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read 3037 vote 0 2002.09.09 (15:48:52)

사상체계에서 이념과 주의

사상에서 합리주의는 사상체계를 수용하는 이념지향적 태도이고 실용주의는 사상체계를 부인하는 비사상적 태도로 볼수 있다. 그러나 사상적 태도를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로 단순구분하여 대립관계로 보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상당히 어폐가 있다.
사상체계의 전개에서 이념은 상부구조를 가리키고 주의는 하부구조에 해당한다. 대립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과정이다. 합리주의는 이 주의의 하부구조에서 더 상부구조를 쳐다보는 이념지향적 태도이고 실용주의는 더 하부구조에 매달리는 주의지향적 태도이다.

[상부구조] ≪--- ---≫ [하부구조]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
이념 ≪--- 사상 ---≫ 주의
≪--- 합리주의 ◆ 실용주의 ---≫

※ 실용주의든 합리주의든 모든 주의는 위 사상체계의 전개에서 [방법]범주에 기초한다. 합리주의가 그 이전의 근거, 동기, 목적을 지향한다면 실용주의는 그 이하인 결실을 지향한다.

합리주의는 더 이념이며 사상이고 실용주의는 더 주의이다. 주의가 [방법에서 결과 이끌어내기]라면 합리주의는 상당히 주의를 부인하는 주의이고 실용주의는 더 주의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주의이다.

[정리 : 사상, 이념적 지향에서는 합리주의가 옳고 주의 지향에서는 실용주의가 옳다.]

우리가 통념적으로 자본주의, 기회주의, 개인주의 할 때의 주의는 더 실용주의 개념이다. 즉 [자본주의 사상이 옳으냐 민주주의 사상이 옳으냐] 하는 사상지향적, 이념지향적 태도에서는 더 합리주의에 가까운 주의가 옳은 사상이며 [개인주의가 옳으냐 공리주의가 옳으냐] 하는 주의지향적 태도에서는 실용주의 접근이 옳다. 곧 그것이 실용적인 주의라면 무조건 옳은 주의이다.
이러한 언어적 혼란은 언어학적 개념정립의 미흡에 기인한 것이며 근본 분류구분에서의 실패이다. 어떠한 생각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 전에 [옳다, 그르다]의 구분을 현재시점에서 볼것인가 역사과정에서 헤아릴 것인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정리 : 주의는 현재시점에서 방법을 찾고 이념은 시간과정을 통일하여 근거를 찾는다]

사상, 이념은 사상체계의 시간적 자기복제를 긍정하는 시간과정의 통합개념이며 주의는 다만 현재시점에서 판단하는 생각방법이다. 즉 이 시점에서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따지면 주의가 되고 먼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가를 따지면 이념이 된다.
[자본주의 이념, 혹은 자본주의 사상]이라고 말하면 주의라는 말과 사상이라는 말, 또 이념이라는 말이 중복되고 뒤섞여 있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먼저 언어적으로 정확히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정리 : 사상은 몸이고 이념은 머리이며 주의는 손발이다].

사상체계는 몸뚱이고 이념은 거기에서 머리다. 주의는 사상의 몸체에서 더 손발이다. 자본주의사상이라고 말하면 홍길동손발사람이 된다. 사람에게 손발이 있는 것이지 손발에 사람이 딸려 있는 것은 아니다. [ 홍길동(자본), 손발(주의), 머리(이념), 그 전체로서의 사람(사상) ]
주의는 현재시점에서의 실용주의적 관점이며 사상은 이념과 주의를 통일한 개념이고 이념은 더 합리주의적 관점이다. 이념(머리)은 하나이어야 한다. 주의는 여럿일 수 있다. 머리는 하나이고 손발은 여럿이다. 사상은 이념과 주의를 통일해야 한다.
사상은 사람이니까 홍길동도 있고 고길동도 있다. 이런 사상과 저런 사상이 있다. 그러나 홍길동이 둘일 수 없고 고길동이 둘일 수 없다.
여러 가지 문제에 여러 가지 사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에는 한가지 사상이 있을 뿐이다.
같은 하나의 사상체계 안에서 이념은 하나다. 샴쌍동이가 아니니까 머리는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상 안에서 주의는 여럿일 수 있다. 손가락, 발가락 말초부분으로 갈수록 주의는 더 늘어나는 법이다.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이념은 인식의 실천에 앞서서 합리화, 정당화로서의 근거찾기이며 주의는 실천에서 시간절약, 효율성의 제고이다. 방향은 하나다. 길은 여럿이다. 이념이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고 사상이 자기복제하여 여러개의 길을 제시하며 주의가 가장 빠른 길을 택일한다.
통념상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는 서로 모순, 대립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합리적인 것이 곧 실용적일 수 있으며 실용적인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요는 시간 상에서 반전의 문제, 역설의 문제이다.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합리적이지 않다던가, 실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경우가 문제가 될 뿐 즉, 판단과 판단에 이용된 정보에 오류가 있을 때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합리주의와 실용주의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 뿐 본질에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주의는 사상체계의 자기복제에 의존한다. 근거가 분명하므로 믿을수 있다. 상부구조가 뒷받침되므로 효율적이다. 문제는 그 시스템 구조를 명백하게 알수 있느냐일 뿐이다. 함부로 개입하여 엉뚱한 곳에 적용하는 것이 문제이다.

[정리 : 판단에 이용된 정보가 옳다면 곧 합리적인 것이 실용적이다]

10개의 사과가 있다면 그냥 호주머니에 넣고 가든, 안고 가든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백개의 사과가 있다면 아무래도 상자에 잘 담아 수레에 싣고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용주의란 겨우 10개의 사과를 나를 때 계산하고 적재하고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합리주의란 백개의 사과를 나를 때 잘 계산하고 정리하고 조직해야 함을 말한다.
대상이 주체보다 더 크냐 작으냐에 따라 개입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어느 선에서 사태에 개입할 것인가를 결정해야한다. 바깥에서 조정할 것인가? 안에서 파묻힐 것인가?
열개의 사과와 백개의 사과와의 차이는 그 내부논리가 작용하는지의 여부이다. 열 개의 사과를 운반한다면 사과는 사람에 의속하므로 사과의 정체성은 없다. 그러므로 사과의 내부논리는 기능하지 않는다. 백개의 사과이면 사과는 독립한다.
백개의 사과에서 사과와 사람은 하나의 사건이 아닌 두 개의 사건이 된다. 두 개의 사건에는 두 개의 논리가 작동한다. 사람의 논리와 사과의 논리가 별개로 작용한다.
사과의 논리는 백개의 사과가 어떻게 줄서고, 무리짓고, 정리되어 그것이 하나의 단일사건으로 기능하는가의 여부이다. 거기서 합리주의란 백개의 사과를 백개의 사건이 아닌 하나의 사건으로 만드는 기능이다.
어떤 것이 합리적이다 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백장의 연탄을 운반할 때 백장의 연탄을 하나의 수레에 담으면 백장의 연탄은 백개의 사건이 아닌 하나의 사건으로 기능한다. 이 하나됨이 효율성을 생산한다.

[정리 : 합리주의자는 독립시키고 실용주의자는 의속시킨다]

만약 한 장의 연탄이라면 수레를 가져올 필요가 없다. 곧 실용주의다. 그러므로 실용주의란 어떤 문제에 임하여 그 사건을 별개의 독립된 사건으로 보지않고 다른 큰 사건에 의속시켜 보는 것이다.
합리주의자는 길을 먼저 만들어 놓고 비로소 그길을 간다. 실용주의자는 남이 가는 길을 뒤따라 간다. 앞서가는 자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합리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뒤따라 가는 자는 굳이 새길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실용주의자가 된다.
중요한 것은 합리주의가 옳으냐 실용주의가 옳으냐의 판단이 아니라 그 일이 새로 시작하는 일인지 아니면 이미 있는 것을 이용하는 일인지를 판단하기이다. 우리는 양자를 적절히 연계하고 통일하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
어떤 것이든 높은 단계에 이르면 합리주의가 곧 실용주의가 된다. 양자는 통일되어 하나의 세트로 기능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것이 실용적인 것이다. 그러나 선합리, 후실용이다.
원대한 계획, 큰 사업, 중대하고 진지해야하는 일은 합리주의의 방법으로 접근할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단기전, 작은 일, 가벼운 놀이는 실용주의가 시간을 단축한다.

실용주의에서 합리주의로

실용주의란 임의의 사건을 별개의 사건으로 독립시켜 생각하지 않고 이미 진행중인 다른 사건에 의속시켜 보는 생각이다. 의속시켜서 보기는 그 의속되는 주체에 대한 낙관적 신뢰의 토대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때로 사태의 본질에 개입하지 않으려 하는 무책임한 체념일수도 있다.
합리주의란 출발점에 서서 주체적, 독립적 사건으로 보는 태도이다. 거기엔 적어도 상당한 지적 용기와 책임지려 하는 자세가 있다. 그러나 터무니 없이 큰 것을 작게 보고 말아야 할 일에 함부로 개입하려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실용주의가 그 상부구조에 대한 신뢰를 가질 때 낙관주의다. 그러나 신뢰하지 못하고 쉽게 도피하는 방편이 될 때 비관주의다. 합리주의가 만만한 일에 덤빌 때 낙관주의다. 그러나 합리주의자의 도전이 언제나 쉽게 승부가 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한 합리주의자는 비관할수 밖에 없다.
핵심은 사건규모의 판단이다. 사건이 어느 정도의 큰 사건인가? 자신이 개입하는 시점이 사건진행의 머리부분인가 꼬리부분인가를 판단해야 해야 하는 것이다.

[정리 : 주의판단은 사태에의 개입방향과 개입시점을 결정한다]

합리주의란 씨를 뿌리는 농부가 밭을 고르는 태도이고, 실용주의란 추수하는 농부가 이미 지난 일이 된 김매기의 힘듦을 잊고 즐거워 하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실용주의는 합리주의의 하부구조로 기능해야 하며 그럴 때 합리적인 것이 곧 실용적인 것이 된다.
한국인들은 더 합리주의적이다. 그러나 합리주의적인 것이 곧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잘못된 합리주의는 더 비합리적이다. 합리주의가 올바른 사상체계에 기초하지 아니하고 개인의 성격적 태도로 변질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더 실용주의적이다. 그리고 그 실용주의는 때때로 합리적이다. 불필요한 논쟁을 통한 시간낭비를 막아준다. 그러나 실용주의의 그러한 가벼운 태도가 2차 세계대전의 침략으로 이어졌을 때 그 피해는 감당할수 없는 것이다. 실용하지 말아야 할 일에 실용한 결과다.

[정리 : 합리주의는 비합리적일수 있고 실용주의는 비실용적일수 있다]

한권의 소설책을 쓰는 작가가 이제 이 소설로 하여 사회에 어떠한 파장을 미칠 것인가의 문제를 씨뿌리는 설계가의 관점에서 계획한다면 합리주의자이며 반대로 수확하는 수금원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실용주의자이다.
과연 이 한권의 책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설계도여야 하는가 아니면 내 인생체험의 결실로서의 마지막 수확이 되어야 하는가?
사상체계의 관점에서 보면 한권의 책은 공간적 의속관계와 시간적 인과관계를 추적할 때 인간의 일생체험 보다 작은 것이며 뒤지는 것이다. 당연히 인생체험의 결실로서의 수확으로 보아야지 옳다. 작은 것을 크다고 말한다면 사실의 왜곡이다.
사상체계란 존재의 제 현상을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아 통일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우선하는 실용주의자의 관점이 오히려 사상체계에 맞는 생각이 되기도 한다.
합리주의자는 한권의 책으로 민중을 교화하고 사회를 개조하며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고 인류문명에 공헌한다는 거창한 의미를 담으려 한다.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이야말로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으려 하는 사상체계 시스템의 전도이다. 엔진으로 바퀴를 굴리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바퀴를 돌려 엔진에 점화하려는 그릇된 시도이다.

[정리 : 합리주의의 오류는 사상을 인간의 앞에 두는 가치전도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을 인간으로부터 독립시킨다. 사상이 인간의 하부구조로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이 사상의 하부구조가 된다. 합리주의가 곧잘 범하게 되는 가치전도의 오류이다. 사상은 인간이 근거가 되고 대상이 동기가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인이 된다.
실용주의는 무기력하게 책임을 전가한다. 현상을 맹목적으로 긍정하고 쉽게 도전을 포기한다. 함부로 적응하려 하고 챔임지지 아니한다. 상황논리에 지배되는 안이함이 있다. 일이 잘 진행되고 있을 때 실용주의는 쓸모가 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실용주의는 무기력하다.

[정리 : 실용주의의 오류는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가치부재이다]

합리주의의 오류가 가치전도라면 실용주의의 오류는 가치부재이다. 가치체감의 법칙에 의해 모든 쓸모있는 것들은 점점 쓸모없는 것으로 변해간다. 의존적인 실용주의는 누가 뚫어준 길을 잘 달릴 뿐 스스로 창조하지 못한다.
합리주의는 도전과 모험이다. 이때의 위험은 가치전도다. 합리주의가 도전하는 새로운 대상은 미처 검증되지 않은 것이므로 합리주의자들은 곧잘 바퀴로 엔진을 굴리려드는 가치전도로 하여 실패한다.
실용주의자는 합리주의자를 뒤따라 다니면서 합리주의자의 성공사례들만 수확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존성으로 하여 스스로는 진정한 성공을 할 수 없다.

[정리 : 합리주의자는 도전하고 실용주의자는 수확한다]

역사의 길을 뚫는 이는 합리주의자이고 검증하여 바로잡는 이는 실용주의자이다. 그러므로 실용주의자와 합리주의자는 공존해야 한다. 그러나 합리주의가 먼저다. 합리주의가 있어야 실용주의가 있을 수 있다. 시를 뿌리지 않는데 수확할 수는 없다.
어리석은 대중은 많이 수확한 자 만을 칭송하지만 그 수확이 씨뿌리는 이에 의해 가능했음을 알지 못한다. 합리주의자가 파종하면 실용주의자가 수확한다. 사상은 더 합리주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실용주의와 힙리주의는 균형을 이루어야 하지만 그 균형이 50 대 50의 일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주의가 한걸음 앞서야 한다. 모든 시작한 일은 가만히 두면 저절로 결실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러스 알파는 실용주의에 작용한다. 고로 인간은 오히려 합리주의여야 하는 것이다.

[정리 : 한걸음 앞서서 개입하는 것이 알맞게 개입하는 것이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균형이 무너지고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이 개입한다면 저절로 무너지는 균형의 어디에 개입할 것인가?
주의판단은 인간의 사태개입시점을 특정한다. 현재를 현재라고 특정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에 개입하려면 이미 과거에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리는 차를 멈추게 하려면 한걸음 앞에서 막아야지 나란히 달려서는 안된다. 언제나 앞서는 것이 나란한 것이며 나란한 것은 뒤처지는 것이다.
시간은 과거에 미래로 흐르고 파종된 씨앗은 내버려 두어도 자연이 키워낸다. 자연의 법칙은 실용주의자의 편을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선 오히려 합리주의의 편에 서야 한다. 파종하는 이보다 수확하는 이가 이익이지만 모두가 수확을 맡으려 하면 그 농사는 망한다.
사회의 현실은 실용의 편에 서지만 인간의 정신은 합리주의의 편에 서는 것이다. 파종해 두면 누군가는 수확하게 마련이다. 사상의 의미는 자연이 실용주의의 편을 들어 균형을 깨뜨리는 데 대해 인간정신이 이를 되돌려서 균형점을 지향하는 것이다.

[정리 : 자연이 실용주의이므로 인간은 합리주의여야 한다]

언제나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소수의 리더들이다. 리더는 합리주의자여야 한다. 설계가가 설계한데로 건축가가 지어내는 것이다. 최초에 설계가가 실용주의자여서는 진보가 없다.
설계가가 쓸모있는 집을 설계하려 해서는 안된다. 설계가가 아름다움에 치우쳐 별로 쓸모없는 집을 설계했다더라도 건축가가 보완하여 또 쓸모를 찾아낼수 있는 법이다.
설계가가 실용적인 집을 설계한다고 성냥갑 모양의 아파트를 설계해 놓으면 건축가가 어떻게 개조하여 아름답게 변형시킬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계가는 건축가의 몫으로 여백을 두는 것이다.

합리주의 소재 ......설계가의 관점 (모든 가능성의 개방)
↑ 기능 ......건축주의 관점 (기능적 완성도 지향)... 기능의 플러스 알파
성능 ......건축가의 관점 (성능의 균형점 지향)....성능의 플러스 알파
↓ 효능 ......시공자의 관점 (효능의 비용절감 지향)..효능의 플러스 알파
실용주의 미감 ......소비자의 관점 (인간의 접근성 지향)....미감의 플러스 알파

※..설계가는 소재를 결정할 뿐이다. 모든 것을 설계가가 결정하려 해서는 안된다. 뒤에 오는 이를 위하여 기능과 성능, 효능, 미감에서 결정권의 상당을 양보하는 것이다. 사상가는 합리주의자여야 하지만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해서는 안된다.

전략가는 세부전술까지 결정하지 않는다. 현장에서는 츨러스 알파가 끼어든다. 플러스 알파를 고려하여 야전의 소대장들이 결정할 몫을 남겨두어야 하는 법이다.
실용주의자는 자기취향에 맞추려 드는 법이다. 그러면서 그 취형을 변화시키려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사용할수록 실증이 나는 것이다.
합리주의자는 모든 가능성을 개방한다. 기본적 원칙만 정할 뿐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소비자가 적절히 변형할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설계가가 벽지의 색깔이나 장식가구까지 다 정해버리면 변덕스런 소비자의 기호를 맞출수 없는 것이다.

[정리 : 합리주의는 가능성의 개방이다]

합리주의자 최고의 덕목은 모든 가능성을 포용하는 유연함이다. 그러면서도 원칙은 고수해야 한다. [소설은 똑 이렇게 써야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혁명은 똑 이렇게 해야한다]는 변혁사상이나 [역사의 진보는 똑 이런 제도만으로 가능하다]는 식의 좁은 소견이야 말로 합리주의자가 곧잘 빠지게 되는 가장 큰 함정이다.
설계가는 자기의 입맛에 맞추어 설계하지 않는 법이다. 누가 사용할 집인지 알수 없으므로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 합리주의자의 플러스 알파 대비이다.

[정리 : 자연의 플러스 알파는 실용주의의 편들기이며 인간의 플러스 알파는 합리주의의 편들기이다]

자연은 태고적부터 존재해 왔으며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인간은 다만 거기에 적응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노자의 실용주의다. 자연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인간이 개입해서 바꿔놔야 한다는 생각이 공자의 합리주의다.
실용주의와 합리주의는 균형을 취해야 하지만 자연은 실용주의에 플러스 알파로 편들기 때문에 인간은 합리주의에 편들어야 균형이 성립하고 그 균형이 변화를 유발하는 에느르기를 담보한다.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합리주의는 더 진보주의이고 실용주의는 더 보수주의이다. 진보주의는 위대한 역사의 흐름에 한발 앞서서 개입하라 이르고 보수주의는 체념하고 수확에나 힘쓰라고 이른다.
합리와 실용의 구분이 공간적 개입방향의 판단이라면 진보와 보수의 판단은 시간적 개입시점의 판단이다. 그러나 본질에서 같다. 사상체계의 자기복제는 시간변수를 공간변수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합리주의는 곧 진보주의이며 실용주의는 곧 보수주의다.

[정리 : 합리주의, 실용주의는 공간개념에서 개입방향 특정이고 진보주의, 보수주의는 시간개념에서 개입시점 특정이다]

합리주의가 가르치는 것은 공간의 측면에서 사건의 전체에 개입하라는 것이며 실용주의가 가르치는 것은 사건의 말초적 부분에 개입하라는 것이다. 진보주의가 가르치는 것은 사건의 앞서서 개입하라는 것이며 보수주의가 가르치는 것은 사건의 말미에 개입하라는 것이다.
합리와 실용, 진보와 보수는 균형을 가져야 하지만 자연에서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므로 자연은 보수주의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보주의여야 한다.
어른과 어린이가 싸웠다면 무조건 어른이 잘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보수의 편, 어른의 편을 들어서 무조건 어른이 이기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어린이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진보주의란 사태의 앞부분에 개입하라는 것이다. 사건이 현재진행중이라면 한걸음 앞으로 가서,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서, 더 원인에 개입하라는 것이다. 30미터 전방에서 멈추려면 30미터를 더가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기서부터 속도를 줄여나가야 한다.
언제나 깨닫게 되는 것은 알맞은 시점에 개입하였다며 이미 한발 늦었다는 것이다. 자기복제의 가속도 판단이다. 언제나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더 높은 차원에서 해결책을 구하는 것이 진보주의자의 태도이다.

※ [집적도 2에서 학문]

↑합리주의 1. 존재론┃물리 수리 섭리 논리 언어
2. 인식론┃진리 깨달음 구원 이론 철학
3. 정신론┃정신 의식 의지 의사 감정
4. 방법론┃인도 자유 민주 자본 사회(주의)
↓실용주의 5. 문명론┃환경 과학 생산 체제 문화
━━━╋━━━━━━━━━━━━━━━━━
┃중요성 필연성 가능성 합리성 현실성
← 진보주의 보수주의 →

위 집적도 2 의 학문분야에서 ↑의 위쪽일수록 더 합리주의, 곧 공간적으로 상부구조이며 ↓의 아래쪽으로 갈수록 더 실용주의, 곧 하부구조에 해당한다. 또 ←의 방향으로 갈수록 시간적으로 앞서는 진보주의이며, →의 방향으로 갈수록 시간적으로 뒤지는 보수주의이다.
합리주의는 더 높은 단계에서 곧 더 ↑의 위, 상부구조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며 진보주의는 더 앞선 단계 곧 더 ←의 앞선 시점에서 사건에 개입하는 것이다.

[정리 : 같은 차원에서 다른 개념의 양자가 대립할 경우 합리주의가 우선한다]

진보는 시간개념이고 합리는 공간개념이다. 시간은 공간이 자기복제 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공간이 시간에 앞선다. 따라서 진보주의와 합리주의는 같은 개념이지만 같은 차원에서 양자가 마찰할 경우에는 합리주의가 우선한다.
집적도의 자기복제는 집적도가 1 증가할때마다 시간변수가 공간변수로 자리바꿈한다. 즉 높은 단계의 구성요소 중 시간변수 좌표로의 횡렬이 낮은 단계의 공간변수로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 [집적도 3에서 학문의 방법론]

1. 인도주의┃존엄성 정체성 주체성 사회성 문명성(인간성)
2. 자유주의┃인격권 소유권 참정권 행동권 환경권(권리)
3. 민주주의┃주권 주도권 대립 투쟁 변혁(권력)
4. 자본주의┃자원 자본 시장 이윤 소비(효율)
5. 사회주의┃윤리 도덕 정치 경제 문화(사회주의)
━━━╋━━━━━━━━━━━━━━━━━
┃생성기 확산기 조정기 활동기 이탈기

집적도의 증가는 시간변수에서 공간변수로의 자리바꿈이다. 그러므로 높은 단계의 진보주의가 낮은 단계의 합리주의로 역할을 바꾸어 드러낸다. 위 그림은 집적도 2 의 학문분야 중 4의 방법론(인도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이 집적도 3 에서 자기복제 한 것이다. 집적도 2 의 구성요소에서 시간변수에 대응하여 횡렬로 전개했던 방법론 상의 시간개념이 집적도 3 에서는 대응요소의 공간변수로 된다.
집적도가 전개한다는 것은 높은 단계의 구성요소가 낮은 단계의 대응요소가 되는 것이다. 같은 개념이 구성요소(시간변수)로 나타날때와 대응요소로 나타날 때의 개념차이는 진보주의 우선으로 판단된다.

[정리 : 동일개념이 다른 차원에서 대립할 경우 진보주의가 우선한다]

높은 단계의 진보주의가 낮은 단계의 합리주의이므로 진보주의와 합리주의는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개념이 대응요소(낮은 단계)로 인식되는가 구성요소로 인식되는가에 개념차이가 있고 여기서 진보주의가 더 높은 단계의 판단이므로 우선한다.
개념이 다른 자유주의의 원칙과 민주주의 원칙이 충돌한다면 높은 집적도의 구성요소에서 자유주의에서 답을 찾는 것이 진보주의이고 낮은 단계의 대응요소일 때는 자유주의에서 답을 찾는 것이 합리주의다. 어느 쪽이든 자유주의가 우선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위 두 그림들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집적도 2 에서 구성요소이고 집적도 3 에서 대응요소이다. 전자에서 진보주의 판단이고 후자에서 합리주의 판단이다.
개념이 같은 하나의 자유주의 개념이 집적도 2 에서 구성요소로 나오고 집적도 3 에서 대응요소로 나온다. 같은 개념이 구성요소냐 대응요소냐에 따라 기능이 다를 때 구성요소 우선, 곧 시간변수 우선이다.
같은 인간이 구성요소일 때는 인간들의 집합으로 기능한다. 대응요소일 때는 개인으로 기능한다. 양자의 인간이 충돌할 경우 구성요소 우선, 진보주의 우선이다.

현실주의와 퇴폐주의

더 이상 인간이 문제에 개입할수 없을 때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의 태도는 현실주의와 퇴폐주의로 구분될수 있겠다. 현실주의는 나타난 상황을 긍정하는 것이고 퇴폐주의는 현상까지 부정하는 것이 되겠다.

[사상체계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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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기능..> | 이념(이다) 주의(아니다) |.......[자기복제 여부]
대응기능..> | 낙관(있다) 비관(없다) |.......[인간과의 관계]
의속기능..> | 합리(같다) 실용(다르다) |.......[공간적 방향]
인과기능..> | 진보(속한다) 보수(배제된다)|.......[시간적 순서]
표상기능..> | 현실(맞다) 퇴폐(틀리다) |.......[인간의 수용]
+---------------------------------+

학문이 존재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이라면 사상은 인간이 그 학문적인식을 받아들여 특정문제에 대응하여 실천하는 데 있어서의 접근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사상의 유도기능은 이념과 주의의 구분이 된다. 사상은 근거를 존재론의 자연법칙에서 구하는 것이 이념이면 그것을 부정하고 거기에 인간을 개입시키려 하는 것이 주의이다.
존재론의 법칙은 모든 일들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는 것, 즉 이미 개입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실제로 사태에 개입하여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즉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이념의 [이다]에 대해 [아니다]의 부정으로 부터 인간의 개입, 곧 주의가 시작된다. 낙관주의는 인간이 사태에 개입해도 좋다는 생각이며 비관주의는 인간이 개입해서 안된다는 생각이다. 합리주의는 상부구조에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이며 실용주의는 하부구조에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진보주의는 상황에 앞서서 개입해야 함을 말하고 보수주의는 상황이 끝나고 갱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실주의는 개입이 끝난 후에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이고 퇴폐주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이다.
위 사상체계의 전개에서 위로 갈수록 앞쪽으로 갈수록 인간의 개입여지는 넓어지고 아래로 뒤로 갈수록 인간의 개입여지는 좁아진다. 인간이 점점 더 소극적으로 되는 것이다.

[정리 : 인간은 이념적 존재이다]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태에 개입해 있다. 고로 인간은 이념적 존재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고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아름 받아와서 증식해놓고 떠나는 것이다. 그것이 이념적 태도이다. 이미 개입해 있으므로 임의로 발을 뺄수는 없다.
인간존재의 이념성에 의해 인간은 이미 사건에 개입해 있으므로 인간은 이념적 존재이며 발을 뺄수는 없으나 소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는 있다.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것이 거기서 이념적 태도이며 또 낙관주의이고 합리주의이며 진보주의이고 현실주의이다.
범위를 넓게 보느냐 좁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체 존재의 차원에서 보면 인간은 어쩔수 없이 사태에 개입해 있지마는 한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인간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곧 이념에 대해 부정으로서의 주의이다. 개입해 있지만 인간에게도 선택의 여지는 있다.
개인의 차원에서라도 역시 개입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낙관주의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비관주의이다. 설계가의 차원에 서므로서 영향력을 미칠수 있다는 것이 합리주의이고 영향력을 미칠수 없다는 것이 실용주의이며 사건에 앞서 개입하므로서 적어도 변화를 일으킬수 있다는 것이 진보주의이고 변화는 오히려 해악이 된다는 것이 보수주의이면 최소한 있는 사태를 그대로 수용할 수는 있다는 생각이 현실주의이고 그 마저도 부정하는 생각이 퇴폐주의이다.

(사상체계의 연속적 전개)

정(긍정)이념...[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이미 문명과 역사에 개입해 있다(숙명)].
반(부정)주의...[그러나 한 개인의 차원에서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자유의지)]

정(긍정)낙관...[인간은 주어진 사태에 마음대로 개입하여도 된다.]
반(부정)비관...[인간이 개입할수록 인간에게 되려 피해가 된다]

정(긍정)합리...[인간이 사태에 개입하려면 되도록 상부구조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
반(부정)실용...[개입하려면 되도록 소극적으로 하부구조에 개입하는 것이 좋다]

정(긍정)진보...[시간적으로 앞선 상황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유리하다]
반(부정)보수...[충분히 검증된 후에 뒤늦게 개입하는 것이 안전하다]

정(긍정)현실...[사태가 이미 끝난 후라면 일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반(부정)퇴폐...[아무것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사상체계의 디렉토리 경로)
[사 상] ( 긍정 <--> 부정 )
구분 제 1 유도기능 → ↙ ↘
이념 주의
구분 제 2 대응기능 → ↙ ↘
낙관주의 비관주의
구분 제 3 의속기능 → ↙ ↘
합리주의 실용주의
구분 제 4 인과기능 → ↙ ↘
진보주의 보수주의
구분 제 5 표상기능 → ↙ ↘
현실주의 퇴폐주의

※ 인간의 삶에서 문제들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답이 나오는 것이 있고 말초적인 차원에서 답이 나오는 것이 있다. 행복의 문제, 생활의 문제들은 현실주의의 하부구조에서 답이 나오지만 근본문제들은 높은 이념의 차원에서 답이 나온다.

사상체계의 연속적 전개는 어떤 문제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곧 긍정이 아닌 부정이 된다고 해서 곧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차원에서 답을 구할수 있다는 것이다.

사상체계의 효용

사상체계는 인간이 주어진 사태에 개입하는 방식을 특정한다. 산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인간은 거기에 주체적으로 개입한다. 그렇다면 그 개입여부와 개입방식, 개입시점이 결정되어야 한다.

이념은 이미 개입해 있다는 것이다. 숙명론이다. 인간이 태어났을 때 이미 남자로 태어나 남자의 그룹에 개입해 있으며,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의 역사체험에 개입해 있으며, 20세기에 태어나 20세기인의 문명체험을 공유한다.
이러한 인간의 이념성을 결코 부인할수 없다.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역사와 문명과 세계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역사의 편, 문명의 편, 진리의 편에 가담해 있는 것이다.

[정리 : 이념은 인간의 숙명이다]

이념이 사태에의 자동개입을 설정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영역이고 미래의 영역에서는 인간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즉 이미 가담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영역들이 또한 그만큼 있다. 이에 이념의 대응개념으로 주의가 제시된다. 인간이 결정할 몫이다.

낙관주의는 인간이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도 좋다는 생각이다. 사상은 기본적으로 낙관을 전제로 한다. 비관이면 사상의 존재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은 낙관주의임을 주장한다.
개인이 태어나기 이전에 사회와 문명과 역사가 있었고 개인은 그로부터 유도된 것이다. 그 이미 있는 것이 필요로 하여 불러서 온것이므로, 불려져 온 인간이 개입해서 더 나아질 지언정 나빠질 것은 없다.

[정리 : 역사와 문명이 필요로 하여 불러온 것이 인간이므로 더 나빠질 것은 없다]

사상은 낙관을 전제로 하지만 인간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제어하지 못하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어느 시점, 어느 지점에서 개입할 것인가이다. 잘못된 사상들은 낙관을 주장하지만 실제에서 그 인간의 개입시점을 제대로 특정해주지 못한다.
개입한다는 것은 특정방향, 특정시점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 방향과 시점을 잘못 선택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뿐이다. 곧 비관주의이다.

합리주의는 개입방향을 설정할 때 되도록 상부구조에 개입하여야 기능한다는 접근방식이다. 사태가 꼬여버리는 것은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으려 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사상이 인간으로 하여금 실패하게 하는 것은 작은 문제에 개입하여 시시콜콜 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전략과 전술을 구분 못하는 것이다. 합리주의는 세부전술을 배제하고 대강의 큰 원칙만 따지는 전략적 선택이다.

[정리 : 잘못된 모든 사상은 작은 문제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는 반대로 작은 문제만을 개입하는 것이다. 대신 작은 목표를 설정하므로 단기적 이익을 얻을수 있다. 합리주의가 실패하는 것은 너무 거창한 목표를 정하기 때문이다. 목표를 낮춰잡고 세부전술에서 실리를 취하는 것이다.

진보주의는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실패가 없다. 왜냐하면 아직 수지타산을 계산하지 않으니까. 인간이 서로 마찰하는 것은 과거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강물은 아래로 흐르고 강물이 가는 쪽으로 나아가면 결국 하나로 통합되어 바다로 이르는 것이다.

[정리 : 미래를 향한 도전에는 실패가 없다]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의 성공사례만을 수집 이용한다. 그러므로 더욱 안전하다. 타인이 앞서가다가 행한 결과를 보고 거기서 성공한 경우만 취한다.

현실주의는 이미 끝난 일에서 상황 그 자체는 있는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미 사태가 끝나서 개입할 여지가 없다면 그저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정리 :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 현실이다]

퇴폐주의는 사상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다. 즉 철저히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다. 인간은 결국 죽는다.

인간의 선택

하나의 사태에 개입함에 있어서 사상은 인간의 개입방식을 결정해 준다.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며 인간은 좋든 싫든 거기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안간이 태어나면서 부터 운명의 절반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나머지 절반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념이고 정해져 있지 않은 부분을 선택하는 것이 주의이며 그 양자를 하나의 체계로 통합해주는 것이 사상이다.
사상은 최초 이미 정해져 있는 이념의 큰 줄기부터 시작하여 주의, 낙관, 비관, 합리, 실용, 진보, 보수, 현실, 퇴폐로 전개한다. 뒤로 갈수록 점점 세부적인 사실이 되며 앞으로 갈수록 큰 줄거리가 된다.
맨 앞에 이념이 있다. 이념은 인간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해져 있는 삶의 지향점을 말한다. 인간은 이념을 받아들이든가 죽든가 뿐 선택의 여지는 없다.
맨 뒤에 퇴폐가 있다. 잠을 잔다던가 휴식을 취한다던가 놀이한다든가 하는 것은 사상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전혀 사상적일 이유가 없는 즉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개인적인 영역에 퇴폐가 허용된다.

[정리 : 이념은 공유하는 것이고 퇴폐는 개인적인 영역이다]

이념은 선이고 퇴폐는 악인 것이 아니라 이념은 공공재산과 같이 공유하는 것, 퇴폐는 타인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영역이다.
퇴폐는 타인에게 권장할 것이 못된다. 마찬가지로 타인이 간섭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념은 인류가 공유하는 것이므로 충분히 간섭된다. 또한 충분히 권장된다. 사상은 이념과 퇴폐 사이에서 인간의 개입가능영역을 특정해 준다.
이념은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영원한 것이고 퇴폐는 현재의 것이다. 현재가 지나면 사라져 버리므로 개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 퇴폐이고 결코 사라지지 않으므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념이다.

[정리 : 이념은 영원하고 퇴폐는 사라진다]

하나의 문제를 발견했을 때 사상은 인간이 그 문제에 어떠한 방식으로 개입할 것인가를 가르켜 준다. 이념에서 퇴폐에 이르기 까지 10단계를 단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사상의 사태개입 10단계]

1. 이념...이미 한배에 올라탔으므로 어디로 가는지 방향만 파악하라.
2. 주의...배에 탔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저어야 간다.
3. 낙관...일단 노를 잡고 난 다음 어느쪽으로 저을지를 결정하라.
4. 비관...잘못 저으면 배가 뒤로 간다.
5. 합리...노를 저어보면 가는 방향을 알수 있다.
6. 실용...방향도 모르고 저으면 팔만 아프다.
7. 진보...아무것도 안하니보다는 아무렇게나 한느 쪽이 낫다.
8. 보수...남이 하는 걸 보고 성공하거던 따라하면 된다.
9. 현실...배가 가거던 계속 저으라.
10. 퇴폐...가는 것이 전부는 아니고 상황을 즐기는 플러스 알파의 이익이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한가지 결정이 실패했다고 해서 곧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선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상체계의 효용은 사건의 규모에 따라서 그 진행정도의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게 해준다.
위 사태개입 10단계의 순서대로 판단하여 개입하면 오류는 없다. 모든 잘못된 사상은 위 순서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사상이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까지 간섭하여 [잠을 잘 때는 이렇게 자라]한다면 이념이 퇴폐에 개입한 오류이다. 퇴폐는 사상을 떠난 플러스 알파의 이익이다. 이념은 거기에 개입할 수는 없다. 공유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사이비종교, 등 잘못된 사상의 오류는 대개 위 10단계의 순서를 틀려서 작은 일에 개입하고 큰 일에 방관하는 것이다. 이념은 인류전체가 공유하는 문제에 우선적으로 개입할 것을 명령한다.

인간의 사상들

사상들을 위 10가지 주의들로 분류구분 할 수 있다.

이념 ---> 일원론, 이원론, 다원론, 창조론, 유물론, 음양오행론, 등 모든 사상들이 적절히 인용하는 사상 이전의 학문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세계관이다.
기독교 이념 ---> 창조론
불교 이념 ---> 윤회론
유교 이념 ---> 조화론
도교 이념 ---> 음양오행론
마르크스 이념 ---> 유물론

주의 ---> 사상들은 위 창조론이나 유물론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데서 보충설명이 된다.
온전한 창조론이라면 모든 일은 신의 뜻이니까 인간의 사상은 필요없다. 신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인간에게 선택권이 없다.
온전한 유물론이라면 인간의 일은 모두 물질현상이므로 사상이 필요없다. 그냥 마음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유물론에서는 어떠한 악도, 선도 정당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은 위 이념의 테제에 대하여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데서 그 보충해설의 안티테제로 출발한다.
기독교주의 ---> 천국
불교주의 ---> 부처
유교주의 ---> 윤리
도교주의 ---> 도
마르크스주의 ---> 소외


낙관주의 ---> 낙관주의는 신과 인간, 운명과 인간, 역사와 인간을 1 대 1로 보아 기울지 않는 모든 사상이다. 이렇게 하면 된다 하고 인간을 풀어놓는 모든 긍정적 견해이다.
기독교적 낙관주의...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 구원의 약속
불교적 낙관주의...해탈, 깨달음
유교적 낙관주의... 인, 예, 학문
도교적 낙관주의...만물제동, 도
마르크스 낙관주의...사적유물론

비관주의 ---> 비관주의는 신과 인간, 역사와 인간, 운명과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 쪽으로 기우는 모든 사상이다. 이러면 안된다 하고 인간을 규율하는 금욕적, 억압적 강령들이다.
기독교적 비관주의...말세론, 원죄설
불교적 비관주의...생노병사
유교적 비관주의...윤리사상
도교적 비관주의...금욕사상
마르크스 비관주의...계급이론

합리주의 --->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하면 된다 하는 실천의 노하우를 제시하는 모든 방법론들이다.
기독교 합리주의...믿음, 소망, 사랑
불교 합리주의...4성제, 8정도, 수행
유교합리주의...왕도정치,
도교합리주의...무위자연
마르크스 합리주의...혁명이론

실용주의 ---> 합리주의로 하다가 안되니까 변질된 모든 사상들이다.
기독교 실용주의...종교개혁, 개신교
불교 실용주의...대승사상, 밀교사상
유교 실용주의...유교주의 정치제도
도교 실용주의...의학, 풍수지리, 불로장생술 등
마르크스 실용주의...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 김일성주의 등 변질된 공산주의

진보주의 ---> 대부분의 사상은 일정한 정도의 변혁사상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진보주의...부활
불교 진보주의...미륵사상
유교 진보주의...유교 이상국가론
도교 진보주의...농민반란운동(개벽)
마르크스 진보주의...마르크스 이상국가론

보수주의 ---> 사상들은 자기주장과 상반되는 변혁을 반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속세에서의 현실적 삶을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기독교 보수주의...이교도 배척, 현세부정
불교 보수주의...현세적 삶의 부정
유교 보수주의...과거지향적 역사인식
도교 보수주의...현세부정적 생활방식
마르크스 보수주의...자본주의 부정

현실주의 ---> 사상들은 주장이 현실과 유리될 때 마지못해 현실과 타협하고 받아들인다.
기독교 현실주의...기독교 계통의 신흥종교 출현
불교 현실주의...불교계통의 신흥종교,
유교 현실주의...한학, 민속보존운동
도교 현실주의...현실적으로 거의 몰락함, 기공술사 등
마르크스 현실주의...중국의 시장 사회주의

퇴폐주의 ---> 사상들은 현실주의에서 그 삶을 마감한다. 퇴폐주의에서는 사상이 필요없다. 쾌락주의, 허무주의, 염세주의, 사이비종교, 신비주의들이 퇴폐의 영역을 담당한다.
기독교 퇴폐주의...악마사상
불교 퇴폐주의...죄악
유교 퇴폐주의...반인륜
도교 퇴폐주의...현실참여
마르크스 퇴폐주의...자본주의

모든 주의 주장들은 위 열가지 사상체계의 전개에 하나이상씩 가담하고 있다. 그러나 위 열가지 체계의 전개에 모두 답할수 있어야 사상이라고 할수 있다. 단순히 개인주의 이기주의 하는 주의들은 위 열가지 중에 하나에 속할 뿐 독자적인 사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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