에 대한 모델을 가지며 가치판단은 그 모델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결정된다. 환경에 지배되지 않고 도리어 환경을 극복하려 한다. 가치판단은 환경(사회)과의 관계 혹은 엄마와의 관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환격에 대척점을 세우고 도리어 환경을 극복하려 하며, 자신의 독립적인 영역을 침해하는 엄마(혹은 가족)으로부터 도리어 독립하려고 한다. 세상에서 먹어준다는 평판이나 명성, 인기 따위와 무관하게 완전히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그 방법으로 세상이라는 큰 집을 지어가는 즉 인류의 문명사에 벽돌 하나를 더하고 가는 것이다. 3) 깨달음 = 신의 personality가 곧 나의 personality로 된다. 이 단계에서는 독립이 아니라 ‘연동’시키려 한다. 즉 진리와 나를 연동시켜 함께 공명하는 것이다. 타인을 배척하는 방법으로, 또 독립을 주장하고 과시하는 방법을 나를 드러내어 나 다우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다운 것으로 곧 나다운 것을 삼는다. 누군가에게 시비를 거는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창의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 논의가 혼선을 빚는 이유는 1)에서 2)로 가는 부분과, 2)에서 3)으로 가는 부분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구분할 수 있는 새로운 어휘를 누군가가 만들어서 전파해야 한다. 이는 논리학 혹은 언어학의 문제이다. 1)에서 2)로 가는 과정은 독립적인 자기 영역을 구축해 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싸우려고 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들은 싸움을 통해서만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주체대국을 자랑하는(?) 북한은 미국에 시비를 거는 형태로만 민족의 주체성을 주장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3)에 도달했다 해서 그 이전의 1), 2) 단계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그것이 중요한 문제인가 혹은 사소한 문제인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깨달은 이가 세상과의 싸움걸기를 포기한대서는 잘못된 일이다. 높은 단계는 낮은 단계를 포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과 사가 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도리어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사생활에서도 ‘어른’처럼 혹은 ‘성인’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더 이상한 일이다. 모든 어른에게는 어린이가 숨어 있다. 다만 중요한 일에서 그 어린이의 치기를 나타나지 않게 하는 능력이 문제로 된다. 사생활에서 까지 어른인척, 성인인척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정리하면 - 자아1, 자아2, 자아3의 단계가 있다. - 3 속에는 2가 있고 2 속에는 1이 감추어져 있다. - 1이나 2 수준에서 머무르는 사람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 프로이드, 라깡류의 환경결정론은 바보들에게나 해당되는 즉 허튼소리다. - 어느 지점에서 맞서느냐인 즉 어른은 부분과 전체에 두루 맞설 수 있지만 어린이는 부분에만 맞설 수 있다. - 아제님의 글에서 무심론이나 신비님의 글에서 ‘자아가 없다’는 말은 같은 맥락인 바, 무(無), 비(非), 공(空), 불(不), 멸(滅), 허(虛)를 남용하는 것은 의미론과 존재론에서 실패하고 있기 때문인즉 언어학적 실패다. 무(無) 곱하기 무(無)는 유(有)가 되므로 혼선을 빚는 즉, 부정어법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즉 자아가 없다, 마음이 없다(무심,無心) 등 ‘없다’로만 표현하면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도리가 없다.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세계와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만나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손에 쥔 짐을 내려놓아야만 악수할 수 있듯이 말이다. 비운다거나 만난다거나 같은 맥락이다. 비워야지만 더 높은 단계에서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운다 보다 만난다가 더 의사소통에는 낫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보다 ‘인간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 낫다. 입자 알갱이가 없다 -> 관계망이 있다. 숙명은 없다. -> 인연은 있다. 집착이 없다 -> 사랑이 있다. 마음을 비운다 -> 더 큰 세계를 만난다. 같은 말이지만 부정어법인가 긍정어법인가이다. 그냥 없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역사가 있고, 문명이 있고, 소통이 있고, 진리가 있고, 사랑이 있고, 만남이 있고, 동반이 있고, 미학이 있고 신과의 대화가 있다고 말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옛날에는 귀신 때문에 전염병이 돈다고 믿었다. ‘귀신이 없다’고 백번 말해봤자 사람들은 도무지 믿지 않는다. 파스퇴르가 나서서 ‘세균이 있다’고 말해줬더니 그제 사람들은 마녀사냥을 그만두었다. ‘없다’고만 말하지 말고 그 없는 것의 빈자리를 메울 ‘있다’를 말해줘야 한다. 무언가가 없다는 것은 그 차원에서 없다는 말이고, 이는 더 높은 차원에서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비해 ‘사랑’이라는 단어나 ‘재현’이라는 단어나 ‘미학’이라는 단어나 ‘완전성’이라는 단어의 사용빈도를 늘리기로 한 것은 인간들은 ‘없다’고 백날 말해줘 봤자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대 희랍인-비의 신이 있어서 기우제를 받아먹으면 비를 내려준다. 과학자 1-조사해 봤는데 비의 신은 없더라.(사람들은 절대로 수긍하지 않는다.) 과학자 2-수증기가 있는데 그것이 응결되어 비를 내린다.(아하 그렇구나. 뭔가가 있다고 말해줘야지만 사람들은 비로소 수긍한다.)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어사전에 없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야 한다. 셈해 봤는데 대략 300개 이상의 신조어가 필요하다. 그렇게 많은 개념들을 무더기로 만들어 내면 책은 더 두꺼워지고 독자들은 더 피곤해 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신조어를 내멋대로 만들어 전파해 봤자 인간들이 내 말의 권위를 인정할 리가 없으므로 당분간은 신, 진리, 재현, 사랑, 완전, 미학, 깨달음, 관계망, 소통, 역사, 문명, 만남, 동반, 밸런스, 패턴, 이런 익숙한 말을 빌어 사용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신, 진리, 재현, 사랑, 완전, 미학, 깨달음, 관계망, 소통, 역사, 문명, 만남, 동반, 밸런스, 패턴, 이런 말을 쓰는 것은 물론 부정어법의 한계를 절감하고 의도적으로 긍정어법을 쓰는 것이다. 작심하고 쓰는 것이다. 세간에 유행한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실존주의니 하는 흐름들도 여전히 부정어법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귀신이 없다가 아니라 세균이 있다로 나아가줘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들이 접수할 수 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