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물질 우리는 흔히 정신 과 물질 의 이분법에 의존한다. 틀렸다. 물질의 맞은 편에 정신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아니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정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순수하게 의미 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둘이다. 의미 로 볼 것인가 물질 로 볼 것인가이다. 의미로 본다는 것은 신의 완전성 으로부터 연역하여 불변의 가치를 도출하고, 그가치를 사물에 반영하는 방법으로 의미를 배달받아 개별적인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신의 완전성이 내 안에 반영된 것이다. 무엇인가? 우리는 감정이나 심리상태를 정신으로 오해하고 있다. 마음을 들여다 본다는 것이 정신, 감정, 심리, 욕망을 들여다 보는 것이어서 안 된다. 이심전심이 이쪽의 감정에서 저쪽의 감정으로의 전달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열명이 모인 집단에서 한 사람이 흥분하면 다른 사람도 덩달아 흥분하는 것이 이심전심이 아니다. 그건 아니다. 그건 오해다. 그건 틀렸다. 그건 착각이다. 오직 둘이 있다. 보는 눈이 있고 보여지는 물질이 있다. 물질로 본다는 것은 어떻게든 뒤집어 보는 것이다. 거울에 비치듯 거꾸로 보는 것이다. 귀납하여 보는 것이다. 보여지는 물질을 보아서 안 된다. 이건 틀린 거다. 물질이 아니면? 의미다. 의미로 본다는 것은 보는 눈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망막에 비친 색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바라봄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곧 가치로 보는 것이며 신의 완전성으로 보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후렛쉬로 길을 찾는다. 후렛쉬의 불빛으로 보는 것이지 그 비쳐진 바 스크린의 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의미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눈의 망막이라는 스크린에 비쳐진 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후렛쉬의 불빛 그 자체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의미는 마음에 깃들어 있지만, 마음에는 의미가 없다. 의미는 마음에 깃들 뿐 마음에 붙잡히지 않는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후렛쉬의 불빛은 사물에 붙잡히지 않는다. 불빛은 사물에 붙잡혀 머물러 있지 않는다. 정신, 감정, 욕망, 심리, 부끄러움과 어색함, 본능을 마음으로 오해해서 안 된다. 그건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거울에 비친 상일 뿐 불빛 그 자체가 아니다. 진실로 말하면 정신은 마음이 아니다. 감정도 역시 마음이 아니다. 욕망도 마음이 아니다. 심리도 마음이 아니다. 부끄러움도 마음이 아니다. 의미다. 오직 의미로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이다. 가치의 빛으로 마음이라는 어둠 속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신의 완전성으로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이다. 신의 완전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마음을 들여다 본들 거기에 욕망의 오염이 비칠 뿐이다. 그건 가짜다. 마음이 마음이 아니고 정신이 정신이 아니다. 존재는 관찰되는 것이고 의미는 설계되는 것이다. 보여지는 사물로 바라보지 말고 보는 눈으로 바라보라. 보여지는 색깔로 바라보지 말고 그려내는 연필로 바라보라. 보여지는 형상으로 바라보지 말고 설계하는 자와 컴퍼스로 바라보라. 어원으로 보면 ‘보다’는 ‘비치다’에서 온 말이다. ‘바라보다’의 ‘바라’는 뻗다, 비추다의 의미다. 즉 떨어져 있는 둘을 뻗어서 하나로 이어 보는 것이다. 즉 연결하여 보는 것이다. 비추어진 칼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네게로 뻗어서 연결하여 서로 다른 둘을 하나로 이어내는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