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read 3573 vote 0 2008.12.30 (23:08:26)

●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있나요?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왜 공평하지 않은 거죠?

소말리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영양실로에 죽어가고 있잖아요.

그 아이들도 우리와 똑같은 생명을 가진 인간인데

왜 이들은 아무 죄도 없이 죽어야 하나요?

왜 쓰나미가 일어나도 꼭 파키스탄이나 인도 같은 데서 일어나지요?

이것도 다 신이 계획하신 일인가요?

아니면 운명 따위는 의지박약자들을 위한 사탕발림이고

우리는 즉자존재(?)인가요?

신은 있어.

그치만 우리는 신을 오해하고 있는 거야.

신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해.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이거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못하는 신이 왜 필요하냐구?

그래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거야.

우리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를 떠넘기기 위한 신은 없어.

그치만 신은 실제로 있어.

신은 다만 본보기가 되는 하나의 모델로 존재하는 거야.

그 모델을 닮고자 하는 이에게만 신은 응답하는 거지.

태양이 다만 스스로 빛날 뿐

세상의 모든 일에 개입하지 않듯이 말이야.

신은 완전성의 표상이야.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신과 대화할 수 밖에 없어.

완전한 그림, 완전한 조각,

완전한 건축, 완전한 소설,

완전한 음악, 완전한 연주!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신과 만나고 신과 대화하게 되어 있어.

네 말대로 신은 공평하지 않아.

왜냐구?

신은 인간의 일에 되도록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지.

무엇이 공평인지를 생각해야 해.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이 세상에 공평은 없어.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나쁜 사람에게 벌을 주는건 공평이 아니야.

왜냐구?

착한 사람은 머리가 좋고 나쁜 사람은 머리가 나쁜데

누구는 머리가 좋고 누구는 머리가 나쁜 그 자체로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지.

누구는 잘 생기고 누구는 못생기고 그 자체로 공평하지 않아.

나쁜 사람에게 벌을 주는건 결코 공평한게 아니야.

공부 못하는 사람은 선생님께 혼 나고

공부 잘 하는 사람은 칭찬 받는건 공평하지 않아.

그건 선생님이 정한 게임의 규칙일 뿐이야.

왜냐하면 한 사람 몫의 인간 역할을 하는건 공부와 무관하거든.

상과 벌로 다스리는건 선생님의 얄팍한 편의주의에 불과할 수도 있어.

상과 벌이 남용되면 오히려 인간을 다치게 돼.

만약 완전히 공평하게 하려면

지구 상의 모든 인간은 같은 날 태어나야 해.

100년 전에 태어난 사람은 억울하잖어.

그 분들은 텔레비전 구경도 못했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전부 남자이거나 여자라야 해.

여자와 남자는 이미 공평하지 않거든.

모든 사람이 얼굴 생김새가 같아야 해.

잘생기고 못생긴 것이 이미 공평하지 않잖아.

즉 완전한 공평을 위해서는 지구에 단 한 명만이 존재해야 하는 거야.

두 명이 존재하면 이미 공평하지 않아.

소말리아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간다구?

1000년 전에 태어난 사람들도 영양실조에 죽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과거와 미래는 비교대상이 아닌 걸까?

왜 죽음이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왜 삶이 죽음 보다 나은 거라고 생각하지?

영양실조에 죽어가는건 나쁜 거라는 판단은 누가 내린 거야?

신의 관점에서 보면 오직 완전과 불완전이 있을 뿐이야.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지.

그러므로 공평한 거야.

인간의 척도가 아닌 신의 척도로 보면 말이야.

신은 완전의 표상이므로

완전한 것으로만 신과 소통할 수 있어.

각자의 위치에서 작은 완전성들을 찾아내지 않으면

어떤 경우에도 비참을 극복할 수 없어.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해도

성실하게 십일조를 바쳐도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넉넉한 칭찬을 들어도

인생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잘 살아도

완전을 구하지 않으면 신에게서 멀어지고 말아.

언제든 어느 때든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지금 이 순간의 작은 완전을 구할 수 있어야 해.

내일의 완전을 위해 오늘의 완전을 희생시켜서 안 돼.

집단의 완전을 위해 개인의 완전을 희생시켜서 안 돼.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해.

부유한건 좋은 거고 가난한건 나쁜 거라는 편견을 버려.

건강은 좋은 거고 아픔은 나쁜 거라는 편견을 버려.

신의 관점에서 보면 오직 완전과 불완전이 있을 뿐이야.

죽음, 아픔, 가난이 불완전에 가까울 때가 많은건 사실이야.

그러므로 되도록 죽음과 아픔 그리고 가난을 극복하려 노력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거창한 목표들을 위해서

오늘 이 순간의 작은 완전성들을 희생시키곤 하지.

그건 옳지 않아.

영웅들은 죽음을 두려워 않고 도전한 사람들이야.

그들은 죽었지만 스스로 완전해 졌기에 신과 만날 수 있었지.

단 하루를 살아도 완전을 본 사람은 참다운 삶을 얻은 사람이야.

천년을 행복하게 잘 살아도

완전을 보지 못했다면 벌레의 삶과 다를 바 없어.

참된 완전을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죽음도 아픔도 가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해.

왜 쓰나미가 인도나 파키스탄에서 일어나느냐구?

잘 사는 일본에서도 지진은 늘 일어나지.

미국도 허리케인에 시달리고 있고

북유럽의 겨울은 끔찍하게 길어서 노르웨이나 핀란드 따위에는

마의 2월을 넘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

긴 겨울이 우울증을 만들거든.

인도나 파키스탄은 따뜻한 나라야.

적어도 얼어죽을 일이 없잖어.

인류는 오랫동안 따뜻한 아프리카에서 살았어.

그곳엔 추위도 없고 굶주림도 없어서

겨우 천명의 인류가 근근이 살아남을 수 있었지.

아프리카 100만년 인류의 삶들 중에서

전체 개체수가 1000개체 이상이었던 때는 길지 않았어.

인류가 아프리카의 좋은 곳에 계속 머물렀다면

인류는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 거야.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날 때

사하라 사막과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질러야 했어.

사막의 밤은 춥지.

사막에서 추위로 얼어죽는다구.

그때 인류는 아프리카 사람처럼 추위에 강하지 못했을걸.

99프로가 그 사막에서 죽고

추위에 강한 극소수가 죽음의 사막을 건너 유럽과 아시아로 이동한 거야.

추워서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말야.

인도나 파키스탄은 그래도 사람이 살만한 곳이야.

적어도 추위가 없고 먹을 것이 있다구.

인류는 먹을 것도 없고 춥기만 한 곳으로 이동해 온 거야.

절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죽음의 땅으로.

거기서 문명을 꽃피운 거지.

그건 인류의 위대한 도전이야.

신이 파키스탄이나 인도를 벌할 계획을 세운건 아냐.

한국에선 매년 1만명이 교통사로로 사망하고 수십만명이 부상당해.

10년이면 10만명이 교통사고로 죽고 100만명이 병원신세를 져.

거기에 비하면 인도나 피카스탄의 쓰나미는 양호한 거야.

운명은 분명 존재해.

그러나 운명이 너의 삶을 억압하지는 않아.

운명 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인간은 환경에 지배되는 운명적인 존재에서

즉자적인 존재로 나아가지만

거기서 다시 대자적인 존재로 발전하는 존재인거야.

운명적 존재는 환경에 지배되는 나이고

즉자적 존재는 환경과의 교섭을 끊은 나이고

대자적 존재는 환경과의 교감에 의해 한 차원 더 확대된 나야.

인간은 환경에 지배되는 수동적이고 운명적인 존재에서

환경의 억압을 끊고 독립적이고 즉자적인 나로 발전해야 하지만

다시 환경을 지배하고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대자적인 나로 성숙해져야 해.

그리고 거기서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야지만

비로소 신과 소통할 수 있어.

신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운명적 존재이든

즉자적 존재이든

대자적 존재이든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강해져야 해.

그러므로 독립해야 해.

그러나 그 독립이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어서는 안돼.

다시 돌아와서 세상과 교섭해야 해.

비로소 환경을 극복해야지.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도 안돼.

그것을 완성시키고 난 다음에 신을 만나야 해.

신은 네가 그 수준에 도달할 때 까지

함부로 너의 내밀어진 손을 잡아주지 않아.

그러나 말야.

네가 작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완성한다면

네가 신의 비전을 바라본다면

네가 신의 완전성 안에서 너의 완전성을 설계한다면

언제든지 너의 내밀어진 손을

신이 잡아주는 모습을 목격하게 될 거야.

몰라.

내가 남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나의 경험으로 말하면 그래왔어.

나는 지금껏 몇 십번의 위기를 겪었고

그때마다 나는 갈림길에 섰어.

그때마다 나는 무모한 결단을 내렸지.

나의 계획표는 사실이지 부실한 것이었어.

신의 플러스 알파가 없이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형태로 나는 설계했지.

결함투성이 설계도였어.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살아남았어.

그리고 여기까지 왔지.

신의 내밀어진 손이 없었다면

나의 그 많았던 위기의 순간 마다

매번 승리할 수는 없었을 거야.

나는 완벽한 설계도를 가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언제나 신의 플러스 알파를 의식하고

98은 나의 힘으로 그리고 마지막 두 걸음은 신의 힘으로

그런 설계도를 그렸던 거야.

나의 방법을 네게도 권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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