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연역과 귀납이 있다. 깨닫는다는 것은 연역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자연에 귀납은 없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연역이다. 귀납은 인간의 생각 속에서만 성립한다. 인간의 일상적인 사고는 대부분 귀납이다. 우선 인간이 눈과 귀로 사물을 듣고 보는 과정이 모두 귀납이다.
귀납은 시간을 거슬러 진행한다. 연역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한다. 인간의 눈과 귀는 컴퓨터의 네트워크 처럼 하나의 선으로 되어 있다. 그 선으로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점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체감관은 자연의 정보를 점의 단위까지 미세하게 분할한 다음 눈과 귀와 코의 선을 통하여 두뇌에 입력하는 것이다.
그 입력되는 과정은 시간을 거슬러 진행된다. 예컨대 우리가 보는 사물은 모두 일정시간 과거의 것이다. 10억광년 떨어진 밤하늘의 별은 10억광년 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즉 현재시간 그 별은 우리가 보는 위치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10억년 전에 그 자리에 존재했던 흔적을 목격할 뿐이다. 즉 우리는 10억년 전의 과거를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사실은 짧게는 0.01초에서 길게는 100억년까지 과거이다. 우리는 이 과거를 재구성하여 현재를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은 모두 과거이며 그 과거는 조각조각 찢어진 퍼즐들이다. 우리는 이 낱낱의 퍼즐조각을 맞추어 그 전체적인 모양을 재구성하여 인식을 얻어낸다.
이때 그 퍼즐의 조각조각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의 일정한 규칙성이 찾아질 수 있다. 즉 그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귀납과 연역은 정확히 반대된다. 귀납을 뒤집으면 연역이 된다. 고로 인간이 인식하는 과정을 180도로 뒤집으면 자연그대로의 진리가 찾아지는 것이다. 곧 연역이다.
연역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귀납을 뒤집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귀납의 순서를 알아야 한다. 조각조각의 퍼즐을 맞추어 본래로 회복하는 방법을 알고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너진 건물을 벽돌조각을 손에 쥐고 그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의, 곧 원래의 형태를 추론해내는 것이다. 이는 퍼즐맞추기와 마찬가지로 부단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통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다.
동양사상에서 귀납과 연역의 논리로는 음양론과 오행론이 있다. 음양론은 더 연역에 가깝고 오행론은 더 귀납에 가깝다. 오행론 중의 상생상극론은 연역에 가깝다. 상생상극론은 음양론의 변형 혹은 응용으로 볼 수 있다.
연역은 시간적 순서를 따라간다. 시간의 진행은 원인>결과로 이행한다. 이 시간성이 공간으로 치환될 경우 이항대립의 구조로 나타난다. 즉 상하, 좌우, 경중, 전후, 내외, 심원, 등 이분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유에 있어서 일상적으로 의지하는 이항대립의 원리, 곧 음양의 원리는 시간적인 진행 곧 원인과 결과를 공간에 대입한 것이다. 예컨대 헤겔의 변증법이 그러하다. 정과 반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원인과 결과이다.
물리적으로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성립한다. 이때 작용과 반작용은 이항대립 곧 ‘정과 반’ 혹은 ‘양과 음’으로 유추되지만 실제로는 ‘원인과 결과’이다. 원인이 먼저이고 결과가 나중이다. 고로 정이 먼저고 반이 나중이며, 양이 먼저이고 음이 나중이다. 물론 이는 유추해석에 불과하다. 변증법이나 음양론이나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 엄정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이항대립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 곧 음양은 연역구조이며 그 연역은 곧 원인과 결과이며 이는 공간적 구성소가 아니라 시간적 진행이다. 오행론의 상생상극론 또한 이항대립이다. 원인과 결과이며 물리학적 표현으로는 작용과 반작용이다.
반작용이 작용 측의 의도와 일치하면 상생이고, 일치하지 않으면 상극이다. 본질에서 같다. 테니스공을 상대선수가 되받아치되 주거니 받거니 랠리가 길게 이어지면 상생이고, 공이 라인 밖으로 튕겨져 나가면 상극이다. 이는 자의적인 유추해석에 불과하다. 논리적으로 엄정하지 않다.
곧 상생과 상극은 없으며 실제로는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이고 상생과 상극은 그 원인과 결과를 긍정 혹은 부정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 긍정과 부정은 대단히 자의적으로 판명됨은 물론이다.
예컨대 독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사람이 살면 상생이라 하고 죽으면 상극이라 한다. 독이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는 것은 아니다. 독은 외과의사의 메스이다. 독은 메스가 닿지 않는 곳까지 침투하여 환부를 자른다.
이때 암종이 잘라지면 상생이라 하고 멀쩡한 생살이 잘라지면 상극이라 한다. 즉 상생과 상극은 없다. 실제로 있는 것은 ‘독’의 날이 외과의사의 메스보다 더 예리하다는 사실 뿐이다. 다만 외과의사의 메스는 둔탁하되 인간의 손에 의해 통제되고, 약사의 독은 예리하되 통제되지 않으므로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둘은 본질에서 같다.
오행론은 전적으로 귀납이다.(상생상극의 형태로 연역요소가 개입해 있지만) 귀납은 시간적 진행을 거스른다. ‘원인>결과’를 거슬러서 ‘결과>원인’으로 진행한다. 나무가 생장할 때는 중심에서 가지로 진행한다. 그러나 조각난 퍼즐을 맞출 때는 주변에서 중심으로 역행한다. 이것이 귀납이다.
인간의 신체감관에서 뇌로 정보가 전달되는 경로가 나무의 가지와 같은 꼴이므로 가지>중심으로 거슬러 진행하는 것이다.
오행으로는 목화토금수가 있다. 5행의 기본발상은 원소설이다. 이는 서구의 4원소설도 마찬가지다. 원소라는 발상 자체가 귀납이다. 인간의 눈과 귀와 코가 뇌로 정보를 전달함에 있어서 그 네트워크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선을 탈 수 있는 것은 점 뿐이다.
정보는 비트라 불리우는 점으로 성립한다. 0과 1의 두 원소이다. 0과 1을 사용함은 인간의 편의이며 자연의 실재로는 오직 1 하나 뿐이다. 이 정보의 1이 원소설의 원자(atom)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톰은 없다. 물질은 아톰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물질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이러한 표현은 오해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건물은 벽돌이라는 아톰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보는 비트라는 아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정보는 비트 안에 없다. 즉 정보는 비트와 비트들의 상관관계로 성립할 뿐 비트 그 자체에 고유하지 않다. 그러므로 비트를 입수함이 곧 정보를 입수함은 아니다. 정보는 비트를 어떤 방법으로 조직하는가에 따라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건물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건물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은 벽돌을 어떤 형태로 조직하는가에 따라 성립할 뿐 벽돌 그 자체에 고유하지 않다. 그러므로 건물은 벽돌이 아닌 진흙이나 시멘트로 대체될 수도 있다.
목화토금수의 5원소설은 정보가 비트 내부에 고유하다는 발상이다. 즉 건물이 벽돌 그 자체의 속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설이다. 벽돌집의 형태는 벽돌이 결정하고 진흙집의 형태는 진흙의 속성이 결정한다는 설이다. 그 벽돌의 종류가 목화토금수 5개라는 설이다.
천만에.
일견 그럴 듯 해 보인다. 초가집은 흙이므로 2층을 올릴 수 없고 벽돌은 10층을 올릴 수 없으며 철골구조로는 100층도 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아톰인 벽돌과 진흙과 철강의 고유한 속성이 건물의 형태를 결정하는 듯이 보인다. 천만에.
유능한 건축가는 진흙으로도 10층을 지을 수 있다. 개미집은 진흙으로 지어졌지만 100층이 거뜬하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은 아톰 그 자체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곧 목화토금수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아톰이 조직함에 따라 목으로 혹은 토로 혹은 금으로 혹은 수로 나타내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의 물이 얼음으로(고체이므로 금), 물로(액체이므로 수), 수증기로(기체이므로 화) 모습을 바꾸는 것이다. 쇠도 끓이면 액체 곧 물이 되고 물도 굳히면 쇠처럼 단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톰 곧 비트의 속성이라 믿는 많은 것들은 아톰 그 자체에 고유하지 않다. 목화토금수에 고유하지 않다. 목은 목의 성질을 가지지 않고 있으며 토는 토의 성질을 가지지 않다. 즉 수도 조직함에 따라 목의 금의 토의 성질을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이 인과론 곧 원인과 결과로 보는 관점 곧 연역적 사고이다. 이 연역의 요소를 일부 반영하여 귀납논리의 허점을 보완한 것이 상생상극론이다.
결론적으로 아톰론, 원자론, 비트론, 오행론은 귀납적 사고에 의한 오류이다. 자연에 귀납은 없다. 귀납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만 성립한다. 자연은 불교의 인과론, 주역의 음양론, 혹은 연역법, 혹은 헤겔의 변증법 혹은 구조론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순서를 따라간다.
오행론은 곧 원자론이다. 원자론은 사물의 성질이 고유하다는 설이다. 이걸로는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연역원리를 적당히 도입하고 있는 것이 액체, 기체, 고체와 대비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액체, 고체, 기체는 사물의 본성이 아니다.
목은 생명체이며 이는 변화의 현재진행을 나타낸다. 화는 기체, 토는 혼합체, 금은 고체, 수는 액체이다. 이러한 점은 서구의 사원소설도 마찬가지다.
즉 원자론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사물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으며 고로 원자론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온전한 이론이 될 수 없고 그러므로 연역의 원리를 적당히 홉합하고 있으며 그 혼합과정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즉 연역인 음양론과 귀납인 오행론의 결합으로 인해 탄생하고 있는 상생상극론은 뚜렷한 근거 없이 적당히 같다붙인 결과가 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구조론은 원자론에 맞서고 있다. 원자론은 사물의 본성이 그 최후의 알갱이에 고유하다는 설이다. 구조론은 사물의 본성이 고유하지 않으며 사물의 성질은 원인과 결과가 2차적으로 만들어낼 뿐이라는 설이다.
예컨대 인간의 계급이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고유하다는 설이 원자론적 사고라면 석가의 연기사상은 이를 깨부순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의 연기설이야 말로 원자론에 대한 최초의 반란이 된다. 구조론은 그 연기설 혹은 인연설의 이론적 완성이다. 사물의 본성은 고유하지 않다.
예컨대 한국인은 원래 고집통이고 일본인은 야비하며 미국인은 어떠하다는 식의 편견과 통념은 모두 구조론에 반하는 원자론적 발상이 된다. 건물은 벽돌이 아니라 설계도가 결정한다. 정보는 비트가 아니라 그 비트의 조합인 프로그램이 결정한다.
원자론은 틀렸고 구조론이 옳다.
이론물리학도 원자론을 폐기하는 시점에서 완성된다. 지금은 더 작은 원자를 찾는 중이다. 더 작은 원자는 끝없이 찾아진다. 즉 물질이라는 건물을 잘게 부수어 벽과 서까래를 발견하고 ‘이것이 원자이다’ 하고 외치다가 더 작은 벽돌과 타일을 발견하고 ‘이것이 소립자다’고 외치다가 더 작은 돌과 쇠를 발견하고, 이것이 최종적인 근원의 입자이다 하고 외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봤자 0과 1곧 비트에 도달할 뿐이며 최종적으로는 0도 사라지고 1이 남는다. 그 1은 아무런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 1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다. 단지 물리학은 최종적으로 시간단위 1, 공간단위 1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정보는, 사물의 본성은 그 1의 조직 혹은 조합이 빚어내는 것이며 그 조합의 원리가 곧 구조론이다.
정리하면
● 연역과 귀납이 있다.
● 연역은 자연의 진리이고 귀납은 인간의 인식이다.
● 연역은 구조론이고 귀납은 원자론이다.
● 연역과 귀납, 구조론과 원자론은 상반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의 귀납구조를 파악하여 연역논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원자론의 오류를 시정하는 방법으로 구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참고하면
● 연역이 옳고 귀납은 옳지 않다.
● 귀납은 연역에 도달하는 방법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
● 구조론이 옳고 원자론은 옳지 않다.
● 원자론은 구조론에 도달하는 방법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
● 음양오행설이나 헤겔의 변증법 등은 연역과 귀납, 구조론과 원자론을 자의적으로 뒤섞어놓은 것으로서 학문적, 논리적으로 엄정하지 않다.
연역과 귀납이 있다. 깨닫는다는 것은 연역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자연에 귀납은 없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연역이다. 귀납은 인간의 생각 속에서만 성립한다. 인간의 일상적인 사고는 대부분 귀납이다. 우선 인간이 눈과 귀로 사물을 듣고 보는 과정이 모두 귀납이다.
귀납은 시간을 거슬러 진행한다. 연역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한다. 인간의 눈과 귀는 컴퓨터의 네트워크 처럼 하나의 선으로 되어 있다. 그 선으로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점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체감관은 자연의 정보를 점의 단위까지 미세하게 분할한 다음 눈과 귀와 코의 선을 통하여 두뇌에 입력하는 것이다.
그 입력되는 과정은 시간을 거슬러 진행된다. 예컨대 우리가 보는 사물은 모두 일정시간 과거의 것이다. 10억광년 떨어진 밤하늘의 별은 10억광년 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즉 현재시간 그 별은 우리가 보는 위치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10억년 전에 그 자리에 존재했던 흔적을 목격할 뿐이다. 즉 우리는 10억년 전의 과거를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사실은 짧게는 0.01초에서 길게는 100억년까지 과거이다. 우리는 이 과거를 재구성하여 현재를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은 모두 과거이며 그 과거는 조각조각 찢어진 퍼즐들이다. 우리는 이 낱낱의 퍼즐조각을 맞추어 그 전체적인 모양을 재구성하여 인식을 얻어낸다.
이때 그 퍼즐의 조각조각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의 일정한 규칙성이 찾아질 수 있다. 즉 그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귀납과 연역은 정확히 반대된다. 귀납을 뒤집으면 연역이 된다. 고로 인간이 인식하는 과정을 180도로 뒤집으면 자연그대로의 진리가 찾아지는 것이다. 곧 연역이다.
연역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귀납을 뒤집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귀납의 순서를 알아야 한다. 조각조각의 퍼즐을 맞추어 본래로 회복하는 방법을 알고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너진 건물을 벽돌조각을 손에 쥐고 그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의, 곧 원래의 형태를 추론해내는 것이다. 이는 퍼즐맞추기와 마찬가지로 부단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통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다.
동양사상에서 귀납과 연역의 논리로는 음양론과 오행론이 있다. 음양론은 더 연역에 가깝고 오행론은 더 귀납에 가깝다. 오행론 중의 상생상극론은 연역에 가깝다. 상생상극론은 음양론의 변형 혹은 응용으로 볼 수 있다.
연역은 시간적 순서를 따라간다. 시간의 진행은 원인>결과로 이행한다. 이 시간성이 공간으로 치환될 경우 이항대립의 구조로 나타난다. 즉 상하, 좌우, 경중, 전후, 내외, 심원, 등 이분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유에 있어서 일상적으로 의지하는 이항대립의 원리, 곧 음양의 원리는 시간적인 진행 곧 원인과 결과를 공간에 대입한 것이다. 예컨대 헤겔의 변증법이 그러하다. 정과 반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원인과 결과이다.
물리적으로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성립한다. 이때 작용과 반작용은 이항대립 곧 ‘정과 반’ 혹은 ‘양과 음’으로 유추되지만 실제로는 ‘원인과 결과’이다. 원인이 먼저이고 결과가 나중이다. 고로 정이 먼저고 반이 나중이며, 양이 먼저이고 음이 나중이다. 물론 이는 유추해석에 불과하다. 변증법이나 음양론이나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 엄정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이항대립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 곧 음양은 연역구조이며 그 연역은 곧 원인과 결과이며 이는 공간적 구성소가 아니라 시간적 진행이다. 오행론의 상생상극론 또한 이항대립이다. 원인과 결과이며 물리학적 표현으로는 작용과 반작용이다.
반작용이 작용 측의 의도와 일치하면 상생이고, 일치하지 않으면 상극이다. 본질에서 같다. 테니스공을 상대선수가 되받아치되 주거니 받거니 랠리가 길게 이어지면 상생이고, 공이 라인 밖으로 튕겨져 나가면 상극이다. 이는 자의적인 유추해석에 불과하다. 논리적으로 엄정하지 않다.
곧 상생과 상극은 없으며 실제로는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이고 상생과 상극은 그 원인과 결과를 긍정 혹은 부정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 긍정과 부정은 대단히 자의적으로 판명됨은 물론이다.
예컨대 독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사람이 살면 상생이라 하고 죽으면 상극이라 한다. 독이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는 것은 아니다. 독은 외과의사의 메스이다. 독은 메스가 닿지 않는 곳까지 침투하여 환부를 자른다.
이때 암종이 잘라지면 상생이라 하고 멀쩡한 생살이 잘라지면 상극이라 한다. 즉 상생과 상극은 없다. 실제로 있는 것은 ‘독’의 날이 외과의사의 메스보다 더 예리하다는 사실 뿐이다. 다만 외과의사의 메스는 둔탁하되 인간의 손에 의해 통제되고, 약사의 독은 예리하되 통제되지 않으므로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둘은 본질에서 같다.
오행론은 전적으로 귀납이다.(상생상극의 형태로 연역요소가 개입해 있지만) 귀납은 시간적 진행을 거스른다. ‘원인>결과’를 거슬러서 ‘결과>원인’으로 진행한다. 나무가 생장할 때는 중심에서 가지로 진행한다. 그러나 조각난 퍼즐을 맞출 때는 주변에서 중심으로 역행한다. 이것이 귀납이다.
인간의 신체감관에서 뇌로 정보가 전달되는 경로가 나무의 가지와 같은 꼴이므로 가지>중심으로 거슬러 진행하는 것이다.
오행으로는 목화토금수가 있다. 5행의 기본발상은 원소설이다. 이는 서구의 4원소설도 마찬가지다. 원소라는 발상 자체가 귀납이다. 인간의 눈과 귀와 코가 뇌로 정보를 전달함에 있어서 그 네트워크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선을 탈 수 있는 것은 점 뿐이다.
정보는 비트라 불리우는 점으로 성립한다. 0과 1의 두 원소이다. 0과 1을 사용함은 인간의 편의이며 자연의 실재로는 오직 1 하나 뿐이다. 이 정보의 1이 원소설의 원자(atom)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톰은 없다. 물질은 아톰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물질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이러한 표현은 오해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건물은 벽돌이라는 아톰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보는 비트라는 아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정보는 비트 안에 없다. 즉 정보는 비트와 비트들의 상관관계로 성립할 뿐 비트 그 자체에 고유하지 않다. 그러므로 비트를 입수함이 곧 정보를 입수함은 아니다. 정보는 비트를 어떤 방법으로 조직하는가에 따라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건물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건물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은 벽돌을 어떤 형태로 조직하는가에 따라 성립할 뿐 벽돌 그 자체에 고유하지 않다. 그러므로 건물은 벽돌이 아닌 진흙이나 시멘트로 대체될 수도 있다.
목화토금수의 5원소설은 정보가 비트 내부에 고유하다는 발상이다. 즉 건물이 벽돌 그 자체의 속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설이다. 벽돌집의 형태는 벽돌이 결정하고 진흙집의 형태는 진흙의 속성이 결정한다는 설이다. 그 벽돌의 종류가 목화토금수 5개라는 설이다.
천만에.
일견 그럴 듯 해 보인다. 초가집은 흙이므로 2층을 올릴 수 없고 벽돌은 10층을 올릴 수 없으며 철골구조로는 100층도 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아톰인 벽돌과 진흙과 철강의 고유한 속성이 건물의 형태를 결정하는 듯이 보인다. 천만에.
유능한 건축가는 진흙으로도 10층을 지을 수 있다. 개미집은 진흙으로 지어졌지만 100층이 거뜬하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은 아톰 그 자체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곧 목화토금수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아톰이 조직함에 따라 목으로 혹은 토로 혹은 금으로 혹은 수로 나타내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의 물이 얼음으로(고체이므로 금), 물로(액체이므로 수), 수증기로(기체이므로 화) 모습을 바꾸는 것이다. 쇠도 끓이면 액체 곧 물이 되고 물도 굳히면 쇠처럼 단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톰 곧 비트의 속성이라 믿는 많은 것들은 아톰 그 자체에 고유하지 않다. 목화토금수에 고유하지 않다. 목은 목의 성질을 가지지 않고 있으며 토는 토의 성질을 가지지 않다. 즉 수도 조직함에 따라 목의 금의 토의 성질을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이 인과론 곧 원인과 결과로 보는 관점 곧 연역적 사고이다. 이 연역의 요소를 일부 반영하여 귀납논리의 허점을 보완한 것이 상생상극론이다.
결론적으로 아톰론, 원자론, 비트론, 오행론은 귀납적 사고에 의한 오류이다. 자연에 귀납은 없다. 귀납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만 성립한다. 자연은 불교의 인과론, 주역의 음양론, 혹은 연역법, 혹은 헤겔의 변증법 혹은 구조론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순서를 따라간다.
오행론은 곧 원자론이다. 원자론은 사물의 성질이 고유하다는 설이다. 이걸로는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연역원리를 적당히 도입하고 있는 것이 액체, 기체, 고체와 대비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액체, 고체, 기체는 사물의 본성이 아니다.
목은 생명체이며 이는 변화의 현재진행을 나타낸다. 화는 기체, 토는 혼합체, 금은 고체, 수는 액체이다. 이러한 점은 서구의 사원소설도 마찬가지다.
즉 원자론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사물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으며 고로 원자론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온전한 이론이 될 수 없고 그러므로 연역의 원리를 적당히 홉합하고 있으며 그 혼합과정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즉 연역인 음양론과 귀납인 오행론의 결합으로 인해 탄생하고 있는 상생상극론은 뚜렷한 근거 없이 적당히 같다붙인 결과가 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구조론은 원자론에 맞서고 있다. 원자론은 사물의 본성이 그 최후의 알갱이에 고유하다는 설이다. 구조론은 사물의 본성이 고유하지 않으며 사물의 성질은 원인과 결과가 2차적으로 만들어낼 뿐이라는 설이다.
예컨대 인간의 계급이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고유하다는 설이 원자론적 사고라면 석가의 연기사상은 이를 깨부순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의 연기설이야 말로 원자론에 대한 최초의 반란이 된다. 구조론은 그 연기설 혹은 인연설의 이론적 완성이다. 사물의 본성은 고유하지 않다.
예컨대 한국인은 원래 고집통이고 일본인은 야비하며 미국인은 어떠하다는 식의 편견과 통념은 모두 구조론에 반하는 원자론적 발상이 된다. 건물은 벽돌이 아니라 설계도가 결정한다. 정보는 비트가 아니라 그 비트의 조합인 프로그램이 결정한다.
원자론은 틀렸고 구조론이 옳다.
이론물리학도 원자론을 폐기하는 시점에서 완성된다. 지금은 더 작은 원자를 찾는 중이다. 더 작은 원자는 끝없이 찾아진다. 즉 물질이라는 건물을 잘게 부수어 벽과 서까래를 발견하고 ‘이것이 원자이다’ 하고 외치다가 더 작은 벽돌과 타일을 발견하고 ‘이것이 소립자다’고 외치다가 더 작은 돌과 쇠를 발견하고, 이것이 최종적인 근원의 입자이다 하고 외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봤자 0과 1곧 비트에 도달할 뿐이며 최종적으로는 0도 사라지고 1이 남는다. 그 1은 아무런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 1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다. 단지 물리학은 최종적으로 시간단위 1, 공간단위 1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정보는, 사물의 본성은 그 1의 조직 혹은 조합이 빚어내는 것이며 그 조합의 원리가 곧 구조론이다.
정리하면
● 연역과 귀납이 있다.
● 연역은 자연의 진리이고 귀납은 인간의 인식이다.
● 연역은 구조론이고 귀납은 원자론이다.
● 연역과 귀납, 구조론과 원자론은 상반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의 귀납구조를 파악하여 연역논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원자론의 오류를 시정하는 방법으로 구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참고하면
● 연역이 옳고 귀납은 옳지 않다.
● 귀납은 연역에 도달하는 방법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
● 구조론이 옳고 원자론은 옳지 않다.
● 원자론은 구조론에 도달하는 방법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
● 음양오행설이나 헤겔의 변증법 등은 연역과 귀납, 구조론과 원자론을 자의적으로 뒤섞어놓은 것으로서 학문적, 논리적으로 엄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